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
1. 영화를 ‘영업’하기
7월 10일,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상황이 나빠졌다. 개봉 2-3주 차가 되었을 때 상영관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글이든 써서 이 영화가 얼마나 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특히 우리-페미니스트, 퀴어, 인권쟁이, 소수자, ‘정신병자’, 여성, 아무튼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이름들-‘친구들’이 이 영화를 얼마만큼이나 좋아할지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 솟았다. 더 많은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입소문을 타며 상영관이 갑자기 늘어나고, GV가 열리고, 더 많은 굿즈가 기획 및 판매되고, 더 많은 밈(meme)과 농담 거리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더 많은 N차 관람 인증이 SNS를 휩쓸고, 종래에는 이 영화의 감독인 로즈 글래스의 전작인 〈세인트 모드〉(2019)가 (셀린 시아마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 정식 개봉을 하게 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내한을 오게 되고, 그런 상상 속에서 짐짓 흐뭇해지며 넉넉한 마감 기한까지 글쓰기를 어영부영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원래부터 별로 없던 상영관은 서울만 해도 하루 두세 관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개봉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8월 8일, VOD 서비스가 시작됐다. 많이들 영화관에서 더 보게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글을 쓰려 했던 건데, 쓰려던 목적이 사라진 것만 같은 이 허망한 마음은 어찌해야 하나? 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을 동원했는지, 즉 영화가 얼마나 흥행했는지에는 물론 수많은 요소들이 개입한다. 관객 수가 영화의 완성도나 작품성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란 사실을 이 지면에서 더 설명하는 일은 알 거 다 아는 ‘우리’ 사이에 완전한 시간낭비다. 그래도 올해 열린 제28회 부천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요새 가장 ‘폼 좋’다는 A24 제작에, ‘친구들’이 그토록 부르짖던(난 아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레즈’ 영화라는데, 한달동안 2만명밖에 안 봤다고?(이 글이 나갈 즈음엔 3만명이 넘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두번씩 포털사이트나 트위터에 ‘러브라이즈블리딩’, ‘러라블’, ‘럽라블’을 번갈아가며 검색하면 분명 내가 기대했던 만족스러울 만큼 웃긴 농담들이 있고(대표적으로, “부치는 그걸 해”), 김혜리 기자나 손희정 평론가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의 해석이 있지만(이거 말고 더 볼 게 남아 있다면 제발 알려주길 바란다), 최근 불었던 〈헤어질 결심〉 ‘붐’을 돌이켜보면, 못내 심술이나 질투 같은 유치한 감정이 배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지난날의 경험을 곱씹어보며, 이 ‘친구들’이 시시한 영업에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여성서사’나 ‘퀴어서사’ 같은 라벨이 붙으면 가리지 않고 다 보는 것 같지만(정말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다), 나를 포함해서 이 사람들은 생각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취향의 소비자다. 여성이나 퀴어 따위의 태그가 붙은 콘텐츠가 나오면 죄다 북마크를 해두고 즐겨찾기에 넣어두고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꼭 볼게, 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친구들이 결국은 안 보고는 못 배길 만큼 재밌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해야지. 그냥 재밌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점이 재밌는지, 왜 재밌는지. 이 영화가 왜 좋은 영화인지, 왜 훌륭한 영화인지, 그래서 왜 ‘친구들’이 보고 나랑 밤새 떠들어줬으면 좋겠는지 정성스럽게 설득해야지. 이번 글은 그런 취지에서 쓴 글이다.
2.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러브라이즈블리딩의 개요를 그려보면 이렇다. 이 영화는 시간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0년대 말, 공간적으로는 미국의, 멀지 않은 곳에 깊은 협곡을 두고 있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낯선 이들의 왕래가 잦지 않은 작고 폐쇄적인 동네를 무대로 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루(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네 체육관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주인공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루 시니어는 운영 중인 사격장을 거점으로 총기 (밀)거래 사업을 하며 경찰들마저 자기 부하로 거느리고 있는 지역 유권자이다. JJ는 루 시니어가 거느린 부하 중 하나이자 베스의 폭력적인 남편이다. 그리고 베스는, 지겹게 반복되는 가정폭력의 현장에서 그다지 도망칠 마음이 없는, 루의 언니이다. 루의 곁엔 상대하기 아주 귀찮고, 부담스럽게 곁을 맴돌고, 소름 끼치게 치근덕대는, 데이지도 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재키는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던 도중 루가 일하는 체육관을 거쳐가게 된다. 루와 재키는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초반까지 제공된 정보만 해도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해 예측하고 기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뉴멕시코의 황량한 접경지대, 총기, 약물과 같은 이미지는 브레이킹배드 같은 시리즈물이나 여타의 범죄, 느와르, 스릴러 등 장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협곡은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이,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나게 생겼는데, 주인공 아버지가 총기 밀거래하는 범죄 집단 수장이라고 하니 이 공간엔 주인공 아버지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시체 몇 개가 떨어져 있을 테다. 주인공이 범죄 조직 수장의 딸이니 주인공에게도 뭔가 께름칙한 과거가 있을 것이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시대 영화답게 아버지에게 행할 복수가 어떻게든 다뤄질 것이다. 요컨대 영화 전반에서 긴장감은 기존 장르물의 이미지들에 동시대 여성 영화들에게 기대되는 서사가 배합 되는 방식을 통해 생성된다.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가 잔인하다는 평을 주변에서 들었을 때, 나는 훨씬 더 불쾌하고 저돌적인 방식의 이미지가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퀴어 영화는 <티탄>(2021)이었다). 특히 초반부터 계속해서 사용되는, 땀 흘리는 피부와 약물 주사로 인해 확장되는 혈관 등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 쇼트가 강렬한 감각적 자극을 제공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살인 장면에서도 훨씬 더 파괴적인 묘사가 활용되리라 예상했다(게다가 이 영화의 제목에 피가 들어있다). 그런 예상이 영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체까지는 빗나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놓고 봤을 때도, 빗나가는 시선과 침묵을 통해 긴장감을 전달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나 〈캐롤〉과는 대비되는 방식을 취한다. 주로 인물들을 가운데 놓고 프레임 밖으로 최대한 벗어나지 않게 상대적으로 긴 테이크를 취하여 긴장감을 형성하는 〈불초상〉과 반대로 이 영화는 하나의 인물이 담겨있는 프레임에 다른 인물이 침입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확실히 이 영화는 웃긴 영화라는 점이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귀엽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종국에 가부장을 처단하는 영화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성실하게 이끌어온 긴장감의 목적지는 아니다. 물론 아버지에게 보복하는 장면에서 제시된 여성-거인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해방적인 것은 고무장갑을 낀 채 변기를 막은 오물을 치우는 것 만큼이나 인생이 비참한 와중에, 손 쓸 수 없다고 여겨질 만큼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와중에, 그래서 결국에는 많은 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긴장과 불안이 최고조로 오른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힘에서 온다. 전환되는 장면에서 도로를 달리는 주인공 커플 뒤로 데이지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릴 때, 루가 결국 자기 손으로 데이지를 죽이는 와중에 끊으려던 담배를 데이지 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고민에 빠질 때, 단잠에 빠진 재키 뒤로 아웃포커싱된 루가 낑낑대며 데이지의 시체를 옮길 때 폭소하지 않기란 어렵다. 따라서 이 해방적인 유머감각은 웃기려는 혹은 웃어야 한다는 의지나 정신력에서 오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발산된 후 낙하한 직후의 바로 그 지점,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바로 그 상황에서 긴장감이 풀리며 밀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것을 우습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 영화는 충분히 웃기다. 엔딩을 포함하여 루와 재키가 처음 체육관에서 만나 스테로이드를 주사하고 섹스하기 직전 남자 좋아하는데 재미로 이러는 거 아니냐고 묻는 루의 대사나, 애인이 다른 여자와 바람핀 현장을 목격하고 바람난 상대를 죽인 후 가출한 집에다 전화를 걸어 의붓 동생에게 너는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는 재키의 대사나, 실컷 총 겨누다가 눈물겨운 포옹을 하고야 마는 상황속에서 “인생은 멀리서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a long shot.)라는 격언이 결국 영화의 언어로 실행되고야 만다.
3. ‘#퀴어’ 만들기
영화를 보고 난 후, 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퀴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퀴어 영화가 아닌 것을 퀴어 영화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퀴어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퀴어 영화라고 부르는 건 결국 퀴어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방증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퀴어’라는 말이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퀴어를 퀴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퀴어 이론 구사자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한편으로 주인공의 퀴어 섹슈얼리티에 대해 주변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이(즉, 별로 안 퀴어한 것이) 이 영화가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공이 퀴어라서이기보다는~’ 또는 ‘퀴어 영화라기보다는~’과 같은 말들로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을 묘사할 순 없다. 퀴어 관객들, 즉 ‘친구들’에게 즉각적으로 염증을 불러일으킬 그런 말들로 이 영화를 영업할 순 없기 때문이다. 약물이나 중독, 보디빌딩(신체) 같은 기호들이 어쩐지 퀴어 이론과 결합하면 꽤 괜찮은 모양새를 한 퀴어 비평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지만, 그런 글을 쓰는 건 내가 별로 재밌지 않을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이 영화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다가 웃긴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러브라이즈블리딩이 〈아가씨〉(2016)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뒤를 이을 여성 퀴어 영화라는 기대감을 담은 기사들이었다. 영화사적으로 아무 연관과 아무 참조점이 없는 세 영화를 어떻게 한 줄 안에 담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특히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이 영화는 거의 정반대 급부에 놓여 있는 영화 아니었던가? 한편으로 나는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이 세 영화들이 하나의 문장에 나열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건 바로 나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많은 여성 퀴어 씨네필들(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이 그러하듯 아가씨는 내가 처음으로 n차를 찍은 영화였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Fwd에 내가 처음으로 쓴 글 소재였다(글 보기).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영화들에 ‘#퀴어(서사)’나 ‘#여성(서사)’을 태그하는 행위는 서로 다른 이들의 타임라인을 침범하며 이상한(queer) 영화 ‘족보’를 만든다. ‘계보’라고 부르면 너무 비장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이 족보는 느슨하면서 종종 엄격하거나 진지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현장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이상한 족보를 만드는 친구들과 이 영화가 재밌는 이유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많다는 확신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