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에 관하여 – 피해자에 연대하는 것이 예의이다

☁ 미현

서울시장장으로 치러진 故 박원순 서울시장 장례가 마무리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예의’가 화두가 되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는 故 박원순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그걸 예의라고”하며 눈을 흘겼고,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류호정, 장혜영 국회의원에 대해서 ‘똥오줌 못 가린다’, ‘예의가 없다’라는 평이 뒤따랐다. 

이들이 전제하는 ‘예의’는 한국어의 높임법에서 드러나는 위계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한국어 맞춤법에도 위계를 전제한 어법이 있다. 특히 이런 위계가 잘 드러나는 어법은 압존법이다. 윗사람에 대해 말할지라도, 청자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 때 청자의 관점에서 대상을 낮춰 부르는 것이다. 압존법은 청자의 입장에서 위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예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동반한다. 청자의 입장을 ‘배려한’ 예절을 지키기 위해 화자의 관점에서는 높임말을 써야 하는 대상을 낮춰 부르는 무례를 저질러야 한다. 지금은 널리 쓰이지 않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어법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두 번째 권력자’라는 서울시장이 4년간 비서를 성추행 했다는 의혹과, 그 권력자의 죽음이 동시에 점화된 시점에 ‘예의’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자와 두 국회의원에게 예의를 묻는 이들의 대상은 故 박원순 서울시장과 그의 유가족이다. 故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는 이들은 피해자에 대한 예의는 논하지 않았다. 이들의 머릿속에 가장 높은 ‘윗사람’은 故 박원순 서울시장이고, 피해자는 그의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인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장례 역시 가치중립적이거나 당파성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은 상주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고인과 함께 공관에서 살아왔던 아내와 딸 대신 고인의 아들이 귀국하여 상주 역할을 했다는 사실, 이 과정에서 해외 입국자에 대한 자가격리 절차가 생략되는 특혜가 일어났다는 점, 가족장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 국민청원이 50만 명이 넘어섰음에도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인해 사실상 폐쇄된 광장을 일시적으로 개방하고 서울시장장을 강행했다는 점 등은 이 의례 속에 가부장적인 위계와 불평등,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드러낸다. 의례를 주관하는 곳의 크기, 오랜 의례의 기간, 조문을 하는 사람들의 규모는 고인과 주관하는 조직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으로 인한 죄의 혐의가 제기되었을 때 진상 규명 없이 의례의 과정이 진행된 것은 피해자에게 숨 막히는 위력의 크기를 다시금 느끼게 했다.  

피해자가 요구한 법의 심판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고, 가해자는 ‘모두에게 죄송하다’는 애매한 사과를 남기고 생을 마쳤다. 우리는 위력에 의한 사건 앞에서 그 위력을 가능하게 한 위계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예의’라고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피해자를 후 순위에 두고 진상 규명보다 조직의 권력을 증명하는 것을 우선한 ‘예의 없는’ 서울시를 비롯한 정부부처와 정치권에 유감을 표한다. 서울시와 이해찬 대표는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통렬한 사과’, ‘진상 규명’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가 성추행 사건을 ‘인권침해’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에서 여전히 이들의 가장 높은 예의의 대상은 故 박원순 서울시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뒤늦은 사과와 진상 규명, 피해자에 대한 지원 조치 등이 여전히 그들의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겉핥기 식 봉합이 되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 

압존법은 위계에서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정렬된 세계를 구현한다. 피해자에게 연대를 표하고, 규명을 요구하는 것이 ‘예의 없음’으로 치부되는 것은 이러한 세계관의 연장이다. 폭력을 작동하게 하는 위계를 거부하는 세계에서는, 용기 있는 고발을 감행한 피해자에 대한 연대가 곧 예의이다. 우리는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와 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