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 트랜스젠더리즘은 해롭다?

지난 10월 2일, Fwd는 「쉴라 제프리스의『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를 발행했다. 이후 쉴라 제프리스는 각각 부산, 광주, 서울 세 도시에서 강연을 진행했으며,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에 강연 후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 강연에 참여한 많은 이들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대모’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며 트랜스젠더리즘을 비판하는 제프리스의 목소리에 환호를 보냈다. 이 글은 제프리스의 주장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같은 시대의 지형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가 제프리스의 이론에서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1편에서 제프리스의 ‘젠더’ 개념이 갖고 있는 오류를 분석하고, 잘못된 기반 위에서 시작된 이론이 당도할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적 결론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제프리스의 주장을 다루고자 한다. 제프리스가 트랜스 이슈를 협소한 의미로 정의하고 왜곡시키는 과정, 트랜스 운동이 갖고 있는 역사성을 페미니즘으로부터 떼어놓는 과정, 그리고 트랜스젠더 개개인의 존재양식과 실천을 협소하게 재현하는 과정은 매우 문제적이다. 제프리스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허구적인 개념을 만들어내는지, 이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 전략들은 무엇이며, 최종적으로 손에 넣고자 하는 결과물은 무엇인지를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주장이 놓여져 있는 정치적 위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트랜스젠더=트랜스젠더리즘?

트랜스젠더 개념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치적인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대 이래로 인접한 다른 이슈들과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경계를 획정하고, 때로는 타협해왔다. 트랜스젠더 운동의 역사를 개괄한 수잔 스트라이커는 트랜스젠더를 “특정한 목적지 혹은 전환의 방식이 아닌,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출발지로부터 멀어져 사회적으로 부과된 경계를 가로지르는 움직임(Stryker, 2008: 5)”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스트라이커의 정의는 ‘트랜스젠더’ 용어가 개개인을 지칭하는 정체성 표지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지혜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리즘이란 “트랜스젠더의 이슈, 역사, 정체성, 정치학 등을 다루는 포괄적인 담론”(김지혜, 2011: 53)으로, 여기에서 트랜스젠더리즘은 그 자체로 정치적・담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1].

반면 제프리스는 책의 초반부에서 트랜스젠더리즘을 “전통적 젠더 역할에 불편함을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정의한다. 언뜻 보아 기술적이고 중립적인 이 설명은 트랜스젠더리즘을 단순히 ‘개인들’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축소시킨다. 다시 말해 제프리스의 이론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개념인 ‘트랜스젠더’와 사회적 담론을 가리키는 개념인 ‘트랜스젠더리즘’은 구분되지 않으며, 이는 그의 의도적인 혼용인 듯하다. 서로 다른 층위의 두 개념을 뒤섞으면서, 제프리스는 가장 포착하기 쉬운 실재인 트랜스젠더 개인을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고, 트랜스젠더리즘을 그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러한 논리구조 안에서 성별 위화감과 ‘성별 정정’ 수술,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욕망들의 맥락은 지워지고, 오로지 트랜스젠더 개인의 ‘선택’만이 과도하게 부각된다.

또한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운동의 역사와 성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문제를 보인다. 앞서 살펴보았듯,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가 갖는 사회변혁적인 성격을 지워버림으로써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해버린다[2].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전제하고 있는 ‘개인’과 ‘운동’, ‘정치’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협소하고 자의적이다. 이는 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목표, 즉 개인의 자율적 선택 혹은 욕망으로 설명되어 왔던 현상들이 실은 사회적 맥락을 통해 규범적으로 구성된 것이었음을 밝혀내는 작업의 의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또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 그중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과 완전히 별개의 흐름인 양 설명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단순하게 딱 잘라 설명될 수 없다[3]. 이들은 사회적으로 부과된 규범 혹은 억압으로서, 즉 후천적인 구성물로서 성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각 다른 방향에서 이성애중심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친연성을 지닌다. 성기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특징은 ‘성별’의 사회적인 인지와 필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사회적 표지로서의 여성성/남성성과 여성/남성 신체, 욕망 역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공식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낸 데 트랜스젠더 운동의 영향이 지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 페미니즘의 침입자 MTF(Male to Female)?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리즘을 비판하기 위해 우선 트랜스젠더 ‘탄생’의 배경을 개괄한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제니스 레이먼드(Janice Raymond)가 『트랜스섹슈얼 제국: 쉬-메일의 생산The Transsexual Empire: The Making of the She-Male』(1979)에서 전개한 논의를 거의 그대로 따라, 트랜스젠더가 남성 집단의 의료 권력에 의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남성 집단은 ‘여성성을 수행하는 남자’를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이성애 규범의 강화를 통해 남성성을 지켜내고자 했고, 이는 성전환 수술을 가능케 한 의료 기술의 발전에 따라 현실화되었다. 남성 집단이 ‘여성적인 남성’을 ‘성전환 여성’으로 전환시키면서 트랜스젠더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제프리스와 레이먼드가 주목하는 6-70년대 미국의 의료계에서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 권리를 지지했던 이들이 소수였으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주변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게다가 제프리스의 이와 같은 설명에 해당하는 트랜스젠더란 사실상 MTF 뿐이라는 점도 문제가 있다. 남성성을 지키기 위한 남성 집단의 욕망으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설명하는 한, 트랜스젠더에 대한 논의는 MTF에 대한 논의로 한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트랜스젠더를 MTF와 등치시킴으로써,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논의에서 FTM을 교묘히 삭제한다.

한편 제프리스는 MTF 트랜스젠더를 남성중심적 의료 제도의 산물로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여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자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MTF 트랜스젠더들은 의학적 조치를 통과하여 ‘여성스러운’ 외모 꾸미기를 통해 ‘여성성’을 강화하고, 여성 집단(여성전용공간, 여성 스포츠, 여성 자조 모임, 레즈비언 공동체)에 침입하며, 이성애 부부관계를 교란한다는 것이다. (『젠더는 해롭다』의 한국어판 출판사 열다북스는 한 술 더 떠 ‘트랜스젠더 아내들의 고통’, ‘여자를 위협하는 정신적 여성들’이란 제목의 카드뉴스를 제작・배포하면서 이러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여성 공간을 침입하는 ‘남성’으로 지정하면서, 성별 정정의 문제를 정체성 혹은 사회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피억압자에서 억압자로 자신의 지위를 이동시키고자 하는 행위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트랜스젠더리즘이란 한 개인이 남성 권력을 중심 축으로 삼아 여성을 해치는 가해자로 변신하는 경로이다. 

이렇듯 트랜스젠더가 페미니즘을 해치는 가해자라는 주장은 (법적, 의료적) 성별 정정, 더 나아가 트랜스젠더 정체화가 ‘의도된’ ‘선택’에 의한 ‘자율적’ ‘행위’라는 전제 위에 있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듯, 젠더는 법을 비롯한 사회적 제도와 몸이 특정한 방식으로 ‘읽히는’ 일상적인 문화 전반과 협상하며 구축되고 변경된다. 여성해방이 개인의 의지에 따라 젠더를 초월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의 문제 또한 ‘의지’의 문제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게다가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이들의 욕망을 “남자됨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빼앗겨 여자됨이라는 종속적 위치로 내몰리”는 흥분으로 설명한다(Jeffreys, 2019[2014]: 94). 이는 트랜스젠더를 ‘이상 성욕 혹은 마조히즘적 기질을 가진 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과 (외과적 수술, 호르몬 요법을 통한) 몸의 변형을 단순히 개인적인 병리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제프리스의 MTF 트랜스젠더 재현은 개인이 자신의 성별을 인지하는 방식과 젠더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욕망들을 마치 같은 층위의 문제인 것처럼 뒤섞는다. 제프리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MTF 트랜스젠더들은 ‘여성적’ 성역할을 답습하므로 ‘여성혐오적’이고, 섹스 카스트가 해체되면 그들의 존재는 성립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들의 경험, 그중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인지하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은 제프리스의 주장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다. 성별 정정 수술이나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기 전부터 그 이후까지도 트랜스젠더들은 몸에 대한 혐오감, 또래나 지지집단으로부터의 고립감과 배제, 불안, 우울 등의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현상은 MTF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의도된 선택과 조절의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을 둘러싼 몸과 무의식, 욕망의 영역을 반드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MTF 트랜스젠더들을 오로지 ‘여성성’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모습으로만 포착하며, 이 외에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이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이론의 이름을 빌려 트랜스젠더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기반이 된다.

3. 페미니즘의 반역자 FTM(Female to Male)?

그렇다면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남성(FTM)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제프리스에 따르면 FTM은 여성성을 훼손하고 남성성을 숭배하는 일종의 반역자이다. 제프리스는 FTM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세운다. 첫 번째 설명은 FTM이 여성의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 ‘남자됨’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남성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Jeffreys, 2019[2014]: 239). 또 다른 설명은 이성애 규범적 관습을 따르고자 하는 레즈비언이 트랜지션을 통해 신체적 남성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제프리스가 보기에 레즈비언 공동체 내 펨/부치의 존재는 이성애 질서를 재현하는 역할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FTM의 욕망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서만 설명된다. 제프리스는 이 때문에 FTM 트랜스젠더리즘이 레즈비언을 ‘교정’하려는 의료계의 수법이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레즈비언’이라는 지위”를 지운다고 비평한다(Jeffreys, 2019[2014]: 246-247). 그럼으로써 FTM은 여성이라는 “피지배 카스트를 벗어나 ‘남자됨’이 주는 이득”(Jeffreys, 2019[2014]: 239)을 노리기 때문에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가부장제 부역자가 된다. 이러한 ‘억압-피억압’의 구도 안에서 FTM은 의료계의 피해자인 한편, 성별 정정 의료적 조치의 결과에 힘입어 이성애자가 됨으로써 억압의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레즈비언으로 설명된다.

제프리스는 FTM을 레즈비언 여성으로 호명하면서 FTM의 남성적 주체성 경험과 남성성 수행을 비판하고, FTM과 레즈비언 여성, 특히 부치-펨 관계를 하나의 역할놀이이자 레즈비언의 트랜스젠더화로 설명한다. 제프리스에 따르면 FTM과 부치는 모두 레즈비언이지만, 남성성을 신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경계가 나누어진다. 즉 부치와 FTM 모두 이성애 문법 안에서의 남성성을 모방하고 있는 존재로 보며, 따라서 이들의 원본을 ‘남성’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시 여성성과 남성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고정한다. 여기에서 제프리스 논의의 내부적 모순이 나타난다. 제프리스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생물학적 섹스에 부착된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또 이를 MTF/FTM과 레즈비언 등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본질로서의 남성성/여성성에 대한 모순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설명 안에서 ‘본질’은 형체가 없는 불안정한 지칭으로 떠다닌다.

이와 같이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에 관련된 모든 주장에서 MTF를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남성으로, FTM을 남성성을 숭배하는 여성으로 호명하면서 트랜스젠더를 출생 시 지정된 성별로 다시 돌려놓는다.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트랜스젠더를 가해자의 위치에 둔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존재와 위치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제프리스의 논의는 생산적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만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4. 우리가 닿으려는 ‘지향점’에서 출발하기

제프리스가 『젠더는 해롭다』에서 활용하고 있는 논리구조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합당한 비판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해버린다는 데에 있다. 제프리스의 논의는 대부분 분석의 원인과 결과가 서로 맞물리는 순환적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다양한 사례와 개념들이 위치한 맥락을 편리하게 제거해버린다. 이는 합당한 주장과 개입의 여지를 차단하고, 상대에게 논지 입증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A와 B 둘 중 단 하나의 입장만을 선택하는 것만이 옳은 것처럼 제시함으로써 페미니즘이 구축해 온 역사를 한순간에 무화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중일택의 논리구조 안에서 퀴어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은 완벽히 상호배제적인 것처럼 묘사되며, 여성과 트랜스젠더는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반대의 범주라는 아이디어만이 강화된다[4]. 

제프리스의 모든 억지 주장은 결국 단 하나의 결론, 즉 “트랜스젠더는 해롭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제프리스에 따르면 MTF 트랜스젠더는 여성에게 해악이 되는 여성성을 여성의 본질로 고정하고 이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해롭다. 다른 한편으로 FTM 트랜스젠더는 레즈비언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이성애 규범성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해롭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인과관계 및 피해와 가해의 관계를 뒤집는 설명이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가 마치 젠더 이원론을 생산하거나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사실 트랜스젠더를 트랜스젠더로 표지하는 것은 젠더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회적 기대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실이다. “트랜스젠더는 해롭다”라는 주장으로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임을 공개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Butler, 2015[2004]: 23), 그들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견고한 구조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위치변경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은 오히려 이원적인 젠더 관계를 당연시하고 이 관계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릇된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할 수 없도록 하는 비생산적일 주장일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주장이다. 

트랜스젠더에 관한 제프리스의 주장은 ‘트랜스젠더’와 같은 ‘페미니즘에 해로운 존재’들을 몰아냄으로써 ‘진정한 여성 이슈’를 다룰 수 있는 ‘진정한 여성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기획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는 운동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혹은 지향점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 채, 모두가 끊임없이 운동 주체들의 자격을 검열하고 경계를 나누기 위한 작업에 머무르게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때 이 질문은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서 닿으려는 지향점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Ahmed, 2017[2017]: 12)”는 사라 아메드의 통찰은 2019년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에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1] 트랜스 이슈에 대한 페미니즘의 주요 논쟁에 대한 개괄은 다음의 문서들을 참조.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hopy, “Feminist Perspectives on Trans Issues”; 운조(2005). “트랜스젠더”, 『여/성이론』 12, 297-313쪽.
[2] 이러한 주장은 트랜스 실천들을 젠더에 기반한 억압에 대한 “개인적 해결(personal solutions)”로 치부하며 비판했던 1970년대 미국의 몇몇 페미니스트들의 입장과 공명하고 있다. 진정한 여성들이 젠더 억압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공동체적 저항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달리, 트랜스젠더들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의료 수술을 통해 이기적으로 혼자 탈출하려 든다는 것이다(Stryker, 2008).
[3] 제프리스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의 관계를 “남성 우위를 격파해 모든 여자의 지위가 향상되도록 노력하는 게 페미니즘이라면, 여자 개개인이 남자라는 카스트에 편입해 자기 지위를 높이도록 허락하는 게 트랜스젠더리즘”(Jeffreys, 2019[2014]: 236)라고 설명한다.
[4]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Get the L ouf of in Korea” 운동 또한 이러한 흐름의 일환에 있다. 퀴어 이론이 레즈비언과 여성들에게 이롭지 않다는 이들의 주장은 170여개의 단체 및 개인이 참여한 한국의 연서명문에 반영되어 있다. “그동안 퀴어 정치학은 레즈비어니즘을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여성들의 연대를 부정하며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성애적 시각만을 세뇌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번 선언을 계기로 레즈비언에 대한 가부장적 인식을 거부하고 페미니즘의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여성들의 연대를 ‘레즈비언’이며 자매애라고 부르겠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그리고 새로 만들어지는 모든 형태의, 모든 여성의 연대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Get the L Out Korea 선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Get the L Out in Korea 선언문’ 중).”


참고 문헌

  • Sheila Jeffreys. (2014). Gender Hurts: A feminist analysis of the politics of transgenderism. NY: Routledge. 유혜담 옮김(2019). 『젠더는 해롭다 :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본 트랜스젠더리즘』. 인천: 열다북스.
  • Judith Butler. (2004). Undoing Gender. NY: Routledge. 조현준 옮김(2015). 『젠더 허물기』. 서울: 문학과지성사.
  • Sara Ahmed. (2017). Living a Feminist Life. North Carolina: Duke University Press. 이경미 옮김(2017).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서울: 동녘.
  • 김지혜(2011). “페미니즘,레즈비언/퀴어이론,트랜스젠더리즘 사이의 긴장과 중첩” 『영미문학페미니 즘』. 제19집 2호. 53 -77쪽.
  • Susan Stryker. (2008). Transgender History. NY: Seal Press.
  • Janice Raymond. (1979). The Transsexual Empire: The Making of the She-Male. Boston: Beacon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