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 디스토피아 생존 가이드: 오지 않는 미래를 대비하는 법

🎶송유진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감동적인 조우: 출산을 여성의 책임으로 몰아가기

가족계획사업의 목표인 낳기 성공을 기대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으며, 주요이유 인구증가 정지를 이룩할 있는 여건으로서 (…) 미혼여성들이 갖고 있는 관념, 자녀에 대한 가치관의 태도는 우리나라 가족계획사업의 문제점 되고 있다.”

오익성, 1976, “미혼여성의 가족계획에 대한 지식 및 태도에 관한 조사”, 제주한라대학교 논문집

위 글은 1970년대 ‘미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보고서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옛날 자료이고, 현재와 여러모로 매우 다른 상황 위에서 쓰여진 글이지만, 뭔가 어디서 많이 본 얘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다.

이번 조직 개편은 미니 부처인 여가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재의 양성평등 정책보다 실효적인 정책 추진하기 위한 (…)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이다.)”

이는 작년 10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여성가족부 관련 개편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발언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기사 보기). 위 두 글이 쓰여진 시점 사이에는 약 50년의 시간 차가 있다. 그 사이에는 아주 많은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있었고, 인구와 출산이 얘기되는 방식 또한 굉장히 달라졌다. 1970년대에 인구와 출산이 얘기되는 방식은 ‘인구폭발’을 통해 국가가 말 그대로 터져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위에 자리해 있었다. 1978년도 4월호 <가정의 벗> 잡지에 실린 그림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가족계획사업이라는 이름의 인구감소정책이 성공하면 부유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누릴 수 있게 되겠지만, 반대로 실패할 경우 근미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나 볼 법한 어지럽고 숨 막히는 도시에서 끼어서 살아가게 되리라는 우려가 팽배했던 것이다.

한편 2020년대 오늘날의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초저출생’[1]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인구소멸’이 일어나고, 이는 나아가 ‘국가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바이러스처럼 공기 중을 떠다니고 있다. 올해 8월 EBS에서 ‘인구대기획-초저출생’이라는 긴장감 넘치는 이름으로 무려 10부작 기획 다큐멘터리(이 짤로 유명한)를 제작·방영했다는 사실은 이런 상황을 잘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위 두 글 사이에는 어쩐지 찝찝한 유사성이 있다. 바로 여성들, 그것도 출산적령기에 있는(정확히는 있다고 얘기되는) 젊은 여성들을 인구정책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다. 한국의 인구정책은 여성의 출산을 정책의 종속변수 정도로만 취급했다는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족계획사업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왔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기 때문이다(배은경, 2021).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인구 위기’의 책임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있다. 고출산(高出産), 혹은 저출산(低出産)으로 얘기되는 ‘인구 위기’는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지나치게 많이 낳아서/혹은 낳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로 얘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출산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한 여성이 평생을 살아가며 접하는 사회제도와 정책, 노동구조, 교육,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총체적이고 연속적인 사건에 가깝다. 따라서 한 여성이 살아가며 겪는 구조에 대한 고민을 배제한 채, 단순히 ‘출산’이라는 순간과 그 여성 개인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정부의 접근 방식은 출산정책에 대한 극도로 편향적인 시각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이 글은 1970년대와 2020년대인 지금의 상황이 완벽히 똑같다는, 그러니까 몰역사적이고 근원적인 형태의 여성차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어 유사하게 반복되는 이런 논리의 기저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이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아무리 국가가 울며 매달려도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와 어떤 영향관계 하에 있는지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영향이 꼭 거시적인 정책에서부터 여성들 개인의 방향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볼 수는 없다.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출산정책의 지속적이고 장렬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하지 않는 여자들, 재생산되지 않는 미래주의

그렇다. 현재 우리네 국가가 처해 있는 가장 큰 비극은, 아무리 젊은 여자들을 협박하고 매도하고 정책의 도구로 전락시켜도 그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출생률 급락에 대한 뉴스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귀가 따가울 지경이고, 이에 따른 학령 인구 감소와 공적 교육체계의 붕괴, 지역소멸, 나아가 국가소멸이라는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은 이제 친숙하게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목격하는 중인 우리 사회의 반응은 당황이나 어리둥절함, 그리고 경악의 정서에 가깝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고 퍽퍽하다고 해도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왜 진짜로’ 아이를 낳지 않는가에 대한 경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평소처럼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질 줄 알았던 시간의 흐름이 어느 날 눈 앞에서 뚝 하고 끊겨버렸을 때, 내가 당연히 전제하고 기다렸던 미래가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별안간 깨달아버렸을 때의 느낌.

이러한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여성을 출산정책의 대상으로 여겨왔다는 것 이외에 무언가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국가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출산에 대한 규범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하고, 여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를 내면화하게 되는 과정을 비판하는 것은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폭로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에는 무언가 이런 설명만으로는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와 이성애가족중심적 시간성에 대한 에델만의 이론이 일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델만은 그의 대표 저서인 No Future에서 ‘재생산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이성애정상가족의 시간성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원리로서의 재생산에 대해 이야기했다(Edelman, 2004). 이성애정상가족의 시간성은 ‘아이(children)’를 낳음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절대화되는 한편, 이를 벗어나는 시간성과 실천들-예를 들면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 퀴어들의 실천-은 계속해서 비가시화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뒤집어보면, 우리는 재생산이 이성애정상가족의 시간성을 유지시키는 필수적인 작동 기반인 동시에 바로 이 시간성이 계속 재-생산되기 위해 끊임없이 이용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성애정상가족의 시간성은 여성과 여성의 신체, 무언가를 배태하고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또한 실제적인 차원에서 계속해서 소모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재생산이라는 톱니바퀴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추상적인 ‘출산력’이자 재생산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던 ‘여성(Women)’이 수백만명의 필요와 욕망, 불만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Womans)’로 쪼개어짐으로써, 그리고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출산을 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쇄 고리가 점점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는 더 이상 재생산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는 재생산되지 않는다.

오지 않는 미래를 대비하기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아마도 오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린 이미 다 망했으니 죽을 때까지 술이나 퍼마시자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이런 상황을 재생산을 둘러싼 두터운 맥락이 변화하고, 새로운 가능성들이 실험되는 장으로 읽어낼 것을 제안한다. 이는 해러웨이가 얘기했던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roubles)’의 자세와도 이어진다. “끔찍한 과거 혹은 에덴동산 같은 과거와 종말론적 미래 혹은 구원을 약속하는 미래 사이에서 사라져버리는 회전축으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장소와 시간, 수많은 문제와 의미의 무한 연쇄에 얽혀 있는, 죽을 운명의 크리터로서”(해러웨이, 2021) 살아가는 것 말이다. 인구소멸에 대한 간편한 비관주의(“우린 이제 다 죽을 거야…”)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어쨌든 누군가는 아이를 낳겠지!”) 사이에서, 출산하지 않는 여자들과 재생산되지 않는 미래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보자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얘기되는 ‘위기’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위기인가, 를 질문해보는 것은 익숙한 비관론 대 낙관론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초저출생이라는 현상은 과연 누구의 위기인가? 재생산을 하지 않는 여성의 위기인가, 아니면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잠재적 아동들’의 위기인가? 혹은 국가의 위기인가? 여러 학자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인구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위기론의 형태로 도래해왔다(백영경, 2006). 해당 인구 담론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가와 관계 없이, 이는 언제나 인류의 미래가 거대한 위협 아래 놓여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구실로 현재의 재생산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위기론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새롭게 만들어지는 규범과 가능성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고민에 일부 답하기 위해, 몇몇 SF 작품의 세계관을 이야기하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1988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아키라>는 가까운 미래, 핵폭발로 추정되는 정체 불명의 폭발로 인해 세계가 멸망하고, 그 위에 다시 세워진 도시인 네오-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폭주족으로 살아가던 ‘테츠오’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아이들인 ‘넘버즈’와 우연히 접촉한 뒤 초능력을 손에 넣게 된다. 이후 테츠오는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다가 ‘아키라’와 다른 넘버즈들의 제재로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사건이 이후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듀나의 『아직은 신이 아니야』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각성하게 된 소년·소녀들로,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서로 교류하며 인간성의 낡은 관념을 벗어던지고 다른 존재로 진화해나간다. 이들이 사고하고 존재하는 방식, 상황을 인지하고 해결하는 방식은 이전 세대 인간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이다. 결국 『민트의 세계』에 이르러 이들은 지구를 벗어나 ‘이상한 존재들’함께 우주로 떠나가게 된다(강은교, 2022).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체화한, 이전의 인간과는 생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아이들’과, 그 변화를 그저 목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그린다. 이는 기존의 재생산 방식—어른이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으리라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화가 시작된 세계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 속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곧 직면하게 될 세계의 복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제목은 사실 모순적이다. 인구소멸 ‘위기’에 대한 공포가 만연해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미래(그것도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에 대비하는 방법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것도 ‘가이드’라는 명확한 형식으로는 정리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이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폴리탄 괴담 속의 문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반대되는 문장으로 가득할 것이다(“첫째, 아이를 낳으십시오. … 열일곱째, 절대로 아이를 낳지 마십시오”). 아마도 미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키는 형태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역설적인 형태의 가능성들을 함께 가져올 것이다.


참고문헌

  • Donna J. Haraway.(2016). Staying with the Troubles: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최유미 옮김(2021),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 Edelman, L. (2004).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 강은교(2022), “페미니스트 세계만들기(worlding)로서 듀나의 SF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학위논문.
  • 배은경(2021), “‘저출생’의 문제제기를 통해 본 한국 인구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모색-재생산 주체로서 여성의 행위성과 저출산·고령사회정책의 검토”, 『페미니즘 연구』, 제21집 2권, 137-186쪽.
  • 백영경(2006), “미래를 위협하는 현재: 시간성을 통해 본 재생산의 정치학”, 『여/성이론』, 제14집, 36-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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