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

편집자 주: 2편에서 이어집니다.
1.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운동’이 만들어낸 풍경들
동덕여대 공학 전환 철회 시위는 대학 사회 위기론이 새삼스러워진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학생 자치의 풍경들을 만들어냈다. 동덕여대 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의 여대와 대학 사회로 확산한 동덕여대의 투쟁은 어디에 위치 지을 수 있을까? 비민주적 대학 행정에 맞선 학원민주화투쟁의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도, 2020년대의 대학 내 여성운동의 맥락에서 ‘여학생 운동’으로 혹은 ‘여대 운동’으로 의미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학 전환 반대 운동의 확산 속에서 이어진 여대 학생회들의 빠른 지지는 11월 15일 동덕여대 학생자치기구 연합체인 ‘총력대응위원회’(이하 ‘총대위’)의 성명문에 대한 7개 여자대학(덕성여대, 배화여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숭의여대, 한양여대) 학생회 200여 단위의 연서명으로도 드러났다. 연서명 명단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광주여대 총학생회와 경인여대 총학생회, 수원여대의 학생회 연합도 일찍이 연대 성명문을 발표했다. 전국 각지의 공학 대학 에브리타임에서도 동덕여대를 지지하는 여학생 모임의 연대 성명문이 올라왔다. 동덕여대 시위를 계기로 11월 12일 공학 여대생 연대 모임 ‘들불’이 발족하기도 했다. 수도권 대학과 지역 대학,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을 가리지 않고 ‘범여자대학연대’ 또는 ‘범여학생연대’라고 해도 좋을 학생 사회의 연대가 이어졌다. 과잠(학과 잠바) 시위가 시작된 이후 동덕여대 본관 앞에는 동덕여대 학생들이 벗어놓고 간 과잠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학의 학생들이 연대의 의미로 보내온 과잠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중에는 다른 여대들과 다양한 공학 대학에서 온 과잠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시위가 여대를 넘어 전국 각지의 공학 대학의 여학우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 것은 대학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페미니스트를 향한 낙인과 공격이 동덕여대 시위에 대한 폄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학 대학 남학생들의 동덕여대 시위에 대한 조롱은 여성혐오가 만연한 학내 익명 커뮤니티에 질려 있던 여학우들로 하여금 동덕여대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게 했다.
한편으로 동덕여대 시위에 대한 반응은 혐오와 조롱에 그치지 않고 대학 사회 내 자치 활동에 대한 검열이라는 반동으로도 나타났다. 11월 16일에는 상명대 여학우 일동의 이름으로 게재된 여자대학 존립 연대성명서가 상명대 서울캠 중앙운영위원회에 의해 철회되었다. 상명대의 전신이었던 상명여대의 여성 해방 정신을 잊지 않고, 여자대학의 존립과 모든 대학 여성 학우들의 부당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연대한다는 내용의 여학우 성명서를 멋대로 철회한 중운위의 입장은 동덕여대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견도 표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1월 26일 단대신문에 게재된 편집장의 글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은”은 학교 이름으로 발간하는 신문에서 동덕여대를 옹호하지 말라는 댓글 테러를 당한 끝에, 다음날 “관리자 검토 중인 기사”라는 팝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내려갔다(기사 보기).
동덕여대 시위의 의미를 묻는 단대신문 기사가 검열되어 내려갔을 때, 대학가에서는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었다. 11월 25일 서울 성북구의 고려대 캠퍼스에서는 “침묵을 깨고, 함께 외칩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는 “시끄러운 세상 속, 대학가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 “고려대학교에서 먼저 침묵을 끝냅시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맺음 된다. 그러나 동덕여대를 비롯한 여대들이 여대 존립을 외치고 대학 내 반성폭력을 말해온 것, 학내 민주주의를 외쳐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가? 동덕여대와 고려대가 지하철 6호선으로 불과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이웃 학교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대학가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고 진단하는 시국 선언문의 문구야말로 기이하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성북구에 위치한 학교인 성신여대와 수많은 여대 자치기구들, 개인 서명으로 35만 명 이상의 시민이 함께한 연대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일까?
언론이 학측에서 말하는 ‘락카칠 손해배상 54억 원’, ‘폭력시위’ 등을 그대로 받아 적고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여론이 동덕여대 시위를 고립시켰음에도,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위는 대학가와 한국 사회 전반에 다양한 논쟁과 반향을 일으켰다. 고소 고발로 학생 시위를 억압한 동덕여대 본부와는 달리, 학생을 고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학생들과 충분히 소통함으로써 사태를 원만하게 끝맺은 광주여대의 훌륭한 선례도 남았다. 총학생회 및 시위 참여 학생들과의 면담을 통해 공학으로 전환하지 않겠다고 약속, 학생 의견을 수렴하여 갈등을 해소한 것이다. 광주여대는 학생들이 시위를 통해 제기한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외국인 남학생 및 성인 학습자 대상의 성폭력 교육과 학내 불법 카메라 점검 강화 등을 약속하며 교육기관이 소통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위를 마친 광주여대 공학 전환 반대 시위팀 ‘파동’이 동덕여대 학우들에게 연대의 편지를 보내온 12월 3일, 동덕여대 학생들은 광주여대의 시위 종료를 축하하며 동덕여대가 광주여대를 본받아 학생들과의 소통에 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3일 10시 23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포고령에 의해 정치적 결사와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 활동 금지될 수 있었던 일촉즉발의 밤에 동덕여대 본관에서는 학생들이 23일째 본관을 점거 중이었다. 다행히 계엄령은 여섯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안전을 위해 잠시 본관 점거를 해제했던 학생들은 이튿날 서류와 본체를 들고 나르는 교직원들, 그리고 학생들의 본관 재점거를 막기 위해 ‘집회 및 시위에 관련 법률’을 들먹이는 출입 금지 공지문, 일명 ‘총장령’과 마주해야 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대통령 탄핵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했다. 대학가에서도 비상계엄 선포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시국선언과 학생총회가 줄을 이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동덕여대의 학생총회도 다시 주목받았다. 지난 동덕여대 학생총회는 전체 재학생 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천 명 가까운 학생이 결집하여, 공학 전환 안건에 대해 99.9%에 이르는 반대 의사를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남초 커뮤니티 등 일각에서는 공개 거수투표 방식과 압도적인 투표율 등을 ‘빨갱이’, ‘공산당’과 같은 말로 폄훼하며 동덕여대 학생총회를 조롱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동덕여대 학생총회에 대한 이러한 시비는 대학 사회 탈정치화로 인한 학생 자치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덕여대 학생들에 대한 의도적인 흠집 내기가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대학에서 시국선언을 위한 학생총회가 이어지면서, 학생 자치의 최고 의결 기구로서 학생총회의 의결 방식이 원칙적으로 거수투표라는 점이 점차 확인되었다. 대학가에 이어진 학생총회와 시국선언의 물결은, 비상계엄 이후 불과 이틀 만에 시국선언을 발표한 여대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주목을 이끌어내기도 했고(기사 보기), 각 대학의 학생총회 현황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18년 만에 성사된 연세대 학생총회와 정족수 미달로 재소집해야 했던 고려대 학생총회 또한 주목받았으며, 동덕여대의 학생총회 방식을 문제 삼았던 익명 커뮤니티 이용자들도 자신들의 시비가 억지 트집 잡기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로 난입하여 유리창을 깨고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시민들과 대치했던 계엄 상황은 동덕여대 시위에 부당하게 덧씌워졌던 ‘폭력’과 ‘무력’, ‘불법’의 프레임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했다. 이렇듯 비상계엄 이후 제기된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동덕여대의 투쟁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2. ‘민주 동덕’의 이름으로
지난 12월 3일의 비상계엄 이후, 한국 사회는 2016년에 이어 다시 한번 대통령 탄핵과 그 너머의 ‘다른 세상’을 향한 사회 개편의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민주적 가치와 평온한 일상에 대한 실질적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에 대한 더 많은 요구를 불러왔다.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비상계엄령은 대학 본부와의 가장 큰 협상 카드였던 본관 점거를 해제하게 만든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학측과 공학 전환 철회를 논의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탄핵 정국은 공학 전환 반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을 불러왔다. 대통령 탄핵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대학가에 줄을 잇는 시국선언에 많은 사회적 지지가 따랐다. 한편으로 동덕여대 학내 커뮤니티에서는 대학 본부와의 갈등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동덕여대 학생들 또한 시국선언에 자랑스럽게 동참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마음과, 탄핵 정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학내 민주주의에 대한 학우들의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공감 속에서, 12월 7일 동덕여대 학내에는 문예창작과 17학번 재학생의 개인 시국선언 대자보와 총학생회 및 중앙운영위원회의 시국선언 제안 대자보가 붙었다. 12월 9일에는 “민주동덕의 민주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21학번 국문학과 학생의 시국선언 제안이 올라왔다.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은 시국선언 제안은 이틀 후 12월 11일 동덕여대 백주년 기념관 앞에서 “동덕에서 피어난 우리, 마침내 세상을 바꾸리라”라는 제목의 1500 동덕인 시국선언으로 이어졌다. 12월 13일에는 총학생회 주도의 시국선언 “민주 동덕,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가 발표되었으며, 38개 대학교 총학생회가 모인 전국 대학 총학생회 공동행동에 동덕여대 총학생회 또한 동참할 수 있었다.
12월 11일은 동덕여대의 시위가 본격화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본관이 폐쇄되고 총학생회가 학교와의 법정 공방으로 발이 묶여 시위를 주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다시 자체적으로 조직한 시위가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오전 11시에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학생총회라는 이유로 2,000명의 공학 전환 반대 의사를 무시한 대학 본부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진행되었으며, 급하게 조직된 시위였음에도 학생총회 정족수에 해당하는 650여 명의 학우가 모였다. 오후 3시에는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과 학교의 학생 의견 묵살이라는 두 번의 민주주의 파괴를 목도한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국선언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시국선언문의 제목은 “민주 동덕, 학교에서 거리까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였다. 근조화환과 현수막을 다시 정리해서 내건 백주년 기념관 앞에서 동덕여대 학생들은 “분노가 두려움을 앞지른 지 오래다”, “내가 사랑하는 민주동덕, 내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그럼에도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시국선언 후에는 본관 앞에 놓인 과잠들에 방수포를 새로 덮는 작업과 떨어진 대자보를 다시 부착하는 보수 작업도 진행되었다. 저녁에는 ‘민주 동덕’의 깃발 아래 탄핵안 가결을 위한 여의도 앞 비상 행동 집회에 참여했다.
비상계엄령은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운동에도 하나의 큰 분기점이었다. 비상계엄령 해제 이튿날 바로 외부 경호업체를 추가 고용까지 해가며 본관을 폐쇄한 대학 본부의 의도는 학생 시위를 억압하는 것이었겠지만, 동덕여대 학생들은 ‘민주 동덕’이라는 이름으로 시국선언에 참여하고 탄핵 집회에 나아가,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목소리를 냈다. 12월 11일 여의도 집회에서는 ‘민주 동덕’의 깃발을 본 시민들이 “동덕여대 파이팅”을 연창했고, 동덕여대 학생들에 대한 응원의 의미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무반주로 불러주는 ‘사건’도 일어났다.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아가면서, 동덕여대 학생들은 적대적인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는 실감하기 어려웠던 구체적인 동료 시민들의 지지를 확인하였으며 다른 투쟁 주체들과의 조우 속에서 새로운 연대를 이루게 되었다.
12월 21일과 22일 사이,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의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서울로 오는 도중 남태령고개에서 경찰 공권력에 의해 길을 가로막히자, 시민들이 연대해 경찰의 무력 행동을 저지한 이른바 ‘남태령 대첩’은 동덕여대 투쟁에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날 밤샘 집회에 동덕여대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했으며, 현장의 자유발언에서는 반민주적 학측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가 이어졌다. 탄핵 집회를 단순히 대통령 탄핵에 대한 요구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연대의 장으로 거듭나게 했던 남태령 대첩 이후, 한 전농 회원이 소셜미디어에서 동덕여대 시위를 계엄령에 빗댄 게시물을 올렸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전농 입장문을 통한 공식적인 사과와 연대의 표명, 월간『전농』 교육자료에 동덕여대 투쟁에 대한 전농 회원 발언에 대한 반성을 싣는 후속 조치 이행으로 전농과 동덕여대가 형성한 연대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12월 25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진행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탈시설 장애인 이야기 마당 행사에 동덕여대 재학생들이 참여하면서, 동덕여대의 상황을 묻는 박경석 대표의 질문으로 전장연과 동덕여대 투쟁에 연대의 고리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동덕여대 본부가 학내 시위와 대자보 부착을 두고 “불법 집회”와 “불법 게시물”에 대해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이후, 12월 27일 동덕여대 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민주 없는 민주동덕’ 혜화 시위에 전장연 활동가들이 참여하면서, 전장연의 출근길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한 혜화라는 ‘진지(陣地)’에서 전장연과 동덕여대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25년 1월 2일 전장연의 신년 투쟁 안국역 다이인(Die-in) 행동 이후 동덕여대 혜화캠퍼스까지 이어진 행진과 ‘권리 스티커’ 무단 부착 행동은, “어떤 시위도 불법이 될 수 없다”는 구호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불법 시위’라는 프레임에 대한 저항을 통해 전장연과 동덕여대가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대의 배경에는 두 주체 모두 오세훈이나 이준석 등의 보수 정치인이 주도한, ‘불법 시위’와 ‘비문명’을 운운하는 혐오 선동이 만들어낸 적대적 여론에 의해 공격받았다는 교집합이 있었다.
많은 필자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동덕여대 시위는 대학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여러 논쟁을 촉발했다. ‘여자대학’의 사회적 의미와 지위의 문제, ‘락카칠’과 ‘과잠 시위’ 등의 시위 방식, 학생 대표체의 구성과 학생총회의 의결 방식 등 학생 자치의 문제, 3대 족벌 세습 운영 중인 동덕학원 비리 고발이 불러온 사학재단의 문제 등, 앞으로도 충분히 논의되고 분석되어야 하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이처럼 동덕여대의 투쟁은 많은 질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 공동체 모두의 몫일 것이다.
12.3 내란 시도와 탄핵 정국에서 다시 열린 ‘광장’과 시민사회 운동의 역동 속에서,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도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민주 동덕’의 깃발은 캠퍼스를 넘어서 여의도 광장으로, 남태령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혜화역으로,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로, A학교 성폭력 사안 해결을 위한 서울시교육청 집회로,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위한 목요문화제로, 다시 국회 앞으로 나아갔다. 동덕여대의 투쟁은 대학 본부의 공학으로의 전환 검토에 맞서 ‘여대 존립’을 외치며 시작되었지만, 비상계엄이라는 분기점 이후 때로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수많은 배움의 과정에서 ‘연대’와 ‘투쟁’의 의미 또한 새롭게 질문되고 답변되는 중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투쟁의 의미가 무엇이 될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열려 있는 이 싸움을 지켜봐달라고, 그리고 끝까지 함께해달라고 요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