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여성의 부모돌봄기

🌒김보영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돌봄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여러 돌봄 관련 제도들이 등장했고 그와 함께 사회적 논의의 장이 확장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낮은 출생률과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라는 국가적 위기의식과 함께 돌봄의 중요성은 전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하지 않다. 돌봄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독박’ 돌봄, 돌봄 관계에서의 폭력 등―은 여전히 한 가족 내의 사적인 문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돌봄이 가족·정부·사회의 공동책임이라는 대중적 인식은 커지고 있는 반면[1], 대부분의 돌봄은 여전히 가족의 몫으로 남겨져있다. 이로 인해 ‘돌봄을 제공하는 일이 가족 중 누구의 일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가족 구성원 간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 가족의 오래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특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혼 자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부모와의 관계에 종속되고 그로 인해 부모 돌봄을 책임지게 되는 비혼 여성의 가족 내 위치성, 그리고 온전히 가족들의 책임이 된 돌봄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통계청 2017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노인 부양이 가족 책임이라는 의견은 크게 감소하고 가족·정부·사회의 공동책임이라는 응답은 크게 증가했는데, 이를 보아 돌봄의 탈가족화, 돌봄의 사회화 요구가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허라금, 2018: 69).

1. “이래서 딸이 있어야 된다”

“집에서 개호(돌봄)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맨 먼저 가족 중에서 ‘누가 보살필 것인가’를 정한다. 이때 개호자로 가장 먼저 꼽힐 사람은 돌봐야 하는 다른 가족이 없는 독신이다. ‘개호 독신’이란 초고령사회라는 흐름과 만혼화, 비혼화라는 흐름이 만난 지점에서 생긴 멈출 수 없는 소용돌이다. 그렇기에 독신자가 부모를 돌보는 것, 개호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시점이 왔다” (山村基毅 , 2015: 30).

나는 아픈 가족을 돌보았던 적이 있다. 내가 주로 돌봄을 담당했는데, 딸린 식구가 없으니 내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가족들에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여성이니 기본적으로 남을 돌보는 일을 잘 할 거라고 다들 믿었다. 정작 나는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를 돌본 경험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부당한 기대라고 생각했지만 아픈 가족을 앞에 두고 이것이 부당한 기대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그날로 짐을 싸서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자녀가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결혼 여부나 성별, 경제 상황, 나이 등에 따라 누가 가장 적합한 돌봄 제공자인지 정해지는데 주로 아들보다는 딸이, 결혼한 자녀보다는 결혼하지 않은 자녀가 주 돌봄 제공자로 선호된다. 이는 딸-역할에 대한 기대, 즉 여성이 돌봄에 보다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과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는 따로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으니 비교적 홀가분하게 간병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합쳐진 결과이다. 지은숙은 다음 기사에서 본인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부모님에게 비혼을 선언하자 부모님은 “너는 영원히 우리 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기사보기). 이 시기를 지나며 나는 비혼과 홀가분함이 서로의 대체어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시에 나는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원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으며 친구들과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 살고 있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했으며 이 새로운 ‘가족’들과 큰 문제 없이 살아나갈 줄 알았다. 그러다 아빠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지자 다시 원가족의 일원으로서 내 역할을 다 해야만 했다. 가족은 당연히 가족이 돌보아야 한다고 모두가 믿었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허구한 날 말하던 나는 늘 부모님의 ‘못다 푼 숙제’ 같은 자식이었지만,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자 가장 유용한 돌봄 자원이 되었다. 오로지 우리 가족만 충실히 챙길 수 있는 딸로서 말이다. 

가족을 돌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자주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결혼이나 출산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경력은 단절될 수 있었고, 통장 잔고는 매일 놀랍도록 빠르게 줄어들었으며 아빠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에도 이 마음을 설명하거나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된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 돌봄은 가족의 몫이어야 하는가?

아픈 이를 돌보는 일이 거의 전적으로 가족에게 맡겨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내 가족을 내가 돌보는 일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오히려 그를 외면했다면 여기저기서 비난을 받았을테다. 간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병원을 선택하는 것부터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 또 어느 정도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따라 눈앞에 펼쳐진 선택지만 수십 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목숨이 달린 일을 이렇게 알아서 선택해야 한다니 엄청난 중압감이 몰려왔다. 가장 의지했던 것은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모여드는 인터넷 카페와 구글이었다. 의사의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디가 유명한 병원인지, 유명한 의사가 누구인지 궁금할 때, 어떤 치료가 효과가 좋은지 그리고 최신 치료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나는 왜 모든 걸 혼자서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지, 왜 무엇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지, 돌봄의 질이 왜 전적으로 개별 가족들의 ‘능력’에 달려있는지 이 모든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예전보다 많은 제도들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체감할 수 있는 도움은 의료보험을 통한 의료비 혜택뿐이었다(물론 의료비 혜택은 큰 도움이 되었다). 돌봄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돌보는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런 지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가족의 몫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서는 마치 폭탄을 돌리듯 서로에게 돌봄의 책임을 떠넘기는 일도 생긴다. 게다가 저마다 이런저런 사정을 꺼내놓기 시작하면 가장 ‘덜’ 중요한 일을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돌봄의 책임을 떠맡게 되기도 한다. 돈 버는 일과 관계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 ‘가장’이 아닌 사람. 아마 높은 확률로 비혼 여성이라는 조건은 이 폭탄 돌리기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이런 식으로 개인의 ‘희생’에 기대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돌봄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한가’에서부터 돌봄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3. 가족 중심의 돌봄을 넘어

점차 돌보아야 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다른 사람을 돌볼 여력은 줄어드는 사회에서 돌봄 문제는 대체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 것일까? 돌봄이 단순히 제도적으로 자리 잡는다고 하여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현재 제도로 자리 잡은 돌봄의 영역들이 돌봄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강한 노동강도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돌봄의 제도화가 반드시 좋은 돌봄을 가져오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돌봄은 돌봄을 받는 자와 제공하는 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돌봄을 받는 자의 구체적인 필요와 그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제도는 개인마다 상이한 돌봄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기 어렵다[2].

[2] 아서 프랭크는『아픈 몸을 살다』에서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은 지구 상의 인간들이 모두 다른 만큼이나 각기 다르다”고 말하며 “돌봄제공자가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고 주장한다(프랭크, 2017: 78-81). 조안 트론토 또한 그의 책 『돌봄 민주주의』를 통해  “돌봄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보편적이고 똑같은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트론토, 2014: 53).

이미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바 있듯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돌봄의 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며, 보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 없이는 이 위기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백영경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결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 돌봄에 함께 힘을 보태고 필요한 지원을 해주기보다는 대체로는 여성인 일부 사람에게 ‘독박’을 씌우고, 심지어는 그들을 깔보고 비난하는 사회, 생계를 위해 필요한 일과 돌보는 일을 함께하다 보면 절대 일상이 유지될 수 없는 팍팍한 사회가 한국 사회”라고 말한다(백영경, 2017: 20).

서로가 서로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에 기반한 주장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돌봄은 이미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앞서 살펴봤듯, 돌봄 제공의 역할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그것이 가족 안에서의 돌봄이든 시장 영역에서의 돌봄이든 말이다. 조안 트론토는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돌봄 노동을 전가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데, 즉 “남성은 여성에게, 상위계층은 하위계층에게, 자유인은 노예에게,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는 집단에게 전가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한다(트론토, 2014: 209).

집에서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이 회사에서 돈을 버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면 돌봄 제공의 시간이 경력의 단절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돌보는 일이 한 사람의 삶과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이 지금처럼 무시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돌봄이 전적으로 가족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와 그를 뒷받침할 돌봄 제도가 자리 잡는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은 접어두고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돌봄이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도전해야 한다. 또한 돌봄에 대한 공적 지원을 늘리자는 주장을 넘어 돌봄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돌봄의 구조를 평등하게 재구성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돌봄이 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참고 문헌

  • 백영경(2017). “복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제45권 3호, 19-38쪽.
  • 지은숙(2017). “비혼여성의 딸노릇과 비혼됨(singlehood)의 변화: 일본의 부모를 돌보는 딸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제50권 2호, 189-235쪽.
  • 허라금(2018). “관계적 돌봄의 철학”, 『사회와 철학』, 제35권, 67-90쪽.
  • Arthur W. Frank(1991). At the Will of the Body: Reflections on Illness, Boston: Houghton Mifflin, 메이 옮김(2017). 『아픈 몸을 살다』, 서울: 봄날의책.
  • Joan C.Tronto(2013). Caring Democracy: Markets, Equality, and Justice, N.Y. : NYU Press, 김희강·나상원 옮김(2014). 『돌봄 민주주의: 시장, 평등, 정의』, 서울: 아포리아.
  • Nancy Fraser(2016). “Contradictions of Capital and Care”, 『New Left Review』, 2016년 7-8월호, 문현아 옮김(2017). “자본과 돌봄의 모순”. 『창작과비평』, 제45권 1호, 329-353쪽.
  • 山村基毅(2014), ルポ介護独身,  新潮社, 이소담 옮김(2015). 『나홀로 부모를 떠안다』, 서울: 코난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