코로나19와 나이 든 사람의 죽음

🌘김보영

숫자가 된 죽음들이 있다. 뉴스 속 죽음은 숫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숫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죽음들은 대체로 숫자의 형태로 그저 흘러가 버린다. 그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크지 않다면 그 숫자에 생각이 머무는 시간도 짧다. 숫자가 쌓이고 쌓여 큰 숫자의 산이 되어 나타나면 비로소 그 무게를 느낀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거의 매일 숫자가 되어 뉴스에 나오지만, 그 숫자들이 산을 이루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 죽음의 무게를 쉬이 실감하지 못한다.

숫자가 된 죽음이 무게를 갖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유달리 가벼운 숫자들이 있다. 이를테면 건강한 스무 살 사람의 죽음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상을 살아가기 어려운 여든 살 사람의 죽음은 같은 무게로 다뤄지지 않는다. 건강한 스무 살 사람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되지만, 병든 여든 살 사람의 죽음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죽음이다. 이미 그의 삶은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조건 속에 놓여있었으므로, 예기치 못한 이유로 죽었다 한들 그의 죽음이 사회적 무게를 갖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은 요양시설 거주인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죽은 사람 1,486명 중 ‘요양원, 사회복지시설 등’ 집단거주시설 내 사망자는 777명으로 52.3%에 이른다(2021년 2월 10일 기준).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코로나19 현황판을 통해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다가, 그 죽은 이들의 숫자 하나하나가 실감을 갖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하다. ‘코로나19 방역 모범국’으로 이미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전략 및 성공 요인에 관한 연구까지 나오는 시점에 이 죽음들은 어디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코로나, 그리고 시설로의 ‘격리’

2020년 12월 28일, “코호트 격리되어 일본 유람선처럼 갇혀서 죽어가고 있는 요양병원 환자들을 구출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이 게시되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힌 청원 작성자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병원의 심각한 감염 상황을 알리며 요양병원 코호트 격리에 대한 정부 정책의 재검토를 요청했다. 코호트 격리란 ‘일반적으로 접촉주의, 비말주의, 공기주의 환자는 1인실 격리를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하나 격리 대상의 환자가 많은 경우 일정한 원칙에 따라 비슷한 조건의 환자들을 한 병실 또는 한 공간에서 격리’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감염원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코호트 봉쇄를 하는 동안 격리된 집단 내부 확진자와 비확진자 사이에 빠르게 상호 감염이 일어났고 이러한 집단거주시설에 코호트 격리조치가 즉각적으로 이뤄진 것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들을 쉽게 격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기사 보기).

정부는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3밀(밀집, 밀접, 밀폐)’의 상황을 피하라고 했지만 3밀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폐쇄병동과 집단거주시설에서의 집단 감염은 안전과 보호를 명목으로 유지되어 왔던 시설이 오히려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감염 위험을 높이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시설이 과연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질문하게 했다. 시설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안전’이 명목이었지만, 시설에 격리되어 있는 동안 바이러스는 더욱 급속히 퍼져나갔고 감염이 되었음에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이 결국 사망했다(기사 보기).

시설에 거주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탈시설’을 강력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국제장기돌봄정책네트워크가 26개국의 장애인거주시설, 요양시설, 정신병원, 장애아동 기숙학교 등 장기·집단시설을 조사한 ‘케어홈 코로나19 관련 사망률 통계(2020년 6월)’에 따르면, 코로나19 사망자 중 집단시설 거주 사망자가 약 4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코로나19 첫 사망자 또한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에 수용된 장애인이었으며 이후에도 집단시설에서의 감염은 계속되었다(기사 보기). 집단시설 거주인에 대한 손쉬운 격리조치는 이미 이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시설의 요구가 코로나19의 집단감염 사태로 더욱 강화되었지만 이미 과거부터 시설에 대한 비판적 담론과 탈시설 운동이 이어져 왔고, 특히 여러 당사자의 진술을 통해 시설이라는 구조적 조건이 배양하는 폭력의 문제들이 하나, 둘 밝혀져 오기도 했다. 즉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시설의 문제는 코로나19의 발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라기보다, 시설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가 코로나19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노인요양시설의 경우에는 어떨까? 요양서비스는 효율성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인요양시설은 다인실로 운영되고 원내 밀집도가 높다. 감염 예방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며 환기 시설이 미흡하거나 좁은 공간에서 소수의 의료진·돌봄노동자가 여러 환자를 돌보는 열악한 곳일수록 위험은 더 커진다. 이러한 시설에 적용되는 코호트 격리는 ‘코호트 격리가 아니라 그저 방치해놓은 것’이라는 성토가 나오고 있다(기사 보기). 나는 이와 같은 ‘방치’가 노인요양시설에 거주하는 이들의 생명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 나이 든 사람은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 든, 그러니까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여겨지는, 게다가 아프기까지 한 사람의 삶은 자주 포기된다. “요양병원은 병을 치료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노인요양시설 입소는 좋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적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기 위한 선택지인 경우가 많다.

노인요양 현장에서 20여 년 가까이 일하다 최근 퇴직한 한 요양보호사를 만난 자리였다. 그는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요양보호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도덕적으로 일하는지, 노인요양시설에서 얼마나 훌륭한 돌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자신은 ‘정신이 온전할 때까지는’ 절대 시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두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무엇을 의미할까?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시설에서의 삶은 절대 좋은 삶일 수 없다는 것일까?

요양시설에서의 삶의 시간

시설에 거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시설의 이윤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이루어지는 돌봄의 복잡한 의미들이 있다. 내가 방문했던 요양원에 있던 한 할머니는 상태가 악화되어 건너편 건물에 있는 요양병원에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을 간 상태였다. 할머니가 언제 다시 이 요양원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을 받을 수도 없고, 언제까지 자리를 비워놓을 수도 없어 요양원장은 곤란스러워했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기간에 비례해 요양원은 ‘손해’를 보게 된다. 요양원장은 건너편 요양병원에 할머니 안부를 물으러 종종 찾아갔고, 진심으로 할머니의 상태를 걱정하고 얼른 나아 요양원으로 돌아오라 격려를 보냈지만 이 격려는 요양원의 재정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돈을 위해서 마음에 없는 병문안을 한 것이라거나, 요양원장의 선의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요양원에서의 돌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어떤 물적 조건들이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곳이 ‘시설’이라면, 즉 이윤과 효율적인 경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설’에서 생애 말기의 돌봄을 받는다면 늘상 돌봄의 질과 돌봄에 소요되는 비용 사이에서 저울질당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하루에 기저귀를 몇 번 갈아주는지는 첨예한 문제다. 기저귀를 여러 번 갈수록 요양보호사의 노동강도가 올라가고, 기저귀 비용도 늘어난다. 시설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는 기저귀 교체 횟수를 줄여야 한다. 시설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돌봄 제공자의 진심 어린 의도나 헌신과 무관하게 시시때때로 효율, 비용 대비 효과 등을 최우선 순위에 두게 된다. 또 시설에서의 단체생활이 그렇듯 내가 듣고 싶은 음악, 내가 보고 싶은 TV 채널,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시설이 흘러가는 대로 내 삶을 함께 흘려보내야 할 때가 많다. 이 이야기들을 하는 까닭은, 누군가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그러니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고 딱히 큰돈을 들여 정성껏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시설에서 살아도 된다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시설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믿었던 건 아닌지, 그래서 코로나19의 대유행 상황에서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쉽게 격리를 떠올렸던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요양시설, 그러니까 나이 들고 아픈 몸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죽은 사람들의 죽음을 궁금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여생’이라는 말이 표현하듯 애초에 나이 든, 특히 나이 들고 아픈 사람의 삶은 죽음을 기준으로 산정되고, 그들은 늘 죽음을 기웃거리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죽음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되도록 괜찮은 삶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요양시설에서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거의 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사망한 사람의 대부분이 나이 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죽음은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 붙들어 놓지 못한다. 이들의 죽음뿐 아니라 삶도 사람들의 관심 밖이긴 마찬가지이다. 나이 든 사람의 삶은 자주 ‘민폐’로 재현된다. 그러니 우리는 크게, 그리고 오래 앓지 않고 죽길 바란다. 나를 위해서도, 나를 돌봐줘야 할 누군가들을 위해서도.

요양원에 자원활동을 다녀온 날이었다. 요양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식사와 잔일을 도왔다. 여러 날 요양원에 드나들며 ‘나이 들어도 요양원은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요양원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했다. 요양보호사들은 쉴 틈 없이 일하고 사람들을 돌봤다. 일을 조금 거드는 수준이었는데도 나는 금방 지쳤다. 너무 적은 수의 요양보호사가 너무 많은 사람을 돌보고 있었고, 입소한 거주인은 그저 시간에 맞춰 그날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다른 거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을 잤다. 자원활동을 다녀와서 나는 요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돌봄 과정이 얼마나 별로였는지를 한참 떠들었다. 그때 한 친구가 대답했다. ‘그런 데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다행인 거야.’

친구들은 늙어서 객사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잘 죽는 게 꿈이라고도 했다. 노인 빈곤율 44%인 나라에서 살다 보면 무사히 죽는 게 꿈이 되기도 한다. 사망 시점으로부터 한참 지난 후에 발견되는 ‘독거노인’이라든가, 폐지를 주우며 연명하는 노년의 삶을 흘끗 보며 요양시설에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을 짐작했기에 나는 친구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대답을 하고 싶다. 사람들의 욕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고.

욕망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노인요양시설은 ‘자립’이 어려운 고령의 사람들이 돌봄을 제공받는 시설이다. 나이 든 아픈 사람들과 그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때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아픈 몸을 가진,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노동하는 몸, 젊고 질병을 갖지 않은 신체를 기준으로 하는 이른바 ‘정상’적이고 건강한 몸에 대한 규범은 노년의 몸을 생산성 없는, 전적으로 돌봄과 개입을 필요로 하는 몸으로 규정지으며 노년기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복지를 나이 들고 병든 몸에 대한 최소한의 요양 ‘서비스’ 제공에만 머물도록 한다. 그렇기에 노년의 몸들이 갖는 욕망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본래의 설립 의도가 무엇이든 분리된 생활 세계로서의 사회복지시설은 불평등을 심화하며, 나아가 시설은 특정 집단을 열등하다고 규정한 전제 위에서 유지되며 낙인을 강화한다(나영정 외, 2020:198). 그러므로 우리가 나이 든 이들의 더 나은 삶을 고려한다면, 시설이라는 전제 위에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의 충족도를 중심에 두고 어떤 사회적 지원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주의 깊게 사유해야 할 지점은 이때의 개개인의 삶의 충족도란 단순히 ‘개인주의’에 매몰된 자립지상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도움이 필요한 몸은 ‘실패한’ 몸이 아니며, 누구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노년학자인 마거릿 크룩섕크는 “도움을 기꺼이 청하겠다는 마음,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자기충족적일 수는 없다는 자각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노화의 덫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크룩섕크, 2016:65)고 말한다. 늙는다는 것, 생애 어느 시점보다 타인의 도움이 더 필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 각자가 받아들이고 소화해 나갈지 고민해보자. 이 사유들 사이의 좁은 길을 내어 나가 보자.

‘어차피 살날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양보해야 했던 욕구들이 지금보다 자유롭게 꺼내어질 수 있는 세계를 그려본다. 삶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이를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말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마스크만 벗을 수 있다면, 여행을 갈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이전까지 우리가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일상을 그리워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정도의 일상만으로도 우리가 충분히 괜찮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나는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고, 코로나 이후의 삶에 대한 상상의 범위가 그저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 세상, 코로나를 치료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발견된 곳곳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더 나은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세계로 뻗어 나가길 바란다.


참고문헌

  • 나영정 외(2020), 『시설사회』, 와온.
  • Cruikshank Margaret(2003), Learning to be old : gender, culture, and aging, 이경미 역(2016), 『나이듦을 배우다』, 동녘.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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