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윤

괴물을 살려두면 안 되는 걸까?
투모로우바이투게더 – 그냥 괴물을 살려두면 안 되는 걸까
네가 영웅이 되고 난 이제 괴물이 될게
지루한 역할을 벗어나 서로가 되게
이 스테이지를 깨야만 꼭 어른이 돼야만
잘 하고 있는 걸까, 난 영원히 소년으로 살고픈 걸
어둔 미로도 엉킨 덤불도 뒤틀려진
숲 속 괴물도 맘에 드는 걸
탈선된 오류 속 버그라 불러도
정해진 길은 지루하잖아
치명적 오류지, 하지만 평화롭지
1. 규범적인 시간성에 얽힌 인간관계
생애과정에서 한 개인이 어떠한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체득한 규범이다. 통상적으로 10~20대는 친구, 20~30대는 연인, 30~40대는 부부, 40대 이후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을 최우선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결혼하지 않고 (동성인) 친구들만 만나는,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4-50대는 미디어에서 흔히 ‘철부지’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소년(여기서 소년은 모든 성별을 아우르는 표현이다)의 우정, 청년의 연애감정과 사랑, 중장년의 모/부성애는 일직선상에 놓여 마치 스테이지를 깨나가듯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각 단계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게임 속 “치명적 오류”처럼 어딘가 모자라거나 잘못된 존재, 늦더라도 하루빨리 이성애 연애와 결혼, 임신・출산・양육의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 나이는 많지만 어른은 되지 못한, 그래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괴물을 무찔러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게임에서 괴물을 살려두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 한술 더 떠 과업을 달성한 영웅이 아닌 영원히 소년으로 남아 괴물이 되려는 플레이어는 어떻게 이 게임을 완수할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여 ‘게임 오버’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질문을 바꾸어보자면, 한국사회가 제시하는 ‘적령기’라는 규범적인 시간표와 그 시간대에 걸맞은 인간관계에 속하지 못하는, 혹은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서 튕겨나가지 않고 안전하게 현재를 살아나갈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사람이 결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원가족 이외의 혹은 원가족이 아닌) 법적 보호자는 필요하고, 법적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그 보호자가 1인이어야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보다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는 어떤 돌봄관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걸까?
2. 왜 1:1 관계의 ‘가족’에서 출발해야 할까?
나의 질문은 현재의 결혼제도는 물론이고, 2023년 5월 드디어 발의된 가족구성권 3법인 혼인평등법,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지원법(기사 보기)도 사실은 영 마음에 와닿지 않고 석연찮았던 그 찝찝한 기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세 제도가 지금의 이성애 결혼제도를 보완하거나 대체하게 된다면 나는 안정적인 사회망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을지, 내가 바라는 미래의 내 모습은 저 세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나의 고민은 궁극적으로 “법적으로 보호받는 관계는 (그 관계가 성애적이든, 그렇지 않든) 꼭 1:1 관계로부터 출발해야 할까?”로 이어졌다. 이 고민은 이미 혼인평등 및 가족구성권 논의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제기된 질문인 “누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누가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가?”와 맞닿아있기도 하고, “가족구성권 3법이 통과되면 우리는 혹은 나는 그것으로 충분할까?”, “왜 꼭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어야 할까?” 하는 성글고도 ‘시기상조’인 질문을 포함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 호주제 폐지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이지만,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법이 제정되면서 사실상 호주는 가구주로, 호적은 가족관계증명서로 대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의 운동은 호주제를 폐지하고 가족관계등록법을 제정하는 것에 그쳐야 했나” 하는 한 활동가의 질문이 내게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었다. 2인 이성애 커플에 국한되는 지금의 가족제도를 넘어서기 위한 가족구성권 3법에 대해서도, 나는 이것이 최선일까 하는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3법이 제정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나는 수많은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이성혼 제도에도, 아직 오지 않은 동성혼 제도에도 완전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바이, 언젠가 지금의 친구들이 다 결혼해서 혼자 남게될 것이 두려운, 그러나 본인의 결혼은 그저 막연한 트랜스여성,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다른 룸메이트들과 함께 방을 나누어 살고 있는 레즈비언/퀴어 커플, 기존의 이성애 연애 각본과 결혼 질서에 포섭되고 싶지 않고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싶지만 언젠가는 모두들 결혼을 택할 것이고 그렇기에 본인도 휩쓸려 결혼하게 될 것 같은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 갑자기 아플 때 보호자로서 달려와줄 수 없는 장거리 부부/가족, 몇 명의 오래된 친구들만으로도 충분한 무성애자, 그리고 독점적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폴리아모리 친구들의 얼굴이. [1]
[1] 이외에도 가족구성권 3법, 그중에서도 생활동반자법이 청소년, 이주민, 2인 이상의 공동체 등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나영정. (2023). “생활동반자법은 누구를 대변하는가?”. 일다. https://m.ildaro.com/9726. 참조.
나는 이 글에서 나의(우리들의) 우정 공동체[2]가, 제도적으로 보호받는 결혼(이성혼, 동성혼)과 1:1 관계에서 서로를 혹은 한쪽을 책임지는 관계(생활동반자, 비혼출산지원)에 질 수밖에 없는 문화적 구조를 문제삼고 싶다. 나아가 이러한 구조는 돌봄에 대한 어떠한 상상력을 전제하고 있는지, 돌봄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한다고 상정하는지 질문하려 한다.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주기 위해 친구를 자녀로 입양한 은서란 작가의 이야기는 법적 성별이 다른 2인인지, 이들이 성애적 관계인지와 상관없이 법정 대리인 역할을 부여하는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기사 보기). 동시에 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법적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상일지라도) 친구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족이라는 지위로 ‘승격’되어야 하는 제도적·문화적 장치를 읽는다.
[2] 여기서 우정 공동체는 좁은 의미의 친구관계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광의적 의미의 우정 공동체는 소피 루이스가 말하는 ‘근족’ 개념과 유사하다. “우리는 더 날카로운 개념, “동지적 관계”나 “공모자” 같은 개념이 필요하다. 혹은 뭔가 중간적인 걸 원한다면 아직 친숙하게 사용되는 고영어표현 “근족과 혈연kith and kin”에서 폐어가 된 앞단어를 되살리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 “혈연”과 비슷한 유대를 지칭하지만, 그 근거는 인종, 혈통, 정체성보다는 지식, 실천, 장소이다. (매킨지 워크는 <혈연이 아닌 근족을 만들자!Make Kith, Not Kin!>라는 에세이에서 근족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친구, 이웃, 지역 주민, 관습 같은 모호한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피 루이스(2023: 154).
기존의 가족제도는 이미 1:1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방대하고도 복잡한 친족관계를 법으로 명시하고, 그에 따르는 법적 지위와 권리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혼인과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일대다(一對多) 우정 공동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3] 이는 친구관계 역시 법적 용어로 정의하고 법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모든 관계를 법 제도로 보호하거나 명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페미니스트 가족/법 연구들이 말해왔듯, 법이 설명하고 있는 ‘가족’에도 이미 서로 상충하는 지점과 한계, 그리고 문제점들이 가득하다. 다만 어떠한 관계가 제도를 통한 (인구) 통치의 대상이 되는지, 그에 따라 구성된 ‘(정상)가족’이 돌봄을 어떠한 형태로 정형화하고 돌봄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하는지 질문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라고 주장하기보다, 가족 없는 돌봄을 상상하자고 말하고 싶다. 돌봄 단위를 재구성하고 새롭게 사유하는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가족의 사적돌봄에 기대고 있는 국가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민국가(혹은 민족국가, national state)는 은유로서든 실질적으로든 친족과의 상호 전제하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버틀러, 2005: 31). 국가(國家; domestic 국내의, 가정의)라는 말조차도 가족의 은유에 기대고 있지 않은가.
[3] 참고로, 2인 이상의 공동체를 제도적으로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은 송효진. (2021). “가족다양성 보장을 위한 법제 대응에 있어 쟁점 고찰: 다양한 파트너십과 공동체 관계의 제도화 이슈를 중심으로”. 이화젠더법학, 13(3): 185-214. 참조.
3. ‘실버타운’으로 표상되는, 다른 방식의 돌봄관계에 대한 열망
“나이들면 실버타운 다같이 들어가자”는 말은 내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반쯤은 농담인 말이다. 나중에 안정적으로 돈을 벌게 되면 같이 모여 살자는 말도 종종 하지만 실버타운 이야기보다는 좀더 무게감 있는 말이다. 어쨌거나 이 말들이 구체적인 미래 계획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모으는 일이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있고 할 계획인 친구들과 직장에 막 들어간 친구들에게는 아직 막연한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친구보다 우선시되는 관계나, 결혼·임신·출산·양육 등으로 인한 ‘각자의 삶’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 중 누군가 이성애 기반이든 동성애 기반이든 가족을 꾸리게 된다면 계획과 결정의 중심축은 나 한 명의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이동하게 된다. 가족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암묵적이고도 공공연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당장 친구들과 먼 미래를 염두에 두며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보다는, 그리고 돈을 벌어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가족을 꾸리게 될지도 모르는 비교적 가까운 미래보다는, 규범적인 시간표와 가족에 대한 돌봄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되는 노년에 같이 살자는 이야기가 더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든 후에’는 ‘대안적 공동체 생활’의 실현 가능성을 폐기하지는 않되 불확실한 미래로 유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사이다.
이 이야기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가족과 여타 다른 인간관계 간의 위계를 문제삼지 않은 채, 또 가족이라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삶의 방향과 방식을 직조해나가는지 인식하지 않은 채 가족과 돌봄에 대해 논하는 것이 과연 기존의 가족제도와 가족에 의존하는 사적 돌봄 체계를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이가 든 후에야 (겨우) 그러한 공동체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은, 우정 공동체가 실질적·제도적 생활공동체로서 역할하는 시기를 미루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돌봄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기약없이 유예될 것을 의미한다.
4. 퀴어 시간성을 수반하는 난잡한 돌봄과 ‘괴물’들을 위하여
돌봄관계는 언제나 시간성과 얽혀있다. 지금의 사회가 돌봄의 기본 단위로 설정한 (직계)가족은 안과 밖이 언제나 명확하며, 이들의 가계도는 필연적으로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시간성을 상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재산을 축적·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이를 위한 상속은 상속자로서의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전제한다. 이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다시 부를 귀속시킬 아이를 재생산해야 한다. 반면, 친구의 친구가 다시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흐릿한 경계의 돌봄 관계는 미래로 질주하는 직선적 시간 대신 서로의 시간이 얽히고설켜 단일하지도, 동질적이지도 않은 퀴어한 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퀴어한 시간들은 우리의 발목을 얽매는 규범적 시간성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더 케어 컬렉티브가 『돌봄선언』을 통해 제시하는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 개념은 돌봄 제공자의 원형을 모성 혹은 어머니에서 찾기를 거부한다(2021: 71). 대신 얼마나 많은 돌봄이 이미 배우자, 가족, 친척이 아닌 친구 관계 내에서 이루어지는지 이야기하며, 수평적 네트워크로서 친구가 관계의 기초 단위로서의 가족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본다(72). 지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돌봄 형태나 이에 대한 개개인의 바람이 아니라, 이러한 돌봄을 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확장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내가 선택한 가족으로 이행하는 것, 그러니까 가족에서 또 다른 가족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라면, 이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버그’들이 실시간으로 양산되고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종의 상호의존성이란 바로 세계를 짓는 게임(worlding game)을 일컫는 말이며, 이러한 게임은 응답과 존중의 놀이라고 말한다(Haraway, 2007: 19). 종들의 전지구적 상호의존성을 이야기하는 해러웨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1:1 파트너십이나 배타적인 가족관계는 그 어떤 제도보다도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장치일 것이다. 게임의 규칙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으니 오류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
우정 공동체로부터의 난잡한 돌봄은 단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인 현실이지만 국가와 제도의 시선에서는 언제나 묵음처리 된다. 가족-돌봄이 빚어내는 규범적 시간성에서 한발짝 떨어져 ‘나중의 나중’으로 미뤄지는 ‘괴물’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인 자리에서 출발하자.
참고문헌
- Haraway, Donna. (2007). When Species Meet. Univeristy Of Minnesota Press.
- Butler, Judith. (2002). Antigone’s claim: Kinship between life and death. Columbia University Press, 조현순 옮김(2005), 『안티고네의 주장』, 동문선.
- The Care Collective. (2020), The Care Manifesto : The Politics of Interdependence. Verso, 정소영 옮김(2021),『돌봄선언』, 니케북스.
- 경향신문, (2023.05.31.), “정의당, ‘가족구성권 3법’ 추진···“가족 선택할 자유는 보편적 권리””.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5311631001.
- 나영정(2023), “생활동반자법은 누구를 대변하는가?”, 일다(https://m.ildaro.com/9726).
- 송효진(2021), “가족다양성 보장을 위한 법제 대응에 있어 쟁점 고찰: 다양한 파트너십과 공동체 관계의 제도화 이슈를 중심으로”, 이화젠더법학, 13(3): 185-214.
- 한겨레21, (2023.08.12.), “친구를 입양한 친구 “느슨하고 유연한 제도가 필요해””.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2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