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피

“페미니즘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며, 심지어 관점도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몰라보게 바꿔놓는 정치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치적·사회적·성적·경제적·심리적·신체적 종속을 끝내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 그러곤 답한다. 우리도 모른다고, 한번 해본 다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고.”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 8쪽
1. 욕망의 정치 비평, 문제의 지형도 그리기
2021년 출간되어 2022년 번역된 『섹스할 권리』(원제: The Right to Sex)는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첫 단독 저서로, 2018년 3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실린 에세이 「누구에게나 섹스할 권리가 있는가?」(기사 보기)를 개정한 「섹스할 권리」를 표제작으로 하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에세이는 1970년대 서구 페미니즘의 성 전쟁(Sex war)을 비롯한 여러 논쟁들의 맥락을 검토하는 한편,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방안들이 섹스의 정치와 윤리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추적하면서 그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서문에서 “이들 에세이를 통해 나는 많은 여성과 일부 남성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글로 옮기려 했다”(15)고 밝히듯, 스리니바산은 하나의 개념에 천착하여 참신한 이론적 분석을 심도 있게 전개하기보다는, 널리 제기된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을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문제적인 지형도’를 구성하고 그 복잡한 지형의 서로 다른 위치에 자리한 여러 입장들을 신중하게 맞세운다. 그러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그 결과, 각 에세이는 (페미니즘 논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어떤 이론서 못지않게 ‘어려운’ 글이 된다. 해제에서 리타(이연숙)가 올바르게 평한 바와 같이, 이 책에서 “다급히 결론을 찾고자 하거나, 곧바로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전술’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곧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303)
2. 질문하기: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두 번째 에세이 「포르노를 말한다」를 예로 들어 보자. 이 글의 도입부에서 스리니바산은 왜 포르노그래피가 1980년대 페미니즘 운동에서 격렬한 입장차를 불러온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는지,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지금 시대에 포르노그래피가 갖는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힌다. 스리니바산은 이렇게 묻는다. 1970-80년대에 포르노의 해악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이 “과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라면?”(81) 아동조차 인터넷에 쉽게 접속할 수 있고 간단한 트릭으로 특정 컨텐츠에 대한 접근 통제책을 우습게 우회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젊은 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포르노가 말해주는 대로 섹스를 배운다.”(8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적 쾌락을 누릴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던 섹스-긍정적(pro-sex)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힘을 잃는 듯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스리니바산은 포르노그래피가 단순히 포르노 제작자들의 ‘표현의 자유’에 따른 창작물이라는 논리에 맞서 포르노를 범죄화하고자 했던 앤드리아 드워킨과 캐서린 매키넌을 비롯한 반포르노 진영 페미니스트들의 캠페인을 소개한다(100). 1960년대 포르노 제작자와 판매자를 겨냥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포르노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요구하자, 국가는 페미니즘을 명분으로 삼아 여성, 성소수자, 소수민족의 종속을 심화시켰다. 2014년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포르노는 그대로 두면서) 펨돔, 여성 사정과 같은 주로 여성의 욕망에 소구하는 ‘비주류’ 포르노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108), 2011년 중국에서는 주로 여성 작가가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생산하는 ‘야오이’물의 작가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111).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토착민 사회의 포르노 소지 및 유포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해당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113). 결국 포르노를 불법화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질적으로 포르노 산업을 거의 위축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무료 불법복제 웹사이트로 포르노 산업의 힘이 이동했고, 그 결과 포르노 산업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여성들의 수입이 감소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로 실직한 수많은 빈민 여성들은 중간에서 수익 대부분을 갈취하는 불안정한 포르노 플랫폼으로 유입되었다(114). 어쩌면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 국가의 통치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드리 로드가 말했듯,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로드, 2018: 178).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페미니즘 포르노와 인디 퀴어 포르노를 제작하는 제작자들은 “이성애주의자와 인종주의, 장애인 차별주의자의 성적 기준에 맞지 않는 신체, 행동, 힘의 분배가 지닌 섹시함을 드러내고 즐기는 대안적 형태의 성교육을 제공”(126)하고자 한다. 스리니바산은 이처럼 강간 문화의 관성적 재현에 반대하여 다양한 신체를 재현하고, 평등한 제작 환경 및 제작 방식에 따라 포르노를 제작하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안적 포르노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힌다. 무료인 경우가 드물어 주류 포르노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질 뿐더러, 성교육의 일환으로 교육 현장에서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원론적인 의구심이 남는데, 과연 여성의 신체와 욕망에 대한 ‘더 나은 재현’이 최선인지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대안적 포르노는 여전히 “성행위를 매개해야 하는 화면의 논리”(129)를 그대로 유지할 뿐 아니라, 성적인 관계 맺기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일정한 상품 형식의 구조를 단지 모방케 한다(129). 포르노는 영상에 비치는 행위가 그 행위에 참여한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각자가 무엇을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어느 한 사람의 거부 표현으로 성행위가 중간에 끝나 버리거나 아예 시작되지 않는 포르노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물론이고 말이다.)
정말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스리니바산은 “성교육이 젊은이들에게 더 나은 ‘기계적 반응’만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형식’을 낳는 능력인) 대담한 성적 상상력을 부여하려면, 나는 이 교육이 일종의 소극적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30)는 말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여기에서 소극적 교육이란 “섹스에 대해 진실을 말해준다는 성교육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며, 섹스가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젊은이들 자신에게 있음을 상기”(130)시켜주는 교육이다. 즉, 어떤 고정된 이미지를 구현하려 하기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섹스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그들이 가진 상상력의 힘을 해방하는 교육,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도록 이전 세대가 특히 여성들에게 강요해왔던 고루한 이미지의 ‘맹습’을 제지하는 교육이다. 스리니바산은 “이런 소극적 교육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130)고 말하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이어지는 에세이 「섹스할 권리」와 「욕망의 정치」에서 본격적으로 개인의 성적 취향, 욕망의 사회적·정치적 형성을 따져묻는 치밀한 정치비평을 수행함으로써 (이른바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욕망의 재정치화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로 우리를 데려간다.
3. 질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기
이처럼 스리니바산은 주어진 문제에 대해 확신에 찬 명쾌한 답안을 제출하지는 않는다. 물론 몇몇 문제, 가령 ‘섹스할 권리’—‘어떤 남자가 섹스하기를 원할 때 그에게 지목된 자가 반드시 그에게 섹스를 제공해주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거듭해서 단호하게 ‘없다’—“달리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강간범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167)—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스리니바산의 글이 온통 질문만을 남기고 마무리될 때 생겨나는 것은 답답함, 좌절, 허무감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 툭 건드리면 폭발할 태세의 상상력이다. 여섯 편의 에세이 곳곳에 신중하게 배치된 물음표들과 풍부한 사례들은 현재 페미니스트들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 어떠한 조건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쉽고 단순한 답안으로 내달리지 않도록 막아서는 한편, 페미니즘 운동에 필요한 새로운 실천적 상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북돋는다.
그래서 『섹스할 권리』는 어떤 페미니즘의 한 분파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저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과 ‘교차성 페미니즘’이 우리가 따라 물어야 할 질문들과 분석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망의 한 부분이기라도 한 양 두 입장을 오가며, 두 입장을 맞세우고 서로를 갱신토록 충돌시키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스리니바산은 한편으로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그 현실적 전개 과정에서 영합했던 백인중심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성소수자 혐오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현 경제 체제에 앞서 젠더 관계 문제들이 이미 존재”(290)했다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분석을 놓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억압과 특권의 축을 고려하는 것이라는 식”(46)으로 축소되곤 하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에서 “구성원들의 공통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해방운동은 집단에서 가장 덜 억압받는 자들의 이익에 복무하게 될 뿐”(46)이라는 통찰을 다시 취함으로써,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의 평등과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즘”(271)이 되도록 이끈다. 이렇듯 스리니바산은 섹스를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조건들을 광범위하게 탐사하고, 그렇게 탐사한 현실적 조건들 사이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해온 질문들을 다시 물음으로써 질문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4. 차이가 역량이 되는 물음을 향하여
질 들뢰즈는 물음이란 어떤 경험적 답변으로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도출된 모든 실천적 대답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물음의 역량은 물음의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묻는 자까지 뒤흔들어 위태롭게 하고, 역으로 자기 자신을 물음의 대상에 놓으면서 다른 물음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들뢰즈, 2004: 429). 스리니바산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적 권리의식(‘섹스할 권리’)의 여성혐오적 논리라든지, 해방하지 않고 훈육하는 도덕적 권위주의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섹스에 대한 정치비평에 참여할 수 있을까?”(178)와 같은 물음을 실제로 묻는 것이며, 이 물음의 역량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은 들뢰즈가 말한 ‘물음’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잘 분리되지 않는 두 방향의 아쉬움이 있는데, 하나는 스리니바산이 탐사하고 있는 지도에서 빈 곳을 발견할 때 느끼는 아쉬움이며, 또 하나는 바로 그렇게 빈 곳을 남겨둠으로써 페미니즘의 질문들이 충분히 극한으로 밀어붙여지지 못할 때 느끼는 아쉬움이다. 먼저, 스리니바산이 표제작 「섹스할 권리」에서 섹스-긍정적 페미니즘과 안티-섹스 페미니즘 양자가 성적 취향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고 지적할 때, 바로 그 문제를 파고들었던 퀴어 이론의 계보를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리타의 해제에서 지적된 바 있다. 더하여,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으로 자신의 성폭력을 변호하는 제인 갤럽을 바로 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이용해 비판하는 데에 그칠 뿐 정신분석이론이 여성의 욕망과 욕망 일반을 왜곡해왔다고 비판한 페미니즘 논의의 자리를 공백으로 남겨놓은 점, 지식의 비대칭성을 중심으로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과 같은) 해방적 기획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섹스할 권리』를 비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이는 오히려 스리니바산이 페미니즘이 가져야 할 물음을 잘 실천했기 때문에, 그가 보여준 물음의 역량을 이어가야 할 책무가 독자들의 몫으로 넘어온 것에 가깝다. 스리니바산이 이 책에서 밀어붙인 물음이 책이 끝나면서 함께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물음(“섹스에 대한 정치비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살아 남아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5.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스리니바산은 책의 말미에서 “무력無力에는 역설적인 힘이 있다. 집단화하고 연계하고 대변하면서 무력은 힘을 얻을 수 있다”(292)고 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브라이도티가 『포스트휴먼 지식』에서 소진(burnout)을 “힘들이 변환되는 문턱, 다시 말해서 창조적 생성의 잠재적 상태”라고 표현한 부분을 떠올렸다(브라이도티, 2022: 36).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취약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서적 상태들과 마찬가지로, 소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변용하고 변용되는 우리의 능력을 본질적으로 표현”하기에, 우리는 소진을 “집단적, 사회적 변환 과정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같은 책: 260). 이는 소진의 고통이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소진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할 부정적 상태로 바라보는 대신, 소진된 이를 둘러싼 사회와 환경이 변화해야 한다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스리니바산의 주장이 포스트휴먼 윤리에 대한 브라이도티의 주장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되, 무력의 역설적인 힘을 되찾기 위해 그것의 기원을 사회적인 잠재력의 장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집단적 역량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나’와 분리된 세상이 아니라 ‘나’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를 바꾸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라면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 조건들 아래에서 ‘상황적 지식’들을 생산하고, 물음의 존재론 아래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무력을 집단적인 역량으로 전복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을 공유함으로써 이 세계의 더 멀리까지, 구석까지 탐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참고 문헌
- 로지 브라이도티, 김재희·송은주 역, 『포스트휴먼 지식』, 2022, 서울: 아카넷.
-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2004, 서울: 민음사.
- 오드리 로드, 주해연 역, 『시스터 아웃사이더』, 2018, 서울: 후마니타스.
- 아미아 스리니바산, 김수민 역, 『섹스할 권리』, 2022, 서울: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