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돼지, 여자=여자, 죽음=죽음

👩‍💻 허주영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학과지성사, 2019, 9쪽.

1. 아는 것, 모르는 것

고등학생 때 시 창작 수업에서 거리 두기에 대해 배웠던 적이 있다. 거리 두기는 ‘낯설게하기’, 즉 익숙한 사물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거리를 두면서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여기는 일상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창작 방법이었다. ‘낯설게하기’를 위해서는 익숙한 일상을 살피는 일과 잘 아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일을 선행해야하고, 익숙한 대상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힘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했다. 익숙한 단어들을 낯설게 보기 위해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필사하고, 패러디 하면서 머리에 한껏 힘을 주던 나날이었다. 당시에는 일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비일상적인 것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낯설어보였고, 좋은 발견이라며 같은 반 초보들끼리 서로 칭찬하고 다독여주었다.

‘낯설게하기’가 시 창작에 기초가 되는 작법임에도 매번 실패했던 것은 사실 익숙한 것은 익숙한 것일 뿐, 잘 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에 적어둔 김혜순의 문장을 빌려오자면, 아시아인, 짐승, 여자인 당사자가 “아시아인”, “짐승”, “여자”를 잘 안다는 의미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아시아인, 짐승, 여자에게 “아시아인”, “짐승”, “여자”는 익숙하지만 모르는 것이다. 결국 ‘낯설게하기’는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익숙한 것을 잘 알기 혹은 익숙하지만 잘 모르는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익숙한 것들을 익숙하지 않은 곳에 배치시키는 것만으로도, 예컨대 ‘나의 창문을 네 신발심어버리는 것’만으로도 꽤 낯선 모양새를 갖췄다고 착각했기에 ‘낯설게하기’는 텅 빈 문장만을 생성하며 줄곧 낯설기만 한 시, 그래서 애매하게 실패한 시를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물리적인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지금, ‘낯설게하기’는 시기적절해 보인다. 주변에 도사리는 모든 사건, 사고, 사물들을 낯설게 포착하여 모르는 것들을 다 알아버리고, 나의 예술 행위에 가두어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하는 생각과 이러다 이 시국에 대단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에 마스크 속에서 입꼬리만 잠시 웃었다. 일상의 구멍들을 살피는 일, 이른바 ‘뉴 노멀’을 담론 차원으로 끌어내는 팬데믹 상황에서 인류는 현재 위치 지어진 시공간에서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가려내는 일, 그리고 그 관계망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라는 일종의 구호가 모두를 위한 구호로 전환되는 적절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도 속에서 익숙하지만 잘 모르는 것들은 발견된다. 인간이 닦아놓은 경로를 타고 인간에게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바이러스와 질병의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함에 대해 모르고, 인간 신체와 병원체가 맺는 관계에 대해 모른다. 바이러스 병원체는 진화를 거듭하지만, 인간은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의 감각은 깨달음에 가까운 불안의 감각으로 불어나고, 불안의 감각은 신종 바이러스를 대하는 방식, 관계 맺는 방식에 변화를 주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이처럼 잘 모르는 것의 발견이 곧바로 아는 것 혹은 알아가는 것으로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0년 전 구제역과 현재 코로나 19의 방역 방식은 눈앞의 위기에만 급급한 조삼모사식 통제와 격리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1]. 위기 속에서 차별과 혐오는 언제나 최약체에 들러붙는다. 감염병 예방을 명분으로 돼지와 닭을 죽이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반복되는 생매장에도 익숙하다. 신종 감염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의 원인은 열악한 환경의 가축식 농장, 단일종 생산 농업 등 주변의 문제들을 외면하기에 있다. 돼지 동물과 인간 동물의 상호연루된 신체에 낯선 개입으로 응답하지 않음은 익숙한 위기를 불러오고 오히려 도미노로 세워진 관계망 속에서 바이러스가 전염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춰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한겨례, “구제역과 닮은 코로나, 회피할 건가 참여할 건가”, 2020.6.15.(기사보기)

2. 우리가 모르는 팬데믹, 낯설게 개입하기

“우리”가 팬데믹에 대해 모르는 것은 그것이 예측 불가능한 것,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기보다, 바이러스와 질병을 외부의 침입자이자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상정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신체 사유는 질병을 외부의 침입으로 이해하는 면역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기관을 지칭하던 면역이라는 단어는 취약하게 연결된 몸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피츠패트릭은 면역계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은유였을 것이라고 말한다[2]. 질병은 은유를 통해, 특히 전쟁의 은유 구조를 통해 이해되어 왔다. 감염자가 늘어날 때마다 각 국가와 지자체 또는 기업들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전쟁 선포는 통제라는 목표를 위해 마땅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팬데믹의 모든 원인을 ‘나’ 혹은 ‘우리’가 아닌 외부로 돌린다.

[2] Michael Fitzpatrick, Myths of Immunity: The Imperiled ‘Immune System’ Is a Metaphor for Human Vulnerability (원문보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천산갑을 거래하는 화난 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되자, 바이러스의 ‘침략’은 우한-중국-아시아의 ‘공격’으로 묘사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에는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신선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시장이 있다. 이는 마을의 크고 작은 시장들은 대형마켓에서 식량을 대량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방식인 미국인들에게 덜 위생적이고 덜 문명화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문화적 평가는 마치 공중보건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인 듯 제시된다[3]. 그 결과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과 폭력은 전세계에 지금의 위기와 고난의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비난 받아도 마땅한 것으로, 마치 혐오의 기회를 얻은 듯 심해져 ‘#StopAsianHate’ 해시태그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세계를 향해 공격하는 ‘외부’는 혐오의 이동경로를 따라 범위를 넓히거나 혹은 최약체라는 연속체에 옮겨 다닌다. 투과성, 내부와 외부, 유출과 유입의 신체는 이민자와 같은 낯선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4]. 코로나 바이러스가 촉발한 혐오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면, 동물-중국-동아시아-동성애-노년층 등 사회적 낙인은 무작위가 아니라 새삼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적 정상성에서 배척되는 혐오 대상이었던 특정 집단에 들러붙는다. 즉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문제들은 취약체에 들러붙어 모든 위기의 원인으로서 분노의 대상이 된다. 질병에 걸리기 쉬운 유형이나 성격이 있다는 믿음이 아픈 사람 스스로 병을 자초했다는 인식을 키우는 것처럼 전쟁 은유는 타자이자 개인에게 질병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5].

[3] 중국의 야생동물 거래와 같은 틈새 시장을 수직 계열로 기업화된 대형 마트 중심 시장이 낳은 사회 경제 혼란의 결과로 분석하기도 한다. 자크 프롤리, 「코로나19 팬데믹은 중국 야생동물 시장 탓일까?」, 『과학잡지 에피 13: 식량의 과학』, 이음, 2020, 41~44쪽.
[4] 스테이시 앨러이모, 『말,살,흙』, 윤준·김종갑 옮김, 그린비, 221쪽.
[5]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61, 73쪽.

그러나 “우리”는 상호연루되어 있다. 지금 내 앞에 도착한 위기의 맥락과 연루된 관계들을 긴밀하게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팬데믹이 인류에게 주는 경고이며 동시에 기회인 익숙하지만 모르는 것을 알게됨, 즉 ‘낯설게하기’의 개입과 더 나은 삶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를 실천하며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듯 하지만 예방보다는 치료를 통해 생겨나는 제약 산업의 이윤과 백신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거대 자본, 기존 산업과 기업이 선점할 수밖에 없는 같은 구조 속에서의 ‘뉴 노멀’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사회의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시시각각 변경되는 국가의 방역지침을 가장 재빠르게 수행하고 그것을 또 다시 무고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실천’을 위해 일일이 명령해야하는 알바생들, 계속되는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 자택 근무와 온라인 수업 등으로 인한 독박 돌봄 노동 증가, 여성 노동자 실업 등 ‘뉴 노멀’을 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들은 오히려 팬데믹의 최전선에 놓여지며 더욱 취약해진다. 이처럼 최악의 경제위기를 체감하는 집단과 재앙이 불러오는 호황 속에서 축배를 드는 집단에게 위기는 공평하지 않다.

위기 극복과 복원의 서사에 개입하는 여러 집단 사이의 관계망은 자본의 흐름을 총체적이고 일관성있게 보이도록 하지만, 그럼에도 취약 집단이 더욱 취약해지는 구도 속에서 위기는 다층적이고 교차적인 생산 영역들, 노동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영역과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깨기도 한다[6]. 그렇다고 팬데믹의 위기를 “아시아인”, “짐승”, “여자”에 돌릴 수 없다는 점이, 표준의 영역인 “서구”, “인간”, “남자” 혹은 자본주의의 역사로 축소할 수는 없다. 팬데믹의 원인과 그 책임은 상호연결과 계층을 막론하고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폭넓은 연대의 정치학을 요청한다[7]. 인류에게 도착한 바이러스로부터 일상은 정지되고, 일상의 정지가 들추어지는 사회문제들이 있고, 이는 또다시 ‘뉴 노멀’을 논의할 수 있는 순간들을 제공한다. 즉 우리가 익숙하지만 몰랐던 것들에 낯설게 개입할 수 있는 기회들을 얻는 것이다.

[6] Bear, Laura, Karen Ho, Anna Lowenhaupt Tsing, Sylvia Yanagisako, “Gens: A Feminist Manifesto for the Study of Capitalism”, Society for Cultural Anthropology, March 30, 2015 (원문보기)
[7] 디페시 차크라바티,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 박현선·이문우 옮김, 문화과학 97, 문화과학사, 2019, 153-154쪽.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낯설게하기’를 일종의 작법으로 사용해 온 문학은 위기가 불러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익숙한 불안과 위기를 낯설게 할 수 있을까? 김혜순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머리말에서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여자짐승아시아이고자 함’으로 설명하며 이 땅의 모든 시인들에게 모르는 것에 개입하기를 요청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가 되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익숙한 불안과 위기인 ‘여성짐승아시아’는 ‘-하기’를 경유하여 “끝끝내” 모르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끝끝내” 되고자 해야 하는 것이 된다.

3. 은유와 거리두기

동물 은유는 여성의 수동적인 경험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은유는 드러내고 동시에 감춘다. 그런데 아는 것은 드러내고 모르는 것은 감춘다. 김혜순은 2011년 구제역 파동에 죽은 돼지들을 애도하며 2012년 문예중앙 여름호에 시 「피어라 돼지」를 발표했다. 330만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하는 잔혹함 앞에서 시인은 “은유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은유가 더이상 실제로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장소, 경험하는 세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선 시를 읽어보자.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중략…)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 「피어라 돼지」 부분, 『피어라 돼지』

이 시는 ‘낯설게하기’에 성공했는가. 육식은 익숙하고, 도살은 낯설다. 1500년대부터 시작된 구제역으로 인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집단매몰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음에도 육식을 위한 가축식 농장의 돼지들이 파묻히는 장면과 울음소리들은 독자들을 괴롭게 한다. 캐럴 제이 애덤스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동물은 도살을 통해 부재 지시 대상[8]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9]. 육식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는 있지만 울음 소리를 듣거나, 솟구치는 피를 보는 것 등 도살의 과정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식탁 위의 고기는 동물이지만, 육식에서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돼지들이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구덩이 속으로 파묻히고 “무덤 속에서 운다”는 서술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동물성에 대한 혐오는 사회 전체에서 작동하고,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동물적 본질 자체를 혐오하게 된다. 이러한 혐오는 특정 집단, 대체로 약한 집단에 투사되어 종속의 전략으로 사용된다[10]. 일종의 예방으로 살처분을 당한 돼지들로 땅은 오염된다. 돼지의 비극은 땅에 묻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주렁주렁 열려” 오염된 사실들을 드러내고 또 다른 오염을 불러올 것이다. 오염되도록 내버려둔 돼지의 몸들은 땅을 오염시키고, 오염된 땅은 또다시 취약한 몸들을 오염시킬 것이다.

[8] ‘고기’라는 지시자reference에 ‘동물’이라는 지시 대상referent은 부재한다. 이는 삼겹살을 보고 돼지 동물을 떠올리는 일을 어렵게 한다.
[9]  캐럴 제이 애덤스, 『육식의 성정치』, 류현 옮김, 이매진, 2018, 104~110쪽.
[10]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사랑, 『오늘부터의 세계』, 메디치, 2020, 126쪽.

동물이 부재 지시 대상이 되는 또 다른 방식은 은유이다. 동물의 개념 영역을 통해 인간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은유는 동물이라는 대상을 추상화하며, 인간의 경험을 드러내고 돼지의 경험을 감춘다. 「피어라 돼지」는 돼지를 질서에 대항하는 몸으로, 돼지와 인간이 다를 바 없이 위계질서 안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해석된 바 있다[11]. 시집 『피어라 돼지』에 해설을 실은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돼지의 죽음이 인간을 대신하여 받은 고통으로 이해한다. 또 돼지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정작 그 “바깥” 사실을 잘 모르며, 이를 “돼지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자 희생에 대한 위로로 해석한다[12]. 자연과 인간 혹은 짐승과 인간의 질서를 세울 때, 계급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바깥”에서 내부로 직접 연루되지 않아도 무방한 관조자가 된다. 그리고 불평등한 환경 문제의 분배로 일어나는 내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인간의 슬픈 감상은 피해의 책임 혹은 인간의 문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구분에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모른다”라는 말로 위기에서 모면한다. 인간의 잘못이 돼지의 죽음으로 확장되거나, 돼지의 죽음이 인간의 회계이자 자조적인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말 그대로 생매장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반성하는 삶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일까.

[11] 안상원(2019). “김혜순 시의 ‘몸’이미지와 언술양상 연구”, 『이화어문논집』 제49집, 215쪽.
[12] 권혁웅, 단 한 편의 시, 김혜순,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사, 2016.

문학 연구에서 김혜순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신체 이미지는 주로 여성의 삶을 체화한 물질로서 논의되었다.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의한 폭력과 위계에서 최하위로 강등되는 몸의 경험의 언술방식은 여성적 글쓰기를 경유하여 해석되었다. 질서화된 여성의 신체가 현실과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즉 여성이지만 규범적 여성이지만은 않은 양가적인 의미가 도출되는 것이었다. 특히 김혜순의 시적 언어는 기존의 남성 언어가 아닌 새로운 여성의 언어를 은유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다른 여성 시인들과 차이를 두고 해석되었다[13]. 기존의 작품과 김혜순 시가 해석되어온 방식을 빌려 이 작품을 보자면, 『피어라 돼지』라는 시집 전체를 질서화된 몸이자 그것에 대항하는 몸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돼지의 죽음을 인간 보편의 경험, 혹은 여성의 신체를 통해 추상관념으로 변형하는 것은 김혜순의 글을 보다 덜 정치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동물을 부재 지시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시인의 작품세계가 우리가 위치 지어진 실제 삶의 세계와 구분될 수 없다면, 세계의 변화는 작품의 변화를 불러온다. 당연한 말을 중요한 곳에 배치한 것 같아 머쓱하지만, 한 시인의 시가 해석되어온 방식이 기점을 통과한 다음 작품에 비슷하게 적용되기는 어렵다.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김혜순의 작품세계에서 구제역은 그러한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  윤혜옥(2013). “여성의 몸과 젠더의식 -문정희,김혜순 시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46권, 409쪽.

다시 말하자면, 돼지의 죽음은 은유가 아니라, 돼지의 죽음 그 자체이다. 존 버거의 말대로 최초의 은유가 동물이었다면,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은유적이라면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서 기꺼이 “소금에 절여 버”리는 관계를 숨기고 동시에 드러낸다[14]. 330만 마리 돼지의 죽음은 슬픈 동물의 죽음을 감상하는 애도가 되거나 인간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구조화할 수도 없다. 살게 만들거나 죽게 만들거나(make live or make die), 살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것(let live or let die)이 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오염’된 혹은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돼지를 살처분하는 잔혹함 앞에서 인간의 몸과 돼지의 몸을 위계질서 안에 놓거나, 여성의 신체와 돼지의 신체를 나란히 배치했을 때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까? 오염은 누구의 것이며,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쟁의 은유 구조 안에서 인식되는 질병, 그 질병의 최대 피해자를 밝히는 것이 오염원을 색출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돼지의 몸과 여성의 신체, 그리고 위계질서에서 낮고 낮은 것들을 특정 집단화하는 것은 질병의 원인과 책임도 함께 매몰한다. 즉, ‘나’의 질병과 ‘그들’의 질병을 구분하는 일은(구분의 결론이 구분 없음으로 나아가더라도) ‘나’의 책임과 ‘그들’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시인의 은유에 대한 고백은 시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은유가 감추는 것, 은유가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시가 감춘 것,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서 다시 들추어내고 말을 거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은유 구조를 들추어내고 심지어는 은유에 대해 사과하며 시인은 시인으로서 시인의 자리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에 개입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 글은 구제역 이후 10년,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한 가운데에서 문학에 “알고자 함”을 요청한다.

 [14]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박범수 옮김, 동문선, 2000, 15~16쪽.


참고문헌

  • 김혜순 (2019).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학과지성사.
  • 권혁웅, 단 한 편의 시, 김혜순 (2016).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사.
  • 디페시 차크라바티 (2019).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 박현선·이문우 옮김, 『문화과학』 97권.
  • 마사 누스바움(2020). “혐오와 사랑”. 안희경, 제러미 리프킨 엮음.『오늘부터의 세계: 세계 석학 7인에게 코로나 이후 인류의 미래를 묻다』. 메디치.
  • 안상원 (2019). “김혜순 시의 ‘몸’이미지와 언술양상 연구”. 『이화어문논집』, 제49집.
  • 윤혜옥 (2013). “여성의 몸과 젠더의식 -문정희,김혜순 시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46권.
  • Adams, Carol J. (1990). The Sexual Politics of Meat. UK: Bloomsbury Publishing. 류현 역 (2018). 『육식의 성정치』. 이매진.
  • Alaimo, Stacey(2010). Bodily Natures: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 Indiana University Press. 윤준·김종갑 역(2018). 『말,살,흙』. 서울: 그린비.
  • Bear, Laura, Karen Ho, Anna Lowenhaupt Tsing, Sylvia Yanagisako(2015). “Gens: A Feminist Manifesto for the Study of Capitalism”, Society for Cultural Anthropology.
  • Burger, John (1980). About Looking. UK: Bloomsbury Publishing. 박범수 역 (2000). 『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 Sontag, Susan (1978). Illness as metaphor. Farrar, Straus & Giroux. 이재원 역 (2002).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 Fitzpatrick, Michael, “Myths of Immunity: The Imperiled ‘Immune System’ Is a Metaphor for Human Vulnerability”. Society for Cultural Anthrop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