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을 퀴어링?

소연

1. 다시, 퀸덤을 이야기하기

작년 8월 29일 첫 방영되어 10월 31일 파이널 경연을 마지막으로 인기리에 종영한 Mnet 예능 ‘퀸덤’은 “K-POP 대세 걸그룹 6팀의 컴백 대전”을 내세우며 기존 서바이벌 경연 예능 포맷을 답습하는 양상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초반 기대와 달리 프로그램에 참가한 여섯 팀과 시청자들 모두 프로그램의 ‘경연’ 포맷에 집중하기보다 전자는 기존에 ‘걸그룹’으로서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고, 후자는 그간 주류 미디어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들 걸그룹의 ‘아티스트’적인 면모와 그들이 수행하는 빼어난 무대에 열광하였다. 말하자면 퀸덤이 방영된 두 달의 시간동안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인기와 파급력을 증명해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생산자와 수용자 어느 한 쪽의 덕택이라기보다 생산과 수용의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 간의 상호작용 덕택이었다.

부연하자면, 퀸덤이 ‘기존’ 걸그룹들을 “재발견”할 수 있는 장field이 되었던 것은 경쟁의 장을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전유했던 걸그룹들의 몫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들의 퍼포먼스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읽고 이야기 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빠뜨린다면 퀸덤이 그와 같은 대중적 열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경위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기존’에 대한 고민 없이 ‘새로움’에 대한 공허한 이야기만을 쏟아내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가령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같은 가사와 수트 착장, 보깅댄서들과의 콜라보가 돋보였던 AOA의 ‘너나 해’ 무대가 ‘페미니즘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AOA가 페미니스트여서도(그걸 누가 알 수 있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나? 그 무대를 본 사람들? AOA를 ‘오래’ 지켜봐온 ‘팬’들? 아니면 AOA ‘당사자’?), 수트를 입어서도, 꽃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싶어서도, 보깅댄스를 전면에 내세워서도 아닐 것이다. 걸그룹들의 수트 착장 퍼포먼스는 이전에도 많았고, “나 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그룹도 없지 않았으며 보깅댄스가 주류 미디어에, 그것도 아이돌 퍼포먼스를 통해 등장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항변은 쉽게 가능하다.

요는 이들의 무대를 ‘페미니즘’으로 인식하는 대중에 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동시에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적인 것을 원하고 적극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는 특히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탈코르셋운동이나 여성서사운동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는 동시대 페미니즘의 특징이다. 즉 AOA의 ‘너나 해’ 무대는 실제로 AOA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페미니즘’을 의도했는지 하는 진위여부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착장, 가사, 안무 등의 기호를 ‘페미니즘’으로 통합하는 대중의 해석을 통해 비로소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때문에 이러한 걸그룹의 퍼포먼스나 걸그룹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여성 집단의 출현을 ‘새로움’ 또는 ‘변화’, ‘진화’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척 곤란하다. 오히려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전에 걸그룹의 퍼포먼스와 이들의 여성 팬덤은 발견되지 못하고 인식되지 못하거나 대중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특히 정소연이 “팬덤의 구성원이자 소비주체로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와 달리 ‘여덕’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여성 아이돌 팬덤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지적하듯 걸그룹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여성들의 집단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그들이 눈에 띌 수 없었던 이유도 단지 이 집단이 그만큼 작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정소연, 2018: 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여전히 걸그룹의 퍼포먼스와 걸그룹의 여성 팬이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해명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대신 그것이 왜 새로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2. 걸그룹과 팬덤, 그리고 페미니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가진 국내 문화연구들은 아이돌의 젠더화된 기획 및 제작, 노동, 재현 등에 주목해왔다. 이들은 아이돌을 문화산업이 생산해내는 하나의 상품이자 텍스트,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장치 등으로 개념화한 기존 연구들과 페미니즘 이론들을 토대로 남성의 욕망에 맞춰 걸그룹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산업의 관행, 리얼리티 쇼에서 늘 ‘웃는 모습’을 스스로 연출해내야 하는 걸그룹의 강도 높은 감정노동 등을 문제 삼았다. 특히 걸그룹이 재현하는 여성 이미지와 관련하여, 여성 이미지의 소비 방식에 대한 멀비의 논의를 비롯한 기호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페미니즘 비평이 시도된 바 있다(김수아, 2010; 2011; 이수안, 2011; 이종임, 2016; 홍지아·정윤정, 2018).

한편 아이돌이 여타의 대중문화와 달리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아이돌 연구와 팬덤 연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아이돌의 재현과 소비 방식은 물론이고 기획 및 제작, 노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산업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소비자 집단일 뿐만 아니라 산업으로부터 파생된 하위문화의 행위자인 팬덤의 문화정치에 대한 분석이 수반되어야 했다. 김수정(2018)에 의하면 팬덤의 문화정치를 연구한다는 것은 팬덤의 문화가 함의하는 사회적 맥락, 특히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연령 등의 권력관계에 대해 밝히는 것을 포함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팬덤 연구에 페미니즘의 관점이 개입하는 것은 상당히 개연적인데, 페미니즘 연구가 ‘여성’이 중심인 팬덤을 연구한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팬덤의 행위자들이 (재)구성하고 또 재현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밀도 있는 분석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팬덤의 문화정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젠더 권력관계가 어떻게 팬덤 실천에서 발현되며 팬덤 문화를 구성하고, 역으로 팬덤 문화는 어떻게 권력 관계에 작용하는지를 학술적으로 밝히라는 요청이다.”(김수정, 2018: 52)

걸그룹이 생산하는 소녀 이미지와 ‘삼촌팬’ 팬덤의 소비 방식을 분석한 김수아(2010)의 연구는 이 점에서 주목해볼만 하다. 김수아는 이 연구에서 ‘삼촌팬’이 저널리즘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호명됨에 따라 소녀 이미지의 소비 방식이 탈성애화되는 것으로 포장되어 페미니즘 비평이 개입하기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삼촌팬’들이 구성하는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삼촌’이라는 가족주의적 명명이 ‘미성년’의 여성을 좋아하는 성인 남성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탈피하고 안전하게 ‘소녀’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함을 밝힌다. 특히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아이돌 산업의 문제와 이미지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는 물론, 남성적 시각의 재생산과 그 안에서 몸의 스펙터클화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추후의 연구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텍스트로서의 아이돌과 팬덤의 문화적 실천이 권력관계에서 결합되는 방식에 대해 페미니즘 연구가 개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김수아, 2010: 116).

이때 그간 국내 아이돌/팬덤 연구가 걸그룹의 여성 팬덤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난감하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정소연(2018)의 ‘3세대 여덕’에 대한 연구를 제외한다면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 팬덤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전무한 수준이다. 김수정(2018) 역시 그동안의 한국 팬덤 연구가 여성 아이돌에 대한 여성 팬덤들의 실천에 대해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소홀히해왔다는 점을 논문 말미에 지적하며 이들(여성 팬덤)의 실천이 페미니즘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는다. 그러나 ‘여덕’의 실천 또한 페미니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다소 당위적인 문제 설정 이전에 먼저 설명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국내 아이돌/팬덤 연구의 경향이 가지는 함의가 아닐까? 페미니즘 차원의 국내 아이돌/팬덤 연구가 많은 편은 아니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 연구가 걸그룹의 여성 팬덤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서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3. 해명되지 못했던 것

정소연(2018)은 ‘여덕’이 그동안 가시화될 수 없었던 이유를 여성혐오와 퀴어혐오가 중첩된 맥락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여덕’은 성별의 측면에서 항상 보이그룹의 여성 팬과 함께 묶이거나 걸그룹의 남성 팬들에 비해 ‘목소리가 작’기 때문에 이중적인 비가시화를 겪는다(정소연, 2018: 128).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비가시화 하기위해 ‘일코’(자신의 팬 됨을 감추는 것,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정소연은 “‘일코’의 일반적인 목적이 팬 개인의 사회적 위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여덕의 ‘일코’는 우리나라의 호모포빅한 지형 탓에 사뭇 그 맥락이 다르다”고 지적한다(정소연, 2018:137). 이처럼 이성애중심적인 담론 지형에서 존재감을 획득하지 못한 ‘여덕’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받게 될 공격(“너 레즈야?”)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하게 된다(보이그룹을 좋아하는 척 하기).

한편 2008-2009년 경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브라운아이드걸스, 포미닛 등의 소위 ‘2세대 걸그룹’이 활약하기 시작하며 이전에 비해 큰 규모의 팬덤을 형성하자 저널리즘은 일제히 “걸그룹 전성시대”라는 담론을 생성해냈다. 이 시기 걸그룹은 그 전에 비해 음악과 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예능과 드라마, 라디오 등에서도 활약하며 10대 여성 청소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훨씬 더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때 걸그룹들이 ‘활약’하기 시작하며 저널리즘이 주목한 것이 ‘삼촌팬’이었고 이를 통해 삼촌팬은 주류담론을 구성하는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김수아(2010)가 비판하는 ‘삼촌팬’이 여성 이미지를 소비하는 담론 구성 방식의 맥락이 여기 있다. 이미 언급했듯 페미니즘 비평은 걸그룹이 재현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들이 구성하는 주류 담론에 대항하기 위한 지식을 계속해서 생산해냈다. 예컨대 팬픽 문화에서 여성들의 욕망을 저항적이라고 읽어내고, 여성혐오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항하고자 하는 팬덤의 움직임을 학술적 언어로 포착해내고자 하기도 했다. 이때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들의 문화와 실천, 욕망이 지식을 통해 학술의 장에 기입될 수 없었던 것은 연구자 개인들의 무관심이나 게으름이기보다 이들이 주류담론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누락되는 일련의 과정 중 일부였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여성들은 대중문화에서 페미니즘적인 여성 재현을, 그게 서사든 이미지든 적극적으로 원하게 되었으며 이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응원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대중이 주류 미디어를 통해 걸그룹을 만나고 어떠한 풍경이 펼쳐졌을까. 퀸덤의 수용자들은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걸그룹이 출연해서 보기 시작한 ‘여덕’들이기도, 걸그룹이 우르르 나온다기에 찾아보기 시작한 왕년의 ‘여덕’이기도, ‘여자’들이 한데 모여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는 것에 주목한 동시대 페미니스트 대중이기도 했다. 이토록 불균질한 사람들은 AOA의 ‘너나 해’, (여자)아이들의 ‘LION’ 무대에 주목하며 이들은 기존 걸그룹과 달리 “전복적”이고 “주체적”이며 곧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마무의 ‘굿럭’ 무대를 보고 ‘선정적’인 안무와 ‘노출’이 많은 의상 등이 그동안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어온 방식을 답습하여 성적으로 어필 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주체적 섹시”로 부르거나 마마무 자체를 “백래셔(백래쉬와 -er가 합해진 말, 주로 여성인권을 후퇴시키는 주범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됨)”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직전의 무대에서 마마무가 수트와 워커를 착용하고 파워풀한 무대를 선보였을 때는 전복적이고 멋진 무대였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는 점에서 대비되는 반응이었다. 요컨대 대중에게 걸그룹의 무대가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수트 착장이나 성애적이지 않은 가사, 또는 파워풀한 안무가 필수적이게 되었다. 즉 특정한 착장, 가사, 안무는 페미니즘을 하나의 코드로 만드는 핵심적인 기호로 자리 잡았다. 이때 코드화된 페미니즘의 범주 밖에 놓인, 예컨대 노출이 많은 착장을 하고 적극적으로 섹스어필 하거나 ‘소녀’적이고 귀여움을 어필하는 걸그룹의 퍼포먼스,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고 좋아하는 것은 반-페미니즘적이고 여성의 인권을 후퇴시키는 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는 곧 사람들이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에 열렬히 걸그룹과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도 누군가로 하여금 “나는 원래부터 있었어요!!”라고 힘겹게, 그렇지만 공허하게 외치도록 만들기도 했다.

4. 걸그룹을 퀴어링?

걸그룹의 퍼포먼스를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겪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면서도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걸그룹은 여성혐오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피해자인가 또는 여성혐오적인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가해자인가? 이러한 걸그룹을 좋아하고 응원하고 소비하는 것은 동료 여성에게 연대하는 것인가 혹은 여성혐오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인가? 모두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분법적이고 본질주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걸그룹과 페미니즘을 두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양분된 답 사이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새로운 것’으로써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수트 착장 퍼포먼스는 근래 컴백하는 걸그룹들의 통과의례적인 컨텐츠가 되어 금세 진부한 것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여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애화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관계들을 생성한다는 점은 다시금 주변화 된 채 페미니즘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말하면서도 걸그룹과 팬덤 모두의 정체성은 이성애규범성에 고정된다.

그러나 남성시선male-gaze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의 재/생산은 그 자체로 매우 문제적이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수용되는 것이 아무런 저항 없이 가능하지는 않다. 주지하다시피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열렬히 좋아하고 응원하면서 그들의 스타일이나 말투, 몸짓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방하거나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곤 한다. 이러한 모방과 동일시의 과정에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개입하면서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여성도, 걸그룹을 좋아하는 남성도,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남성과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도, 그 누구의 젠더도 고정적이지 않게 되며 대상을 향한 섹슈얼리티가 이성애적인 것인지 동성애적인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퀴어queer한 순간들이 발생한다. 요컨대 걸그룹은 성적으로 객체화된 여성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문화적 기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비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구성되고 재현되고 수행되는 장소였고 또 그러한 가능성을 지닌 장field인 것이다. 페미니즘 차원의 아이돌/팬덤 연구가 보이그룹-여성팬덤과 걸그룹-남성팬덤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붙잡지 못했던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요는 걸그룹과 팬덤이 맺어온 관계가 그동안 어떻게 해석되고 쓰여 왔는지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섹슈얼리티와 실천을 역사화하는, 즉 걸그룹을 퀴어링(queering)하는 것에 있다. 이는 ‘페미니스트’나 ‘여덕’을 고정된 정체성처럼 호명하며 공허하게 ‘새로움’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걸그룹과 팬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규범적인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포착하는 한편, 물음표(퀴어링?)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착취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비판의 가능성 역시 놓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분명 계속해서 걸그룹과 페미니즘은 만나게 될 것이다. 이는 걸그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페미니즘과 만나 페미니즘의 언어로 걸그룹을 읽어내고자 하는 이유에서도 있지만 걸그룹을 구성하고 있는 행위자들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며 페미니즘을 만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말하는 우리가 새롭다고 여겼던 것이 금세 진부해지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스스로 규범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걸그룹과 팬덤의 정체성을 퀴어하게 읽어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지식 생산이 절실하게 요청되는바이다.


참고문헌

  • 김수아 (2010). 소녀 이미지의 볼거리화와 소비 방식의 구성. 미디어, 젠더 & 문화(15), 79-1
  • 김수정 (2018). 팬덤과 페미니즘의 조우. 언론정보연구, 55(3), 47-86
  • 정소연 (2018). 3세대 여덕의 탄생. 여/성이론(39), 125-143
  • 홍지아·정윤정 (2018). 리얼리티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이 재현하는 아이돌 되기의 자격. 현상과 인식, 42(2), 12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