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들』

✂️한태경

루시 쿡, 조은영 옮김, 『암컷들』, (웅진지식하우스, 2023) 표지 이미지

고백하건대, 내게 한정된 이야기지만, 나는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을 무슨 페미니즘의 주적(主敵) 정도로 생각했다. 진화에 관련된 책만 꺼내 읽어도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어차피 정복자 수컷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이것을 왜 읽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가끔은 괜히 오기가 생기는 날 뇌과학, 생물학, 동물학, 과학에 대한 이론서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 날은 보통 누군가 내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John Gray, 1992) 같은 소리를 했던 날이었고, 나는 다음에는 반드시 면전에서 그 주장을 찍어 눌러주리라 하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내 전공과 언어는 이쪽 방면으로는 전혀 숙달되어 있지 않았기에 진화 이야기를 읽으면 꾸벅거리며 졸기 일쑤였고, 어떤 문단은 최소한 네다섯 번 읽어야 했다. 이런 책이 다루는 영역에 관심은 두지만서도, 참 손에 안 잡혔다.

이런 탓에 누군가와 진화에 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어쨌든 자연에서는 항상 수컷과 암컷이 있고, 수컷은 암컷을 지배하도록 진화했잖아. 우리 인간도 동물이라면 그런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거 아냐?” 이런 말을 들으면 사실 너의 과학이라는 것도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거고, 네가 말하는 그 잘난 다윈도 남자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콕 쏘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주먹만 꼭 쥔 채 부들거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내가 그 진화라는 것에 대해 거의 무지한 점이고, 둘째로 상대방이 드는 정복자 수컷과 피정복자 암컷의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덮어놓고 다윈을 욕하고 진화의 이야기 앞에서 입을 걸어 잠근 이유는, 내가 비판해 온 성차별적이고 젠더이분법적인 사고가 자연에서는 진리이고 보편일 거라는 사고를 은연중에 한 탓이다. 마치 페미니즘은 인간의 일이고, 가부장제는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내가 쌓아온 사회적 지식은 자연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겠다고 상상하면서. 이런 탓에 결국 ‘자연’과 ‘진화’의 개념을 통해 젠더이분법과 성차별의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과학적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번식과 재생산의 문제를 수컷의 관점에서만 알고 있던 것이다.

변명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30년 가까이 접해온 진화와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정복자 수컷 얘기밖에 없었고 내가 요즘 보는 비인간동물이라곤 유튜브 쇼츠(shorts)에 나오는 레서 판다(lesser panda) 아니면 고양이가 전부였다. 애초에 나는 생물학이나 동물학보다는 사회과학이나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진화와 비인간동물의 이야기를 하면서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가고, 수컷이 암컷을 정복한다는 이미지 외에는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좁은 시야는 사각지대가 너무도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사각지대를 비추고 나서부터 가능했다. 내가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하는 이유다.

책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 루시 쿡(Lucy Cooke)이 『이기적 유전자』(1976)를 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제자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책은 모든 암컷은 수컷에게 지배당한다고 썼던 다윈의 이야기가 과학이라는 후광을 받아 얼마나 보편적으로 여겨져 왔는지를 다룬다. 아니, 정복자 수컷과 피정복자 암컷이라고? “어떻게 한 성은 절대적으로 문란하고 다른 성은 절대적으로 정숙할 수 있을까?” (ibid., 105)

이 책은 진화론의 그칠 줄 모르는 정복자 남성에 대한 이야기에 가려졌던 이야기, 즉 암컷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차별은 자연스러운 것’ 운운하면서 동물로 돌아가는 논의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죄다 부분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대체 이성애 비인간 동물 수컷이 동물 세계에서 최고라고 누가 그러던가? 정작 동물들 세계에선 아니올시다.

범고래 암컷은 완경을 하고서도 40년 넘게 무리를 이끌고 지휘한다(다 큰 범고래 수컷은 몸집 큰 마마보이에 불과하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 2003)로 잘 알려진 물고기 흰동가리(Amphiprioninae)는 수컷으로 태어나 암컷으로 변화하는 리본 장어(Bernis eel)처럼 상황에 따라 수컷에서 암컷으로 변화한다. 익살맞게 생긴 몽구스인 미어캣(Meerkat)은 사실 암컷 독재자 중심으로 무리 지어 생활하며, 여왕은 동족의 모든 새끼 개체를 몰살하고 동족의 암컷이 자기 자식을 돌보게 만든다. 오리(duck) 사이에서는 강제 교미가 많이 발생하는데, 암컷의 질은 수컷의 성적인 폭력으로 인한 수정을 막아내도록 진화했다. 이는 돌고래(dolphin)도 마찬가지로, 돌고래 암컷은 몸을 조금 돌리는 정도로 수컷의 정자가 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여 수정을 막아낸다. 몇몇 종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수컷과의 수정을 거부하고 원하는 수컷과의 수정을 지켜냄으로써 후대의 유전적 특질에 영향을 끼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동물 세계에 있어서 암컷은 그저 수컷에 의해 쟁취되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알게 된다.

이렇듯 『암컷들』은 비인간 동물 암컷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비인간 동물 암컷을 연구하는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다윈이라는 신화적 존재가 정립한 진화론이 놓친 사각지대를 성실하고 철저하게 연구한다. 다윈은 오직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진화를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다윈이 쓴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확장하려는 수없이 많은 시도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 쿡은 집요하게 따라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케이스: 몇 년 전에 에밀리 윌링엄(Emily Willingham)의 『페니스, 그 진화의 신화: 뒤집어지고 자지러지는 동물계 음경 이야기』(2021)를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섯 갈래 페니스, 암컷의 질에서 앞선 상대의 정자를 퍼내는 국자 모양 페니스, 암컷의 질에서 빠지지 않도록 가시가 달린 페니스를 보면서, 내가 알던 자연이 맞나 싶었고, 뭐 이런 게 다 진화했는지 싶었다. 진화는 실속이 있어야 한다는데 대체 여기에 무슨 실속이 있었을까. 나는 이 페니스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암컷들』에 등장한 과학자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좋아, 알았어. 그런데 질은 누가 연구했어?

그렇다. 다섯 갈래의 페니스를 가진 수컷이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의 암컷은 대체 어떤 질을 갖고 있을 것인가? 아니, 어쨌든 수컷과 암컷 모두 한 종이라면 어쨌든 서로 진화적으로 약속한 성기 모양이 있지 않겠는가? 모두 새로운 페니스를 보며 너무나 신기하다고 열광하는데, 대체 왜 암컷에 대한 질문은 아무도 던지지 않는가? 세상에는 연구되어야 할 질이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이렇듯 저자는 직접 전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포진해 있는 현장으로 나가서, 왜 이 문제들이 주목받지 못했고 주목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밝힌다. 이 책은 적어도 다윈이 죄다 잡아먹었을 것 같은 영역에서 그를 잠시 치우고, 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사례를 보게끔 만든다.

새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실증적 태도를 가진 생물학자들은 F 시작하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물론 자신들의 가정이 얼마나 남성주의적이고, 자신들의 다윈주의적 세계관의 이론적 근간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는 간과하고 있지요.”

루시 쿡, 『암컷들』 144쪽

이것은 이 책의 일부분일 뿐이다. 책을 한 글자 한 글자 읽다 보면, 왜 나는 의무교육 과정에서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왜 무수히 많은 자연계의 젠더가 딱 두 가지 상자에 욱여넣어졌는지, 왜 지금껏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카트리네 마르살(Katrine Maral)의 『지구를 구할 여자들』(2022)도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동안 가려져 왔던 여성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어떻게 남성중심적인 과학과 기술의 이야기를 상대화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을 접목할 수 있었는지를 다루었다. 이와 함께 자연 세계에서 이성애와 젠더이분법이 얼마나 구성적인 것인지를 다룬 조안 러프 가든의 진화의 무지개(2010, 뿌이와이파리)처럼, 『암컷들』은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명제를 반박하고 새로운 발견에 기여할 새로운 관점을 던진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책의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속이 개운하다 못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껴 읽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이미 책장을 덮고 있었다. 이제 필요할 때만 소환되는 ‘동물로서의 남성의 본능’ 같은 어쭙잖은 말을 들었을 때,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자원이 주어진 것이다. 두고 보자.

그리고 『암컷들』 책을 고르기에 앞서 이 표지 디자인에 끌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올해 만나본 책 중 가장 눈길을 끌었다고 해야 하나. 포효하는 암컷 사자와 그를 가로지르는 제목의 디자인이 끝내준다.


참고문헌

  • Cooke, L. (2022). Bitch: a revolutionary guide to sex, evolution and the female animal. Random House, 조은영 옮김(2023), 『암컷들』,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 Willingham, E. (2020). Phallacy: Life lessons from the animal penis. Penguin, 이한음 옮김(2021), 『페니스, 그 진화의 신화』, 서울: 뿌리와이파리.
  • Marçal, K. (2021). Mother of invention: how good ideas get ignored in an economy built for men. Abramsm, 김하현 옮김(2022). 『지구를 구할 여자들』, 서울: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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