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

* 본고는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몸된 자연으로서 제주 해녀의 바다: 신유물론을 통해 본 비인간 자연의 행위자성과 공-생하는 몸들>의 내용 일부와 연구 이후의 소회를 담고 있다.
“우리는 또한 살/실체 속에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보다 허용 폭이 넓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다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136쪽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후위기와 관련한 재난들. 이어지는 고통과 죽음들. 매일 듣는 슬픔 앞에서도 왜 그것이 아직도 ‘나’의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지. 왜 누군가의 문제는 더 절박하고 심각한지, 누군가의 문제는 그렇지 않은지. 돌이켜보면 나의 석사논문 저변에는 이러한 오래된 질문이 깔려있었다.
일견 해녀, 라는 인구집단의 노동 및 생활의 특수성,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바다의 변화는 도시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기후위기 때문에 앞으로 커피나무 재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데, 그래서 커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지도 모른다는데, 지금 이 순간 나는 2,000원도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으니까, ‘도대체 그 망가진 미래는 언제 오는데?’ 그렇지만 몸은, 몸들은, 몸과 환경은 개별 개체로서 존재하지만은 않는다는 명제는 그리 받아들이기 어렵지만도 않다. ‘환경호르몬’ 이라는, 아직도 뭔지 잘 모르는 그 화학물질이 내 몸을 오염시킬까 두려워 플라스틱을 막 사용하고 싶진 않으니까.
내 몸의 경계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주변 물질들로 인해 내가 언제나 변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다른 사유로 나아갈 수 있을까. 신유물론(New-Materialism)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게 해주는 담론으로써, 개별 개체의 경계를 흐리는 것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요청한다. 대표적인 신유물론 학자인 캐런 버라드(Karen Barad)의 이론은 신유물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는다. 그는 닐스 보어(Niels Bohr)의 양자역학 인식론을 빌어 존재의 기본 단위가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현상(Phenomena)’이라 밝힌다. 이에 따르면 독립적인 것으로 상상되는 개별 사물의 행위역능이란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작용(intra-action)’을 통해 관계적으로 구성되며 창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의 경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신유물론의 인식틀은 비인간(물질)의 행위자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개체로서 인식되는 개별적 ‘몸’들이 실은 다른 존재들과 항상 연합되어 있으며, 항상 서로의 존재를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함께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들이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형성해 나가는 중이라는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해 다시 세계를 보자. 환경, 물질, 비인간 자연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인간 저 바깥에 놓인 배경만은 아니게 된다. 생성의 과정 속에서, 그들은 어느새 훌쩍 경계를 넘어 ‘나 자체’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특정한 현장, 특수해 보이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해녀’, 내가 아닌 타자의 몸 또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다른 개체라고 선 그어 버릴 수만은 없다. 얽힘을 전제한 우리의 몸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오래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유물론을 거친 내가, 자연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경험을 묻는 것으로 몸과 환경의 관계를 사유해 보고자 했던 이유다.
초기 연구 설계 단계에서 나는 기후 변화를 목격하고 있는 이들의 실제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심층인터뷰만으로도 이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고, 어렵게 내 연구 요청에 응해 준 서귀포시 한 마을의 해녀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이때의 나는 해녀를 단순히 ‘자연친화적 존재’로 여기며 그들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낭만화해 온 방식이나 해녀들이 수행해 왔던 높은 강도의 노동을 ‘우리네 어머니들의 사랑’과 같은 수식어로 환원하여 대상화해 왔던 기존의 관점과는 거리를 두고 글을 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 방법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 보지 못한 상태였던 것 같다. 해녀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몇 차례 그들이 ‘물질’하는 장소에 가서 다른 해녀들과 간단한 문답을 이어나가면서야 나는 비로소 어떤 일이 내 생활, 매일매일의 수행할 일이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삶(생존)과 긴밀하게 직결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 일에 대해 복잡한 감정과 경험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단순하게 묻는 것으로는 그들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직접 현장에 참여해 연구 대상과 같은 풍경을 보고, 듣고, 느끼는 방식의 연구 방법인 현지조사 및 참여관찰[1]을 하는 쪽으로 연구 방법을 변경하게 되었고,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둘러싼 비인간 자연이 얼마나 인간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 직접 경험하고 또 듣게 되며 연구의 질문과 주제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1] 코린 글래스네(Corrine Glesne, 1991/2017)에 따르면 참여관찰의 목적은 일반적인 저널과는 다르게 해당 문화에 대한 완전한 서술과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 깊은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물질’이 해녀들의 삶과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는 노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들과 자연의 관계를 깊게 이해하는 데에 현지조사의 도입은 필연이자 필수였던 것 같다.
현장에 나가는 매일, 나는 해녀들의 일상을 따라해보려 노력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건 물 때[2]를 기억하고 바다를 살피며 물에 들지 말지를 예측해 보는 일이었다. 바다 날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람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해녀들은 파도가 어떻게 될지, 내일의 바다는 어떠할지를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연구 초기에 나는 하늬바람, 샛바람, 섯바람 등 해녀들이 항상 너무 당연하게 부르는 바람의 이름으로 인해 꽤나 애를 먹었는데, 바람의 이름과 불어오는 방향, 그 특성을 대략 알더라도 바람과 바다의 관계를 실제 현장에서 대응시켜 보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2] 물때는 달에 의해 정해지기에 음력 날짜로 보아야 한다. 해녀들은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어 물의 흐름이 약한 ‘조금’에는 거의 반드시 바다에 나가려고 하며, 조수 차가 큰 때에는 ‘물질’을 하지 않는다.
자연을 읽는 몸; 변신하며 함께되는 몸
나에게는 어렵기만 했던 이 작업을 해녀들이 쉬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있어 바람과 파도의 관계는 글자나 지식을 통해 습득된 지식이 아니며, 몸으로 체득한 ‘몸적 지식’이자 ‘신체 도식(몸 도식, 몸 틀, le schéme corporel)’(Merleau-Ponty, 1945/2005)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실제 몸, 살로 된 그 몸으로 자연 환경을 읽어 온 이들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의 ‘몸의 경험’을 읽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에 나는 그들의 몸이 몸 밖의 물질(자연)과 맺어온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해 나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몸은 매우 다종적인 얽힘이 만들어지는 곳이자 결과이며, 이때의 ‘몸’은 인간 몸 뿐 아니라 비인간 자연의 몸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어야 함을 알게 된다.
해녀들과 그들의 주 수입원인 소라나 해삼, 멍게와 같은 동물들의 습성에 대해 대화하다 보면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문어, 불가사리, 게, 돌고래, 바다거북, 상어 등등 내가 이전엔 전혀 예상치 못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곤 했다. 재밌는 점은 이와 같은 언급 과정에서 해녀들이 바다 생물들을 상대로 상당히 역동적인 감정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종패사업을 통해 기껏 뿌려 둔 전복을 불가사리가 전부 잡아먹어 버려 억울해한다거나, 문어가 요리저리 도망가 버려 얄미움에 화를 낸다거나, 돌고래 떼를 만나 두려워 떨다가도 그들의 영리함에 고마움을 느낀다거나 하는 등이 그것이다.
“옛날에는 불가사리도 전북, 들춰 놔두면 불가사리가 다 잡아 먹어버려. 전복도 그냥. 그것도 불가사리면 잡아오고, 문어 해서. 그것도 불가사리가 발 하나 틀어지면 그것이 또 생기는 거야 또.”
“그거(돌고래). 영역한(영악한) 동물이야 진짜. 그래. 아이고 진짜… 고맙다. 해. 경 우리가. 아이고 고맙다. 진짜, 사람 밑으로 떨어졌으면 우리는 죽을 건데… (중략) 아이고 참 영악한 동물이다 그러지. 사람 해치지 않아 그게.”
이와 같은 장면은 해녀에게 있어 바닷속 생물들이 단순한 경제적 대상물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비인간 주체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해녀와 비인간 생물들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공-생(sympoiesis)[3]의 관계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서로가 먹고 먹히는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양분, 더 나아가 퇴비가 되기도 하는 이러한 물질의 순환은 입과 항문이 연결되어 스스로의 배설물을 먹는 우로보로스(Ouroboros)를 연상시킨다(Haraway, 2016/2021). 해녀와 비인간 생물들의 몸은 이와 같은 얽힘 안에서, 몸으로서 연합되고, 또 ‘함께-되어(becoming-with)’(Haraway, 2016)가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몸들 간의 연합, 되기의 과정은 인간 몸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살아감에 있어 결코 독립된 개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페미니스트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개념으로, 그는 “지구 생명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Haraway, 2016/2021, 107쪽)는 말과 함께 위의 개념을 제시한다. 해당 저서의 한국어판을 번역한 최유미는 ‘sympoiesis’를 ‘공-산(共-産)’이라 번역하는데, 나는 논문에서 이를 ‘공-생’이라 썼다. 생명들이 서로를 ‘함께 만들어 간다’는 내용에 있어서는 ‘낳는다’는 의미를 가진 ‘산(産)’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으나, 공동으로 생산한다(公産)는 것과 함께 공동으로 살아간다(共生)는 의미를 좀 더 직관적으로 포괄하기 위해 ‘공-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연보(2022)는 이에 대해 ‘sympoiesis’가 근대적 생산, 제작 개념을 넘어 스스로를 함께 변화시키면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사유를 포함하기 때문에 ‘공동생성’이라는 번역어가 더 알맞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공동생성’이라는 번역어는 해당 용어의 뿌리인 진화론자 마굴리스의 공생발생(symbiogenesis)와 공생(symbiosis)의 개념과도 더 잘 맞붙는다.
한편 생태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 스테이시 앨러이모(Alaimo, 2016/2020)는 인간의 몸이 세계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그 몸을 횡단하는 자연 물질들로 인해 “변신”(42쪽)하고, “몸에 역사를 기록”(42쪽)한다고 쓴다. 그의 책에는 호크스네스트 터널에서 일하며 화학물질에 의해 몸의 변형을 겪은 노동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몸이 점차 자신이 일하는 바로 그 터널의 바위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다소 소설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와 같은 장면은 자연이 물질로서 인간을 통과하며 남긴 흔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례로 사용된다.
나는 인터뷰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뿐만 아니라 잠을 잘 때마저도 무의식적으로 바닷속에서와 같이 숨 조절을 한다는 것이다. 호흡 보조 장비 없이 잠수하는 해녀들이 물 속에서 쉬는 숨을 ‘물숨’이라 한다. 해녀들은 언제나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 이 물숨을 잘 조절하기 위해 유의한다. 이는 바닷속이라는 자연 환경에 맞추어 자신의 신체를 조절하는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들이 물 밖에서 의식적이지 않은 순간에도 바닷속에서와 같이 숨을 쉬기도 한다는 사실은, 비인간 환경이 몸을 통과하며 그들 몸에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물 밖에서 쉬는 ‘숨’은 이들 몸이 비인간 환경과 마주하고 연합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변신’을 이루었다[4]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의 몸이 이미 ‘함께-되기’로서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앨러이모의 책에 등장하는 호크스네스트 터널 피해자들의 변형된 몸은 ‘아픈 몸’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나타난 해녀의 몸은 아픈 몸보다는 변신을 이룬 몸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이와 같이 환경에 대응하여 변신한 해녀의 몸은 거미불가사리(Brittlestar)의 몸이 바다와 함께 되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거미불가사리는 눈도 뇌도 없는 생물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그들의 전체 골격 자체가 눈으로서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음이 밝혀졌다. 거미불가사리는 몸을 움직임으로써 세계를 읽고, 동시에 그에 맞춰 자기를 환경에 맞게 변화시킨다. 이는 ‘몸’과 그 기능이 특정한 경계를 갖고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역동적 행위 내에서 그 자체로 “세계의 일부가 되어가”(Barad, 2007, pp. 377)는 것임을 보여준다. 버라드는 이러한 거미불가사리의 신체를 예시로 들어,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물질적 실천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세계의 물질적 형성에 함께 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한다(박신현, 2022). 해녀들 또한 바닷속에서 숨을 참을 때, 거센 파도가 이리저리 밀려올 때, 예측할 수 없었던 생물을 마주쳤을 때, 언제나 몸으로서 앎을 축적해 왔다. 해녀들은 거미불가사리와 같이, 언제나 몸을 통하여 바다와의 연합에 참여해왔고, 또 그 존재를 구성해 왔던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침묵되는 몸
그렇다면 이와 같이 ‘변신’한 몸, 역사를 기록하며 환경과 연합해 온 몸의 경험은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가? 이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몸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이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5]. 누군가의 몸의 경험은 쉽게 발화되지만, 어떤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안다. 불평등하게 만들어져 있는 사회에서 몸의 경험은 불평등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5] 몸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는 앨러이모에게 있어 ‘몸’은 자연과 문화 모두를 연결시키는 장이다(Alaimo, 2010/2018). 그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iality)’ 개념을 통해 이를 역설하는데, 몸은 언제나 그가 속한 장소(site)에서 수많은 ‘접촉면(interface)’들을 만들어낸다. 이 절에서 나는 몸이 속한 ‘사회적’ 장소에 주목한다.
해녀들의 경험이 그러했다. 그들이 몸으로서 가진 경험과 지식은 ‘바다’라는 공간에서 몸을 통해 갖게 되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6]’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부분적이고 위치적이며 몸과 함께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지식의 특성은 근대 과학에 쉬이 반영되지 않는다. 마을의 해녀들은 해군기지 건설 이후 힘이 없어 떨어진 소라나 바싹 말라 작아진 전복 등을 관에 제출하였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이때 소라나 전복은 단편적인 예시로, 사실 이들이 느낀 바다의 변화는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다. 과거의 제주 바다를 회상하는 해녀들은 어린 시절 본 바다에는 톳, 모자반, 미역과 같은 해조류들이 아주 풍부했지만, 지금은 바다가 ‘백바당(白바다)’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이들의 경험은 구술자가 했던 말마따나 “차츰차츰” 일어난, ‘느린 폭력(Nixon, 2011/2020)[7]’의 결과였다. 이와 같은 폭력은 형태가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인 폭력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결국 “희생은 침묵되며 주변화”(오은정, 2020, 362쪽)된다.
[6] 해러웨이(Haraway, 1991/2001)의 개념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신화화된 과학적 지식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고안되어, 모든 지식적 주장은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상황적 지식에서는 “부분적이고, 위치에 기반하며, 몸과 분리되지 않는 지식들”(정연보, 68쪽)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하게 되는 경험과 그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은 다른 노동자들, 혹은 보편적인 지식체계와는 다르며 그 자체로 충분히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7] 닉슨이 말하는 느린 폭력이란 비가시적이지만 시간에 따라 증폭, 축적되며 그 영향력이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것으로, 즉각적이고 폭발적이며 극적인 일반적인 ‘폭력’과는 다른 유형의 것을 의미한다. 그가 느린 폭력의 예시로 드는 것은 독성물질에 의한 오염, 피폭, 온실가스, 해양산성화, 기후변화 등으로 이는 모두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환경 문제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시간적 스케일에서는 인식 범주 바깥에 속하지만, 그것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몸들에는 분명한 변형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강요된 침묵은 해녀들이 자신의 몸적 경험뿐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되는 정동(affect)[8] 또한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다. 바다의 변화와 관련한 구술생애를 수집하며 나는 해녀들이 글로는 다 쓸 수 없는 특정한 몸짓들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한다. 느린 말투, 침울한 표정, 말줄임 등이 그것이다. 이때 해녀들이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구체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을 꺼리며 몸적 언어로만 표현하는 데에는, ‘해녀’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이들의 복잡한 심경이 또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8] 여기서 내가 이들이 드러내는 것을 ‘감정(emotion)’이 아니라 ‘정동’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이유는 이들이 구술 과정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무엇이라 언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과 정동을 구분하는 브라이언 마수미(Massumi, 2015/2018)는, ‘감정(emotion)’이 사회문화적인 의미관계망에서 해석된 ‘느낌’이라면, ‘정동’이란 이 전에 일어나는,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신체의 느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정동은 신체와 신체 사이를 순환하며 외부를 변용시키고 또 변용되는 힘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동은 ‘운동’으로서 잠재적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은, 미결정적이고 역동적인 신체의 힘이자 에너지고, 문화의 회로에 포착되기 이전 몸 자체에서 발생하는 순간의 것을 의미한다.
제주 해녀들이 가정 내 경제 주체였다는 사실, 그들 노동이 결과적으로 가족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어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바다에 가는 것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경제 주체가 되어 그에 책임감을 가져야 했던 것은 선택이라기보단 제주 여성에게 강요된 역할[9]의 결과이기도 했다. 해녀들은 종종 물질을 하며 자신의 허리가 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하였는데, 나는 이로부터 해녀들이 자신에게 주어졌던 노동과 경제부양자로서의 짐, 그로 인한 슬픔과 한탄이라는 정동을 자신의 몸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제주 해녀들이 몸으로서 체화한 몸적 지식, 바다와의 되기 과정에서 일어난 몸의 변형(변신)은 비인간 자연과의 만남에서 일어난 물질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들 몸이 처해있던 사회적 상황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9]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제주 해녀들의 노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인류학자 조혜정(1988)은 제주의 해녀를 주체적인 경제주체로 보아 해녀들의 사회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 균형을 이루는, ‘양편비우세 사회(neither-dominance)’라 보았다. 반면 권귀숙(1996)은 제주 해녀들의 노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 자체가 여성억압적이며, 실제 제주 해녀들의 노동은 여성의 근면함과 희생, 생활력 등을 본질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여성에게 ‘부과되어 온 것’일 뿐, 제주 해녀들의 가정 및 사회에서의 지위가 남성만큼 높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실제 해녀들을 만난 나는 이 두 해석이 모두 일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녀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은 마을 인근 해역 개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마을의 해녀들을 가리키는 주변인들의 묘사를 통해서 더 두드러진다. 그들은 해녀들을 ‘법도 없는’ ‘무대뽀’의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해녀들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자취를 감추는 해초에 대해 진술하고, 해군기지 건설 이후 죽은 전복 껍데기를 증거 자료로 제출하였지만 받아들여진 적 없는 데에는 이들을 향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상황 아래에서 해녀들은 바다의 변화 앞에서 느낀 자신들의 정동을 집합화 하지 못했으며, 이들이 삶과 함께 되어온 몸적 경험, 그로부터 촉발되는 정동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나가며
제주에서의 여름 언젠가, 깊은 밤중 한라산을 지난 적이 있다. 어둠 속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그 가운데서 풀 뜯는 말, 땅속부터 축축하게 올라오는 여름의 습기. 그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문득 나는,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뚫어 헤집고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마치 무엇인가가 내 몸을 훑는 것만 같은 감각으로 이어졌고, 생소하고 이상한 만큼, 가슴이 무척 아팠다. 산이 나 같고, 내가 산인 것만 같은 느낌. 나는 여전히 그 날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내 몸에 남아 그 이후 차를 타고 제주를 누비는 게 이전만큼 편하지가 않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 비인간 자연과 함께하며 변신하는 몸, 그 가운데 생성되는 정동, 그 중 말해지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며 ‘몸’을 지워버리는 것. 나는 연구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보고 싶었다. 해녀들이 목격하고 경험한 바다의 변화, 몸에 축적한 것들은 단순히 그들의 세계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다양한 비인간 생명들과 공-생 해가는 만큼, 우리들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가 논문의 제목에 사용한 ‘몸된 자연’, ‘몸된 바다’와 같은 표현은 비단 해녀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나 또한 이제는 경험적으로 안다. 해녀들이 자신과 가장 가까이 맞붙은 자연이자 비인간 물질인 바다와 ‘함께-되어’갔다면, 다른 곳에 사는 우리의 몸은 무엇과 ‘함께-되어’ 가고 있는가. 그들의 몸과 우리의 몸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모든 과정에서 또 어떠한 것들이 다시 미끄러지는가. 우리가 함께 이러한 질문을 다시금 던질 수 있다면,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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