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청년페미니스트 세대의 연구자 되기와 여성주의적 지식생산

☁️ 미현

올해 한국여성학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6월15일 성공회대학교에서 개최된 춘계학술대회 <한국여성학 40+ 연대와 확장: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는 “Back to the Future: 여성학의 계보와 미래” 기조세션이 마련되었다. 아래의 글은 그 세션에서 발표된 동일한 제목의 발제문을 편집 및 축약한 것이다. 

1.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의 여성청년들의 페미니스트/연구자 되기

한국여성학회의 창립 40주년을 맞는 올해는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천명된지 10년차를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손희정, 2015). 페미니즘 리부트는 여성학의 위기와 포스트 페미니즘에 잠식된 여성운동의 침체기에서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페미니즘 지식의 유통에서도 새로운 양상을 띄었는데, 새로운 이들은 주로 메갈리아나 소셜미디어와 같은 온라인 담론장에서 페미니즘의 언어를 접했고 의제를 확산했다. Fwd의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페미니즘을 접한 청년세대로서, 페미니즘 대중화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청년페미니스트 세대에 속한다. 오혜민(2024)는 여성청년페미니스트들이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 등의 사회적 사건과 삶에서 성별불평등을 마주하며 인식론적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데, Fwd의 많은 구성원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Fwd로 모이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궤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다만 기존에 대학원을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거나, 혹은 대중 강의나 대중의 장에서의 언어를 익히는 것에서 더 나아간 무언가를 희망하였거나, 학계에 들어온 후 페미니스트로서의 ‘전환’을 맞이하고 동료를 찾아 나서며 제도화된 학계의 발을 딛게 된 것이다. 

2. ‘학술지와 에세이 사이’에서 온라인 공론장을 향한 말걸기 

2019년 Fwd가 창간될 당시 ‘넷페미’들의 논의는 이른바 ‘(한국형) 래디컬 페미니즘’과  ‘교차페미’로 양분되어 대립하고 있었다. ‘생물학적 여성’의 이슈만을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급진(radical)’의 자리를 선점했고, 교차성(intersetionality)은 페미니즘의 논의를 확장시키거나, ‘여성’이 드러나진 않는 여성주의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으로 일축되었다. ‘쓰까’라는 당시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아닌 이들에 대한 멸칭은 교차성이 단순히 여러 의제를 뒤섞는 것으로 독해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성학의 언어는 몰역사적으로 해석되었고, 성별화된 역할과 상징 등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젠더는(Scott, 1988), 일각에선 여성의 실재를 부인하기 위한 장치라고 비난받았기도 했다. 일부 넷페미들은 사실상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의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고, “선배없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박은하, 2017)

다른 한편에서는 ‘백래시’에 대한 위기감이 부상했다. 미투운동, 혜화역 불법촬영 반대 시위, 낙태죄 폐지운동이 한창이었지만 총여학생회 폐지를 시작으로 페미니즘의 ‘과격성’과 ‘남성혐오’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gender equality(성평등)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왜곡하여 ‘페미니즘’이 아닌 ‘이퀄리즘(equalism)’이 최신의 정확한 용어라는 가짜뉴스를 설파한 나무위키에서의 ‘이퀄리즘’ 논쟁이나, 마찬가지로 서구의 여성학자들을 오용하여 ‘한국 페미니즘’을 비난한 오세라비의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와 같은 저서는 대중에서의 여성학적 지식의 단절을 배경삼아 다른 방식으로 여성주의 지식을 오염시켰던 당시의 양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페미니즘 대중화를 거치며 넷페미의 정체성을 일정 부분 지니고 있었지만, 제도권에서 학문의 계보를 익히고 이어나가고 있었던 Fwd의 초기 멤버들이 온라인 페미니즘에 대한 말걸기를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이들의 정체성은 학문의 필드 내에서 계속해서 변화하게 되었다. 일례로 ‘트위터 페미니스트’에 가까웠던 한 필진은 여성학과에 진학한 이후 트위터 페미니즘과 대학에서의 언어의 간극에서 지적 혼란의 시기를 보낸 후 ‘래디컬 대 쓰까’라는 대립이 실상 온라인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페미니즘 논쟁의 대립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음을 깨닫기도 했다. 여성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것은 기존의 ‘사실’ 혹은 ‘진실’의 구성성과 기획성을 인지하고 그 안에 내포된 복잡한 결들을 배우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트위터의 140자로 설명되는 넷페미의 논의와 단순한 구도와 논리를 비판하거나 더 깊이있게 보기를 열망할 수밖에 없었다.   

Fwd의 슬로건 중 하나인 ‘학술지와 에세이 사이’는 제도권 밖에서 페미니스트가 되었지만 제도권의 연구자로 성장하고 있던 이들의 경계에 있는 위치를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이 슬로건은 실상 소셜미디어에서 각 계정주의 거주지역을 표시하는 칸에 삽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소셜미디어의 문법에 맞추기 위한 장치가 동시에 웹진의 위치성과 정체성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은 스스로가 습득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학문적 정합성을 갖출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하되,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에세이에 가깝게 웹진의 형태로 말하기를 원했던 열망을 담고 있다. 

3. 페미니스트 연구자 되기와 Fwd의 곤경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과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유사한 자질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메드(Ahmed, 2017)가 말했듯이 페미니스트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세상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불행을 자초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착한’ 여성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분위기를 깨는 사람, 이방인, ‘미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학부과정까지의 자신이 배웠던 지식이 여전히 경합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립한 논리, 서사,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텍스트를 읽어나가고 현장을 마주하는 것이다.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연구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언어를 찾아 자신의 고집을 아집으로 남기지 않고 더 풍부한 언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혹은 자신의 분노와 불행을 해석하기 위해 연구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어떤 이들은 연구자가 되기를 선택한 후 자연스럽게(?) 여성과 젠더를 연구분야로 삼으며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험해보고 나니, 학계에서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되는 것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과정이라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석사과정 당시 주변의 석사과정생들과 언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언어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토로하곤 했다. 참고문헌이 많아지고 언어와 담론의 힘을 접할수록 말과 활자의 날카로움을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개념을 빌려 쓰거나 빗대어 설명할 때마다 스스로를 한번 더 점검하게 되고, 글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더욱이 과중해진다. 석사과정생이 페미니스트 연구자로서 겪는 또 다른 혼란은 여성주의 인식론과 성찰성의 복잡함이다. ‘제2의 성’의 위치를 자각함으로서 알을 깨고 나왔다는 깨달음의 감각은, 모든 여성은 동질적이지 않으며, 젠더가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인종·민족·계층과 같은 다른 범주들과 복잡하게 얽혀 경합을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복잡성을 마주하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물론 ‘연구 웹진’이라는 표명 하에 긴 글을 디지털 공간에 발행하는 것은 사실 오늘날 디지털 풍토에 적합하지는 않다. 오늘날 대부분의 활자화된 디지털 컨텐츠는 모바일 환경에서 몇 번의 스크롤링으로 소화되며, 대부분의 컨텐츠들은 이에 맞게 짧고 간결한 글과 많은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다. 최근 뉴닉(Newneek)과 같은 뉴스레터 부상은 지식이 더욱더 잘게 쪼개지고 다듬어져 쉽게 소비가 가능한 정보로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어떤 지식이든 짧고 한입에 넣을 수 있어야 ‘팔리는’ 시대에 길고 구구절절한 웹진을 통한 여성주의 지식의 전달은 여성주의적 지식 생산을 위한 유의미한 공론장에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그러나 지식의 습득은 낯설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안티페미니즘이 반지성주의를 자양분 삼아 확산된다면, 페미니즘은 더욱이 비판적 사고와 이론, 논리적 사고를 갖출 필요가 있다(엄혜진, 2019). 단순히 페미니스트 정체성과 기표들을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김현미, 2021)’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길고 지루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4. 학계의 경계에 선 페미니즘 지식생산 공동체의 필요성

최근 Fwd에서는 같이 읽을만한 석사학위 논문을 찾아 필자를 섭외하고 웹진의 형태에 맞게 내용의 일부 혹은 연구 후기 등을 싣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 또한 학계의 경계에서 여성연구와 페미니즘의 언어를 대중화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여성학회에서는 석사학위 혹은 석사과정생들의 발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사실 학문 제도권 내에서는 석사학위 논문의 학술적 가치가 승인되지 않기도 하고, 구성원들의 궤적을 돌아봤을 때에도 매우 거칠고 미흡한 논의들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석사학위논문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로서 첫발을 뗀 이들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삶이나 관심사와 가장 밀접한 것들 짚어내며 새로운 현상이나, 장면들을 포착하기도 한다. 

여성주의적 지식은 기존의 실증주의적인 학문 풍토 속에서 전문성을 의심받아왔고, 여성학은 독립된 학문분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군분투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라는 틀 속에서 여성학 및 여성/젠더 연구가 지속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학의 의의는 실천학문으로서 대중, 운동, 문화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조순경, 2000). Fwd와 같은 미완의 연구활동가들의 온라인을 통한 말걸기의 의의는 학계의 경계에서 학계 안팎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해나간다는 점에 있을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 이와 같은 경계에 선 연구집단은 공동체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Fwd는 페미니스트 연구자에서 이주 연구자, 문화 연구자, 지역 연구자로 각자의 영역이 되어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이며 연구자이지만 여성학 연구자라고 말하는 것을 망설이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Fwd는 구성원들이 기획과 스터디를 통해 페미니스트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토대이다.


참고 문헌

  • Ahmed, Sara(2017), Living a Feminist Life,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 Scott, Joan(1988), “Gender : A Useful Category of Historical Analysis”,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 박은하(2017), “넷페미의 현재와 미래, 그 가능성을 찾아서”,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 손희정(2015), “페미니즘 리부트”, 『문화과학』, 84, 14-47쪽.
  • 오혜민(2024), “포스트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의 부상과 인식론적 취약성”,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조순경(2000), “한국 여성학 지식의 사회적 형성 (지적 식민성 논의를 넘어서)”, 『경제와사회』, 45, 172-197쪽.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