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없는’ 기후위기 앞에, 아동은 ‘미래’가 아니다.

🐾하영

<데드존 3부작> 2편: 아이를 위한 지구는 없다 [UHD 환경스페셜2] | KBS 방송

0.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지구”

심화되고 있는 기후위기 앞에, 기후위기에 책임이 적은 아동이 앞으로 더 큰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동시에 아동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정동을 불러일으키며, 아동을 호명하는 방식의 구호들로 이어져왔다. 이를테면, 미래세대들의 지구를 위해 환경운동에 동참하자는 제안이라든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미래세대가 병들 것”이라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위기’가 선형적인 사건으로 이해되는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 기후위기가 가지는 현재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어왔다(Holmberg & Alvinius, 2020). 그러나 기후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현재와 미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기후정의를 위해서는 미래에 예상되는 기후 부정의뿐만 아니라, 이러한 부정의가 어떻게 현재에 터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어떤 방식으로 진행 중인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처럼 기후위기의 문제를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 위치시키는 것은 기후위기의 사회적, 문화적이고 담론적인 파장이 지금의 아동·청소년과 만나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그동안 아동은 ‘미래에 성인이 될 존재’로 호명되며, 미래에 성인이 되어 기후위기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설명되어왔다. 아동이 다가올 미래의 재앙에 맞서 지금 행동을 취하도록 강요받는, 시간성의 모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아동-성인의 근대적인 시간적 구분과 선형적인 ‘위기’의 시간성 속에서 아동은 ‘미래’로 재현되어왔다. 그러나 수동적이고 무고한 ‘아동’, 즉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고, 지켜져야 하는 존재로서의 재현에도 아동은 그 위치에 머무르지 않아왔다. 그레타 툰베리를 포함하여, 기후정의 행진, 언론, 미디어에서 기후위기를 말하는 아동·청소년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동의 시간성과 기후위기의 시간성은 끊임없이 엉키며, 아동으로 정의되어 온 ‘미래’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동안 ‘미래’로 호명되어왔던, ‘정상성’을 규정하는 데 활용되어 왔던 아동의 삶이 기후정치의 장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미래와 현재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의 규범성을 재현하고, 반복한다고 여겨져 왔던 아동의 표상에서 아동의 삶이 탈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아동과 동료시민으로서 지금, 현재를 함께할 수 있을까?

1. ‘미래 없음’, 유예된 지금

최근의 기후 우울과 저출생 앞에 ‘미래 없음’은 하나의 레토릭이 되어왔다. 특히나 기후위기 앞에서 긴급성과 위험성을 기반으로 한 시간성은 불투명한 미래, 즉 미래없음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다. ‘기후위기 시한폭탄 째깍째깍’,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구환경시계를 되돌려주세요!’와 같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구들에서도 ‘마지노선’, ‘최후방어선’과 같은 미래의 곤경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구호가 기후위기의 임박한 시간성을 강조할 수록, 미래세대를 상징하는 ‘아이’는 그 위기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퀴어 이론가 에델만은 ‘미래’에 출산과 아이가 있다는 재생산 미래주의를 비판해왔다. 재생산 미래주의는 특정한 미래의 이미지를 전제로 현재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에 기반하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상징기표로서 (대문자) 아이 ‘the Child’ 없이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사회의 통념은 국가와 사회의 ‘밝은’ 미래가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믿음을 계속해서 생산해왔다. 이러한 규범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라는 구호는 진영에 관계없이 활용되는 정치 프레임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거나 사용해야만 한다는 강압성 아래에 반복되어 인용되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겠습니까?”와 같은 문구들에서 ‘아이’는 쉽게 미래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쓰인다. 에델만은 재생산 미래주의가 정치 진영과 관계없이 뿌리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환경운동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포괄적 성교육에 반대하거나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구호에서도 쉽게 ‘미래세대를 위해’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질문은 철저히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누구의 미래가 쟁점이 되는지가 철저히 정치에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재생산미래주의에서 ‘미래’가 될 수 있는 (대문자)아이는 이성애 가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서 ‘정상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성애규범성에 부합할 것을 전제해왔다. 또한,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에서 앨리슨 케이퍼는 ‘아이’를 통해 상상되는 미래가 이성애규범성뿐만 아니라 장애 없는 몸에 기대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왜냐하면, 장애가 미래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역사 속에서 장애아동은 선형적인 시간성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규범적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래’에는 인종적, 가부장적, 능력주의적, 자본주의적, 나이주의적인 의미들이 기입되어 있다. 특히 나는 그중에서도 한국이라는 사회문화 속에서 미래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와 미래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선형적 시간관 속에서 한국 사회는 생애주기나 발달과정 전반의 ‘정상성’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규범적인 생애주기는 아이와 어른의 이분법적 구조를 만들어내며,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미숙하기 때문에 현재의 부당함을 참아내야 한다’는 관념을 형성했다. 정상성을 기반으로 한 발달과정은 ‘미래성’을 규범화하는 정치로 작동하며, 이는 곧 케이퍼의 논의를 빌리자면, “유예의 윤리로 이어져왔다.”(91쪽)

‘미래’로 표상되는 아동의 논의 속에서 정작 아동과 청소년의 삶은 쉽게 유예되어왔다. 한국 사회에서 아동과 청소년은 늘 미성숙한, ‘예비’의 존재이며, 미래에 어른이 될 것을 대비할 존재다. 그래서 아동·청소년은 어른이 될 때까지 참고 버틸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아동기는 ‘미래에 대한 기대’(Thomson & Baraitser, 2018)라는 시간성으로 오랫동안 자리해 왔으며, 아동의 ‘정상적’ 발달은 사회의 규범성에 기대어왔다. 청소년인권운동가 공현은 그의 책 『유예된 존재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건넨다.

 청소년의 인권을 제한하고 짓밟는 일은 몇 년만 참으면 된다는 이유로 쉽사리 정당화된다. 어린이·청소년은 차별 받는 ‘소수자’로 인정받기보다는 그저 ‘유예된 존재들’로 여겨질 뿐이다. 바로 그것이 차별과 억압의 논리임에도. 그리고 그런 논리 탓에 청소년인권 문제의 해결은 정말로 오래도록 유예되어 왔다. 

공현, 『유예된 존재들』 4쪽

선형적인 시간관은 어린이/어른, 청소년/비청소년의 구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미래주의가 내포한 나이주의적인 시간 구분은 아동과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동시에, 미래에 성인이 될 존재로 치환한다. 아동을 ‘미래’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은 아동에게 정상성을 강요하는 동시에, 아동이 현재 경험하는 시간성을 뭉뚱그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처럼 비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시스템과 구조는 아동·청소년에게 억압으로 작동하며, 이들은 사회구조가 정의해 온 ‘정상성’ 속에서만 재현되고 인정된다. 에델만이 재생산미래주의에서 (대문자)아이를 미래로 표상하며, 이 (대문자) 아이가 실존하는 아동과 무관함을 표명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의 아동·청소년이 청소년/비청소년, 현재/미래의 분명한 선형적 시간관 속에서 배제와 억압을 경험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2. (소문자) 아동: 지금의, 기특하지 않은 존재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애초에 <미래 없음>이 다루지 않는 부분, 즉 아이들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와 이 세계의 아이들이 실질적으로 받는 대우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Kafer, A.,『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96쪽

아이에 대한 이상화가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는 아동·청소년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와 문제의식, 그에 따른 행동과 목소리에 주목하기보다는 도래할 미래에 관심을 두는 것에 있다. 아동·청소년은 그 존재 자체가 ‘예비’ 취급을 당하며, 미래의 희망일 뿐 오늘을 사는 존재로 존중받지 못한다(공현, 2020). ‘예비 성인’, ‘예비 시민’으로 호명되는 방식에서 미래를 향한 정치는 청소년/비청소년의 이분법적 구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아동·청소년의 행위의 범위를 제한한다(Hopkins, 2023). 즉 아동과 청소년의 행위성이나 참여는 ‘무고함’과 ‘순수함’ 속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으며, ‘기특한’ 아동·청소년의 바깥에 위치할 때에는 허용받지 못한다. 아동·청소년이 미숙하기 때문에 권리를 제한받는 것이 당연하며 이들이 ‘보호’라는 이름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아동·청소년이 정치적으로 행동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좌절시켜왔다.

정상성 바깥에 미끄러지는 시간들을 현재로 가져오는 방식으로 아동·청소년의 삶을 적극적으로 연결해내는 것은 선형적으로 여겨왔던 아동의 ‘정상적 발달’관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비청소년의 분명한 구분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기후위기에서 숫자로 환원되는 위험과 불안함에 기댄 시간성, 미래성에 기댄 정치와 아동의 현실은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다. 대통령과 국회를 상대로 기후파업 및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헌법소원을 청구했던 청소년기후행동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성의 얽힘을 난제로 제시해왔다.

청소년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아졌지만, 옆에 서서 함께 기후 위기를 외쳐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신 ‘기특한 청소년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자신들의 행사에 초대하려는 요청만 이어졌을 뿐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괘씸죄를 선사하기도 했다. 기성세대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는 애정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현실의 한계도 가득 담겨 있었다. 기특한 청소년이라는 말은 문제의 본질을 주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청소년은 미숙한 존재라는 전제가 내포된 그런 말들은 어른들이 보기에 훌륭한 ‘청소년’은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왜 기후 위기를 외치고 있는지, 얼마나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주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청소년기후행동, <외면은 그만, 이제는 직면할 시간>,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 166쪽

‘기특한’ 청소년의 프레임은 사실 청소년기후행동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서거나 자신의 의견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내는 아동·청소년을 늘 향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기특하다’고 하거나 ‘대견하다’는 말에는 평가를 하는 주체가 스스로를 윗사람으로 상정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존재에게 ‘기특하다’는 칭찬을 하지 않듯이, ‘기특하다’는 말에는 발화의 위계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 발화의 효과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내용 그 자체보다는 ‘나이 어린’ 청소년이라는 주체에 집중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식은 아동·청소년의 행동이 사회가 요구하는 아동·청소년의 규범성과 정상성에서 벗어날 때 바로 반항이나 일탈로 취급하는 결과로 이어져 왔다. 예컨대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에 참여했던 청소년 활동가들은 학교에서 ‘학생이 시위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학교의 명예 실추다, 불명예다’, ‘징계위원회에 넘기겠다’ (기사 보기)는 협박을 받고는 했다.[1] 이처럼 아동·청소년들이 기후위기에 대해서 발화하는 것 또한 사회의 규범을 넘어서지 않는, 즉 ‘무고하고 순수한’, 탈정치적인 행위일 때에만 ‘허용’될 수 있었다. 학교를 ‘파업’함으로써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는 소위 ‘정치적’인 움직임은 ‘미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현재’를 문제제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을 ‘우리 아이들의 미래’라는 구호로 소비하면서도, ‘미래’를 표상하는 (대문자)아이의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배제하는 방식은 사회에서 통용되어왔다. 그러나 기후행동에 함께하는 아동·청소년은 ‘미래세대’이기보다 현재의 경험을 통해 기후위기의 위협을 드러내왔다. 즉 무지하고 무정치할 것을 요구받아왔던 아동·청소년의 재현방식을 거부하고, 기후위기를 둘러싼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청소년운동에서의 기후위기에 대한 말하기와 행동이 ‘미래성’ 비판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동·청소년들이 정해져 있고 타자화된 ‘미래’의 표상이 될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재생산미래주의에서 규범화해왔던 사회질서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의 말하기는 기후위기의 시간성에 나이주의와 청소년/비청소년의 위계가 어떻게 얽혀들어가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즉 기후위기의 위협을 ‘미래’로 환원하지 않고,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미래’라는 이름으로 유예되어왔던 기후위기와 아동·청소년의 주체성을 지금-현재로 불러낸다.

다큐멘터리 EBS <시민의 탄생: 이런다고 바뀔까요?> 청소년기후행동 김도현 활동가 (2020.04.21.)

3. “우리는 누군가의 미래, 희망이 아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미래세대’를 호출해낼 때, 아동·청소년은 무력한 존재, 혹은 미래에 어른이 될 존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기후위기를 함께 살아내고 있는 아동·청소년이 현재를 이해하고 살아낼 힘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북극곰을 위해서 아니라 나의 권리를 위해서.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래세대’, ‘한국의 툰베리들’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희망, 우리의 미래’라고도 불린다. 또는 환경을 사랑해서, 생태 감수성이 높아서, 정신이 깨어 있는 민주시민이어서, 심지어 대안학교를 다니거나 탈학교를 해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정의감에 불타서 기후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목소리 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미래, 희망도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윤현정, “청소년은 미래가 아닌, 현재 기후위기 ‘당사자’이다. <여성이 말하는 기후위기 X 청소년>”,

임박한 기후위기, 재생산미래주의가 표상하는 ‘미래’의 아동, 현재/미래와 청소년/비청소년의 이분법 속에서 퀴어이론과 아동의 삶을 연결하여 읽는 방식은 기후위기 시대 아동·청소년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어떻게 규범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성의 틈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앞서 앨리슨 케이퍼는 “우리의 과제는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그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에 있으며, 특정한 집단을 미래없음이라는 미래의 표지로 보지 않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소문자)아동이 지금, 여기에서 내는 목소리들과 삶의 경험들이 유예되지 않을 때, 우리는 기후위기를 현재의 정치적인 문제로 읽어낼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러웨이의 미래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인용하고자 한다. 해러웨이는 미래주의자들이 추상적인 숫자와 빅데이터에 주목할 뿐, 존재들의 차별화되고 켜켜이 쌓여 겹쳐진 삶과 죽음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짚는다. 그렇기에 다음 세대에게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말끔하게 지워버리려 하거나 안전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진실로 현재에 임하는 것”에 대한 회피다. 이에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제안한다. 즉 얽혀있는 관계들을 발명해내며, 지금 당장 가능한 관계의 변화를 만들자고 요구하며 선언한다. 기후위기라는 트러블(곤경) 앞에서 아동·청소년을 미래로 환원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함께 사는, 함께 연대하는 존재로 볼 때 우리는 다르게 기후위기를 만날 수 있다. ‘미래’라는 추상적인 시간 밖으로 나와보자. 아동이 현실에 함께 응답할 동료가 될 때에야, 새로운 정치와 시간을 열어낼 수 있다.

2023 기후정의행진 (서울)

참고문헌

  • Edelman, L. (2004).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 Holmberg, A., & Alvinius, A. (2020). “Children’s protest in relation to the climate emergency: A qualitative study on a new form of resistance promoting political and social change”, Childhood, 27(1), pp78-92.
  • Hopkins, L. (2023). ““The ice is melting and I don’t want Santa to drown!”: Reflections on childhood, climate action, and futurity”, Journal of Childhood Studies, 48(1), pp85-98.
  • Thomson, R., & Baraitser, L. (2018). Thinking through childhood and maternal studies: A feminist encounter. In: Rosen R and Twamley K (Eds)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Childhood: Friends or Foes? London: UCL Press, pp.66–82.
  • 공현 (2020). 『유예된 존재들: 청소년인권의 도전』. 서울: 교육공동체벗. 
  • 윤현정 (2021년 10월 12일). “청소년은 미래가 아닌, 현재 기후위기 ‘당사자’이다. <여성이 말하는 기후위기> ① 기후위기 X 청소년”. 일다, https://www.ildaro.com/9171
  • 청소년기후행동 (2021). 외면은 그만, 이제는 직면할 시간 – 멸종 위기 청소년들의 생존을 위한 기후 파업.  In 하지현 외 (2021).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 서울: 교육공동체 벗. 
  • Kafer, A. (2013). Feminist, Queer, Crip. Indiana University Press. 이명훈 옮김(2023),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파주: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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