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 화장을 해라!”: 연극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 송유진

이 글은 지난 2019년 7월 대학로에서 막을 올린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라는 연극에 대한 비평이자, 올해 2회차를 무사히 마친 ‘페미니즘 연극제’와 ‘페미 씨어터’를 강력하게 애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지금까지 임신과 출산, 관계, 윤리, 해방, 비규범적 사랑 등에 대한 다양하고도 알찬 극을 꾸려 온 페미니즘 연극제는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의 외모 검열과 대상화, 섹슈얼리티 해방, 소비주의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여성의 ‘안전’과 ‘해방’이라는 위선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연극은 ‘하이드 비하인드’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에 대한 미스터리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대한민국의 서울,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연달아 실종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유튜브 등에는 이들이 ‘하이드 비하인드’라는 괴물에게 납치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괴물에게 납치된 여성들은 모두 유행 지난 일자 눈썹, 촌스러운 옷차림, 노메이크업 등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여성들이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이는 곧 여성의 ‘뷰티’가 여성의 안전, 즉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으로 모두를 몰고 간다.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목숨이 붙은 채로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화장을 해야 한다.

괴물이 ‘촌스러운’ 여성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성들은 재빠르게 스스로의 얼굴과 차림새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다른 여성들도 검열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며, 서로에게 연신 ‘조심하세요’라고 외치며 상대방의 옷차림과 손톱 색깔, 눈썹의 모양, 머릿결 상태 등을 꼼꼼히 점검하기도 한다. (“그쪽 눈썹 약간 일자눈썹이에요. 조심하세요!”, “그 립스틱 색깔 유행 지났어요. 조심하세요!”, “그쪽 엉덩이 너무 납작해요. 조심하세요!”) 거창하게 푸코의 미시권력 개념을 끌어올 필요도 없이, 생존이라는 목적 하에 여성들은 합법적으로 서로의 신체를 감시하고, 평가하고, 관리한다. 여성의 ‘촌스러움’을 판가름하는 괴물의 시선은 어느새 이미 여성들 그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생존에 대한 여성들의 절실함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성의 꾸밈을 통한 ‘자유’와 ‘해방’의 담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 ‘새뷰티운동’으로 등장하는 꾸밈 운동은 ‘뉴 뷰티, 뉴 밸런스, 뉴 본(new beauty, new balance, new born)’이라는 슬로건 하에 꾸밈 실천(메이크업 강좌 듣기, 다이어트하기 등)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해졌는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행복해졌는지를 적극적으로 전파한다. 문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화장을 해야 했던 여성들은 어느새 더 행복해지기 위해, 과거의 소극적이고 불행했던 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화장을 한다. 핑크색 정장을 맞춰 입은 두 배우는 세상 화사한 표정으로 과거 새마을운동의 단순 과격한 슬로건을 연상케 하는 구호들을 외친다. “정상 체중에 속지 말고 10키로 더 빼서 미용체중 유지하자”, “나의 얼굴은 나의 책임”과 같은 구호들은, 말도 안 되는 괴물에 대한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자기관리 담론으로 귀결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페미니즘을 팝니다”-해방과 거울 앞의 시간들

여성해방과 대상화, 꾸밈 노동,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다양한 쟁점들을 거치며 두텁게 형성되어 왔다. 1970-80년대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서린 맥키넌을 필두로 한 미국의 몇몇 이론가들에 의해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고발이 본격화되었고, 이후 포르노그래피가 재생산하는 폭력적인 이미지들로부터 여성을 떼어내는 것의 중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파파다키, 2016). 이러한 흐름들 중 일부는 여성과 섹스를 연결 짓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또 다른 일부는 전자가 지닌 규범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성격을 염려하며 여성의 주체적 섹슈얼리티와 이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을 점지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여성을 성적 엄숙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섹스와 욕망에 대해 발화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었다는 점, 또 사회가 전제하는 정상 성애의 위계로부터 페미니즘의 논의를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위의 흐름이 갖는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 페미니즘 혹은 마켓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들이 이야기하듯이, 여성의 성적 자유에 대한 담론들 중의 일부는 여성 ‘개인’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모든 개인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오로지 더 나은 소비를 할 권리로 환원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현 사회에서, 여성 개인의 자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비자로서의 ‘선택(choice)’의 자유로 환원된다(김현미 외, 2010; 자이슬러, 2018). 섹슈얼리티 해방을 위해 부르짖던 목소리들 중 일부가 결국 더 많은 화장품을 구매할 자유,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할 자유의 흐름 속으로 흡수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섹슈얼리티 해방에 대한 일부 흐름과 소비주의 간의 결합은 대단히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를 일상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여성들의 삶 역시 매끄럽고 빠르게 통합되었을까? 이 연극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즉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끊임없는 분열과 간극 위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소 과장되고 극적인 ‘새뷰티운동’의 장면 연출과 달리, 극은 두 여성이 거울 앞에 서서 보내는 길고도 지루한 시간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못 박힌 듯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살을 꼬집어보고 다리가 너무 두꺼워 보이는건 아닌지, 겨드랑이가 깨끗한지, 뚱뚱해 보이지 않는지, 뱃살이 너무 부각되어 보이지는 않는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 두 여성의 모습은 소름끼칠 만큼 현실적이다. 카메라 앞에 서서 부담스럽도록 활짝 웃던 여성들, 딱딱 맞는 구호에 맞춰 율동을 하던 여성들은 거울 앞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선택과 나의 해방”을 외치던 환호성들은 어둑어둑한 거울 앞에 서서 꺾어지고 길을 잃는다.

‘하이드 비하인드’, 과연 그 괴물은 진짜였을까?

극의 맨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새뷰티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개최된 뷰티 콘테스트가 끝난 뒤, 쉴 틈 없이 아름다워지겠다고 외치던 주인공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다시 어두운 무대 위에 선다. 저마다 자신이 예뻐지기 위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방법들을 동원하는지 자랑하기 바빴던 그 대회가, 실은 화장품 회사와 패션 회사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조작된 무대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하이드 비하인드’ 역시 여성들이 더 많은 화장품과 패션 소품들을 구매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가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핑크색 정장을 두른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던 주인공들의 표정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귀 따갑도록 화려하던 팡파레 소리는 더 이상 없고, 남겨진 것은 버거운 적막과 허망한 표정들뿐이다. 그 와중에도 여성들의 실종은 멈추지 않는다. 뷰티 대회의 우승자가 하인드 비하인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두 여성의 얼굴에는 다시 긴장감이 서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무대 한가운데 동그랗게 깎은 조명 두 개가 떨어진다. 각각의 조명 안에는 굳은 표정의 두 여성이 서 있다. 그중 한 여성은 공포에 질린 듯 조명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다,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그림자 속으로 손을 넣어 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손발을 그림자 속으로 넣었다 뺐다 해 보고, 그 사이를 뛰어다녀도 보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신이 나기 시작한 여성은 옆의 다른 여성 역시 조명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겁에 질린 다른 여성은 처음에는 이에 응하지 않다가 곧 놀이에 참여한다. 끝없이 서로에게 ‘조심하세요’를 외치며 자기검열 리스트를 불러주던 두 여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공포감과 긴장감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춤추듯 뛰어다니는 여성들 사이를 메우는 것은 경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음악이다.

‘하이드 비하인드’란 ‘뒤로 숨는다’라는 뜻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신나게 뛰어다니며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이들, 빛과 어둠 사이를 별거 아니라며 하찮게 웃어넘기는 이들이 바로 그 실종자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어쩌면 여성의 외모 검열을 다방면으로 강요하는 사회의 눈으로부터 숨어버린 이들이자, 사회의 시선 밖으로 ‘사라져버린’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마땅히 통제되어야만 하는 젊은 여성의 신체가 시선 밖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어떤 이들에겐 공포와 미지로 여겨졌을 것이고, 괴물에 납치된 게 아니고서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긴 머리와 메이크업, 타이트한 옷을 벗어던지고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 여성들은 현실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괴짜로 여겨진다. 이들은 임신이 가능한 자궁과 언제든지 대상화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필요에 따라 ‘여성’으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 잠재력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자도 아닌’ 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혀 촌스럽지 않은 여성,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뷰티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여성마저 괴물에게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사회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 여성들, ‘여성도 아닌’ 괴짜 여성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여태껏 점쳐보지 못한,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리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여성, 다른 여성들의 눈에조차 포착되지 않는 괴이한 존재들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섣불리 해방과 혁명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방은 가장 달콤한 당위임과 동시에 가장 위험한 함정이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논의가 어떤 방향을 향해 이어지고 있는지, 그 길 위에 있는 다른 흐름들-소비주의, 신자유주의 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충분히 공유하고 고민하는 것은 더 나은 논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억압이 인위적인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 온몸을 빈틈 없이 옥죄어 오는 듯한 이 시선이 실은 동그랗게 깎은 한 떨기 조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참고문헌

  • 김현미 외(2010). 『친밀한 적: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서울: 이후.
  • Papadaki, Evangelia(2015). “Feminist Perspectives on Objectification”, The Stand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강은교·김혜연 외 3인 옮김(2016),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서울: 전기가오리.
  • Zeisler, Andi(2017). We Were Feminist Once, New York: Public Affairs, 안진이 옮김(2018), 『페미니즘을 팝니다: 우리가 페미니즘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배신』, 서울: 세종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