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출산제’가 보호하지 않는 것

이영희

지난해 나는 현장 연구를 하면서 6개월 동안 베이비박스 아기 돌봄 봉사를 다녔다. 주 1-2회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생후 1개월 이내의 새로운 아이들이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채 베이비박스에 들어오고, 다시 아동보호시설로 인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소수의 상근 직원과 시간대별로 배치되는 자원봉사자들은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100일을 챙기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의 자원봉사자였으며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본 아이들과는 정이 들었고, 시설에서 자라고 있을 아이들과 100일을 훌쩍 넘겨 입양을 간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가장 깊게 각인된 기억은 출생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출생 직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는 지금껏 본 아이들 중 가장 작았고, 며칠 뒤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졌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였다. 두 뼘 정도 되는 크기의 아이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시설로 보내져 다음 봉사활동부터는 볼 수 없었던 경험은 ‘무고한 아동’의 이미지를 내세워 탈정치화되는 출생미신고 아동 문제를 더욱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친생모와의 관계가 영구적/일시적으로 단절된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는 친생모가 출산 전후로 겪었을 갈등과 어려움을 가장 먼저 생각했고, 이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다. 보호대상아동의 열악한 삶의 조건을 생각했을 때 ‘고아호적’을 가지고 시설에서 자랄 아이들이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생각할리는 만무하며, 출산한 여성은 임신중지 혹은 유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정보력, 경제력, 인적 자원 등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산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 ‘생명 보호’와 재생산 미래주의 

그 공간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을 불온한 생각은 ‘아이(the Child)’를 국가/사회의 미래와 동일시하며 ‘생명 보호’를 최상의 가치로 두면서도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생명을 선별하며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다방면으로 침해하는 폭력적인 재생산 통치체제에서 비롯된다. 지난 2023년 6월 있었던 출생미신고 아동 전수조사에서 드러난 출생신고 지연, 베이비박스 유입, 보호자의 영아살해·유기·불법입양 등의 사례는 한국의 재생산 통치체제가 어떤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통해 존재(being)와 삶의 규범을 구축하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친생모가 출산 직후 자녀를 살해하고 매장하거나 시신을 은닉한 사례는 ‘경악스러운’ 사건이자 비극으로서 국민적 관심을 받았는데, 살해 동기는 모두 빈곤, 장애, (출산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여성에 대한 성엄숙주의와 미혼 상태에서의 출산이 빈곤/고립으로 직결되는 사회경제 체제, 가난에 대한 혐오, 장애를 ‘미래없음(no future)’의 미래로 여기는 비장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세 가지 이유는 태어난 아이를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순식간에 출생통보제를 통과시키고(기사 보기) 익명 출산 및 양육 포기를 허용하는 익명출산제[1]까지 통과시켰다(기사 보기). 출생미신고는 단지 출생신고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적인 재생산 통치체제에서 가난과 장애의 재생산, 미혼여성과 청소년의 출산이 (낙관적인) 미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서 숨기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의 문제다. 또한 임신중지/유지 및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재생산권 침해의 문제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가해자 여성(생모)’과 ‘생존자 아동’의 구도에서 해석하면서 생모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는’ 아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채 사망하거나, 친생모/부와 분리된 아이의 거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에서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일로 문제시되는 것은 왜일까? 출생미신고 문제는 미등록이주아동의 국적 문제, 미혼부 자녀 출생신고 문제 등을 통해 연구와 활동의 영역에서 오랜 기간 다루어져 왔고 영아유기/살해 또한 그러했음에도 왜 지금까지는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본 글은 ‘생명 보호’라는 당위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출생미신고 문제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초저출생과 국가소멸 공포의 맥락에 있음에 주목한다. 저출생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현재의 ‘인구 위기’가 출생미신고 아동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인구는 곧 국력이고 국가의 미래’이므로 이제는 한 명의 아이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육이 아닌 자녀의 ‘제거’를 선택한 여성들이 형사 처벌의 대상으로 범죄화되고 아동 기본권에 대한 논의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는 ‘아이’를 국가/사회의 미래와 동일시하며 희망의 상징으로 호명하는 국가주의적 욕망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저출생 ‘극복’을 위해 아이를 ‘우리의 공동의 미래(our collective future)’와 동일시하고 이성애적 결합과 출산을 전방위적으로 독려하는 재생산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 (Edelman, 2004)는 과연 ‘모두’의 희망찬 미래를 향하는가? 아이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전방위적 노력은 어떤 미래, 그리고 누구의 미래를 위하면서 누구의 현재를 삭제하고 있는가? 이 글에서 나는 생명에 대한 감정적 호소에 기대어 당위적인 공동의 목표로 여겨지는 아동의 기본권 논의가 개인의 성·재생산 실천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짚고, 아동을 국가의 미래로 호명하며 수많은 이들의 현재를 삭제하는 재생산 미래주의를 파기하고 지금-여기의 불완전한 시간성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고자 한다. 

2. 어떤 아이(Child)를 ‘살려야’ 하는가? 

올해 연간 합계출생률은 0.6명대로 예상된다고 한다(기사 보기). 이제 한 명의 (건강한 비장애) 아이는 높은 출생률이 ‘문제’였던 과거와는 비교 불가하게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소멸 위험 지역에서는 2년 만에 이루어진 한 건의 출산이 마을에 현수막을 걸 만큼 기쁜 일이고 대중들은 아이의 ‘동네 친구’가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기사 보기).

한 명의 아이가 마을과 지역, 나아가 국가의 미래가 되는 상황, 국가는 물론 사기업까지 나서 다자녀 가구에 엄청난 혜택을 주면서 임신과 출산을 추앙하는 2023년의 한국사회는 마치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아이에게 모두 ‘베팅’하는 도박판처럼 보인다. 언제 태어날지 모르고 어떻게 클지도 모르는 미래의 아이,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출생율 상승의 미래를 향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출생했음에도 살아남지 못하거나 친생모(부)에게 키워지지 않은 출생미신고 아이들의 사례는 국가적 손실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태어난 (그리고 태어날) 아이를 ‘살리는’ 것은 국가의 최우선의 목표가 된다. 출생통보제의 공백을 익명출산제로 메우고자 하는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출생통보제는 기존에는 친생모/부에게 부과했던 출생신고 의무를 의료기관에 부과하는 제도로, 친생모/부의 양육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내국인의) 보편적 출생등록만을 위한 제도이다. 즉 병원에서 출생한 아동의 출생신고는 출산한 여성의 개인정보에 근거하여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미혼/혼외 임신, 경제적 어려움, 양육의사 없음 등 다양한 이유로 출산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취약계층이거나 청소년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의 병원 밖 출산을 유도한다는 공백이 있다. 무엇보다 출생미신고 아동의 약 70%는 ‘외국인’ 아동, 즉 이주민의 자녀인데, 이들은 6월 전수조사에서 제외된 것은 물론 출생통보제 적용 대상도 아니다(기사 보기). 출생미신고는 단순히 출생신고 제도의 공백이나 친생모/부의 출생신고 의무 방기의 문제가 아니라 인종, 계급, 젠더가 교차하며 구축되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서 여성의 재생산 권리가 침해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공백을 이주민 자녀를 포함한 보편적 출생등록제도와 임신중지를 비롯한 성·재생산 권리 보장이 아닌, 모의 신원을 숨긴 출산 및 자녀와의 관계 단절을 허용하는 익명출산제로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목표가 개인의 양질의 삶과 재생산 권리가 아닌 ‘생명 보호’에만 있는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영아유기’ 및 ‘고아호적’ 활성화 정책은 마치 아동의 보편적 권리 보장 제도인 것처럼 의미화되고 있다. 

이러한 선별적인 생명정치의 장에서는 ‘아이’의 형상에 기대어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는 재생산 미래주의가 비규범적 성·재생산 실천을 처벌과 배제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지점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출생한, 즉 양자 간에 아무런 갈등도, 법적인 문제도 없는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비장애) 아동은 ‘정상적’으로 출생신고가 된다. 출생미신고는, 모두가 알고 있듯, 그러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경우에 이루어진다. 보편화된 산전기형아검사는 장애의 가능성이 있는, 그리하여 ‘정상적’인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아이의 탄생을 금기시하고 여성의 어머니됨을 좌절시킨다. 태어난 장애아동은 마치 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거되고, 비장애아동을 제거한 것보다는 이해와 참작이 가능한 사유로 여겨진다. 후천적 장애인의 현재와 미래는 장애가 없었던 과거에 종속되어 어긋난 시간성에 위치 지어진다. 한편에서는 전체 출생아의 3%에 불과한 혼외출생자와 친생모, 그리고 수천명의 미등록이주아동이 다양한 방법으로 제거되거나 은폐되면서 극단적이고 집단적인 형태의 아동 문제를 구성한다. 

3. 오지 않는 미래와 침몰하는 현재

대부분의 출산이 법적 혼인관계에서 이루어지고 그 밖의 출산은 문자 그대로 ‘예외적’인 소수의 일이 되어 출생미신고 문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다는 한국사회의 재생산 정책이 과연 누구의 미래를 향하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민의 자녀는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고, 재생산이 금기시되는 (선천적/후천적) 장애인과 퀴어는 ‘남들과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미래없음’의 존재가 되고, 미혼/청소년 여성의 출산은 곧 낙인 찍힌 존재의 빈곤한 미래를 의미하는 사회구조에서 미래는 ‘합법적 신분과 충분한 경제적 자원을 가진 법률혼관계의 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 비장애 아이’와 같은 말이다. 이러한 규제와 통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없이 친생모/부와 자녀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되는 복잡한 맥락을 ‘위기아동’과 ‘생명보호’의 문제로 치환하는 정책 상황은 ‘아이’의 형상에 기댄 재생산 미래주의와 이를 지탱하고 있는 이성애규범, 비장애중심주의, 그리고 여성 신체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맥락을 은폐하고 있다.

계급·젠더·장애·인종이 교차하며 출산의 규범과 금기가 동시에 구축되는 재생산 통치체제에서 출생통보제와 익명출산제가 동시에 시행됨으로 인해 어떤 아이가 병원 안팎에서 ‘버려질지’는 손쉽게 예측 가능하다. 가난, 장애, 공포로 인한 영아유기·살해·불법입양은 두 제도의 시행에도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며, 오히려 촉진될 수 있다. 특정한 신체, 관계/공동체, 사회경제적 상황에 놓인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계속해서 삭제하고 부정하는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는 출산 사실을 숨기고 아이를 제거하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심 없이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아이를 낳고 생명을 보호하라는 주장은 생명 보호 ‘이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출생미신고 문제에 대한 현재의 대책은 아이들의 생존 이후의 삶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출생미신고의 배경에 있는 수많은 문제는 그대로 두고 출생등록 될 권리만 보장하면, 영아살해를 일반 살인죄와 동일하게 처벌하고 여성을 강력범죄자로 만들면 죽었을 아이들이 죽지 않고 미래의 ‘생산가능인구’로 잘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2024년 7월 19일부터 시행될 출생통보제와 익명출산제는 출생미신고 건수는 일시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장애·공포를 이유로 한 병원 밖 출산과 익명출산에 관계된 사람들의 삶은 지금의 가난한 사람, 장애인, 미혼/한부모 가정, 보호대상아동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2

‘생산인구’로서의 아이와 생명에만 관심을 두는, 그리고 법률혼관계에서의 출산만을 독려하는 재생산 미래주의의 사회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개인의 현재와 아이 없는 미래, 퀴어의 미래, 장애와 불구(crip)의 미래를 삭제하면서 오지 않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건전한’ 가정에 속한 ‘건강한’ 아이를 생산할 것을 강제하는 발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재생산 통치의 장에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은 굴절되고 접힌 시간에 정박되고, 출산 가능한 신체로서의 여성의 현재는 언제나 미래에만 존재하는 ‘아이’에게 귀속되면서 이들의 현재는 계속해서 침몰한다. 선형적인 시간성과 생애규범에서 벗어난 삶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한국사회에서 합법적인 결혼·출산을 할 수 없거나, 권장되지 않거나, 하지 않고자 하는 이들의 현재는 오지도 않을 미래에 저당 잡힌 것과 같다. 

4. 지금-여기의 불완전한 현재로 

배우자가 없으면, 자식이 없으면 외롭고 고독하게 늙어 죽을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세간의 ‘걱정’에서 나는 자식 때문에, 부모 때문에, 친척 때문에 망가진 삶과 공동체를 떠올린다. 배우자와 자식만이 행복하고 안온한 미래의 가능성이 되는 사회에 과연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추락하는 출생률이 미래를 가늠할 유일한 지표로 여겨지는 사회는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다양성에도 규범이 있는 한국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매우 제한적이고 빈곤하다. 초저출생 국면에서 비혼여성의 출산과 다양한 가족 구성에 대한 논의가 진전될 수 있는 장이 (우연찮게) 마련되기는 했지만 ‘다양한 가족’에 퀴어와 장애인, (다문화 가족이 아닌) 이주민 가정은 포함되지 않는다.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면, 비장애 가임여성[3]이라면 규범적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여 미래의 노동력이 될 아이를 생산할 것을 강요 받는다. 결혼-출산을 통한 가족구성은 ‘소멸’과 붕괴의 공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아이’와 ‘가족’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낭만적인 동화가 아니다. 갈등과 불화, 화해, 연합, 불일치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대체로 불행하고 치열한 예측 불가능한 현실의 삶이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국가의 미래를 배팅하며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환상에 투자하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의 현재에 대한 무관심, 출생률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이 ‘모든’ 이의 출산과 재생산은 아닌 선택적 관심, 성·재생산 권리 보장에 대한 의도적 배제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존재와 삶을 파괴하고 현재를 유예한다. 현재가 없는 미래, 미래가 없는 현재의 불완전한 시간성에 놓인 이들이 ‘지금’의 삶에 집중하며 나이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성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자인 앨리슨 케이퍼(2023 [2013])는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계보에서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하며 매끈하지 않은 불구(crip)의 시간을 말한다. 그녀는 불구의 시간을 상상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의도적인 배제와 탈락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바탕으로 중첩되고 모순적이며 이상한 불구의 시간에서는 어떤 미래가 가능할지 탐구한다. 그녀는 불구의 시간을 퀴어한 시간과의 관계에서 해석하는데,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 그리하여 ‘남들과 같은’ 미래가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인 퀴어와 불구는 유연하고 변화무쌍하며 불일치와 모순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분리될 수 없다.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이며 모순적인,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고 애매하며 불완전한 불구의 시간은 그렇기에 퀴어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장애와 그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102)하며 접근 가능한 미래(accessible future)를 위해 연합할 것을 제안하는 케이퍼의 논의는 ‘아이’로 대표되는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삶, 그리고 행복하지 않거나 혼란하거나 이상하고 모순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페미니스트-퀴어-불구의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은 규범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성을 뒤흔들며 혼란하고 중첩되는 시간성을 끌어안고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유토피아적인 미래와 매끈한 시간성이 아닌, 통제 불가능하고 불완전하며 요동치는 시간성을 끌어안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예측 불가능한 더 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함을 말하고 싶다. ‘아이’와 ‘가족’이라는 희망도, 남은 건 죽음뿐인 절망도 아닌 현실에 기반한 접근 가능한 미래 말이다. 

내가 지금 발 붙이고 선 곳의 삶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게 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형상에 기댄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비롯되는 부정의(injustice)에 개입하고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는 것, 그리고 “관습적인 대본에 없는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전혜은, 2021: 424)이다. 그러한 삶은 희망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으며, 모순적이고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우리는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 전혜은(2021). 『퀴어이론 산책하기』, 서울: 여이연. 
  • Edelman, L. (2004).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 Kafer, A. (2013). Feminist, Queer, Crip. Indiana University Press. 이명훈 옮김(2023).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파주: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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