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소녀 시절(Girlhood)을 살아낸다는 것

🍀싱두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2021; 2024).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서울: 갈라파고스. 표지 이미지

* 이 글에서의 소녀는 책의 저자인 멀리사 피보스이기도 하며, 그 시절을 애써 거쳐온 당신이기도 함을 알린다.

1. 몸

소녀의 몸이 소녀 자신의 몸이 아니게 된 시기에 소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몸의 변화는 특별한 예고 없이 찾아와 소녀의 시간을 흔들었다. 또래 소년들과 운동장에서 수월하게 공을 차던 몸은 어느 순간 그들의 뜀박질을 따라가기에 벅찬 몸이 됐다. 2차 성징을 겪으며 가슴이 갑작스레 커졌기 때문이다. 소녀는 축구하는 자신의 몸을 좋아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자신을 짓누르는 가슴의 무게를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벅찼을 때, 몸 바깥 타인의 시선이 그 변화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녀보다 먼저 반응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무거운 가슴에 대고 다른 소녀들은 부러움 혹은 시기 어린 시선을 보냈으며, 소년들은 께름칙하면서도 노골적인 성적 뉘앙스를 담은 눈빛을 쏘아댔다. 소녀는 그저 부끄러웠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음에도 그랬다. 영문 모를 수치심은 소녀가 자신의 몸을 더욱 보지 못하게 했다. 

“수치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립되도록 길들인다(122쪽).”

몸의 변화를 해석하는 데 타인의 응시는 소녀의 생각에 우선했다. 자신의 어른스러워진 몸을 찬탄하며 으슥한 곳에 데려가 키스하고, 몸 곳곳을 더듬던 소년과 남성들을 소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라고 가르쳤지만 이런 순간엔 의미가 없었다. 타인의 억지스러운 신체 접촉이 어떻게 싫은지, 그래서 싫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소녀는 차라리 어떤 호오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자신의 새로운 몸이 외부로부터 욕망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외부가 대개 욕망하는 형태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몸 부분, 이를테면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 과격하게 큰 손을 혐오했다. 욕망 되는 몸도, 욕망 되지 않는 몸도 모두 무서웠다. 욕망 되는 몸은 언제나 욕망하는 몸을 압도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내 몸을 만지게 내버려두었다. 마치 내 욕망과 그들의 욕망이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되면 반드시 공통의 보상이 뒤따를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 욕망은 막다른 길에 부딪혔고, 출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87쪽).”

수동과 능동을 오가는 욕망 사이에서 소녀는 갈팡질팡했다. 그런 소녀는 어느 날 ‘잡년(slut)’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걸레’라고도 했다. 남자들에게 쉽게 몸을 내어주는, 섹스에 미쳐있는, 조숙한 몸을 악의적으로 활용하여 어리숙한 소년들을 유혹하는. 그렇게 소녀는 잡년이 됐다. 잡년이라는 호칭은 소녀의 몸에 먼저 손을 뻗친 소년과 남자들은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된다”라는 것을 은밀히 전제했다. 동시에 소녀의 자연스러운 신체 발달에 피할 수 없는 죄악감을 덧붙였다. 그 자체로 죄인 몸. 그래서 미워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는 몸. 그럼에도 이 몸을 욕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의 존재와 관심 그 자체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잡년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 시기의 소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훅스는 이렇게 쓴다. “타인의 응시에 붙들리는 순간 실제 몸은 근원적 변화를 겪는다. 이제부터 이 몸은 타인의 흔적을 품는다. 이 몸은 타인을 위한 몸, 즉 대상이고, 사물이고, 벌거벗은 몸이 되었다.” 청소년이 또래의 생각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건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그 나이의 청소년이 타인에게 넘겨주는 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나를 좋아해줘가 아니라, 나를 이루어줘(85쪽).”

2. 어둠

“열세 살, 나는 내 몸과 이혼한 뒤였다. 서로를 미워하는 이혼한 부모와 마찬가지로, 몸과 나의 협력이 그저 의무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였다. 내게는 몸이 필요했고, 그 사실 때문에 몸을 더욱 혐오했다(148쪽).”

소녀는 자신의 몸, 타인의 시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계와 불화했다. 몸을 감싼 거대한 폭력의 소용돌이는 소녀의 마음속 어둠을 키웠다. 소녀는 그러나 이 어둠을 단순히 화해의 영역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답은 그렇게 하여 자라난 어둠 안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소녀에게는 이 어둠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히고설킨 어둠의 타래를 스스로 풀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깊은 자기혐오와 수치심을 치밀하게 읽어내고 다시 써 내려가야 했다. 본인 삶의 방향키를 잡은 선장은 결국 소녀 본인이었으므로.

그를 위해 소녀는 어둠에 고립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소녀의 것으로 확장하여 보기로 했다. 처음은 자신이 잡년이 된 경위를 되짚어보는 일이었다. 잡년이라는 호칭은 낙인이 되어 한 시절 내내 소녀를 옥죄였다. 옥죈다는 것은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날뛰지 못하게 통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무엇을 통제하고자 한 것일까? 그에 앞서, 그 통제의 기저에 놓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공포였다. 남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여성의 몸과 욕망에 대한 공포였다. 소녀 시절에 소녀들은 타인의 감정, 안위, 인식, 권력을 자신의 것보다 우선하는 법과 스스로의 행복과 자유,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 법을 동시에 배우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한 소녀는 집단적 규범의 바깥에 있기에 바로 그 집단의 경계를 위협한다고 여겨진다. 소녀의 조숙한 신체는 그 자체로 날뛰는 욕망과 등치되어 얼른 규범적 내부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내부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것이라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으로부터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질서와 권력은 소녀의 몸과 욕망에 실체 없는 공포를 투사하여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를 들키지 않으려 두려움과 함께 ‘잡년’이라는 표식을 주체인 소녀에게 전가해버리는, 가부장제와 백인 중심주의 등의 식민 제도 그 자체였다. 두 식민 제도는 모두 권력 위계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속성(남성 외 젠더, 백인 외 인종)을 여러 방식으로 혐오하고 억압함으로써 유구하게 유지되고 있다.

“잡년은 마녀와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가하는 권력을 유지하고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하고자 남성들이 발명한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해하는 그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은 문명의 기반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으며, 잡년이라 불리는 이들은 가부장제와 백인 중심주의라는 식민 제도를 위협하는 여성일 때가 많다(128쪽).”

자신을 뒤덮었던 어둠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음에도 혼란은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부끄러울 때가 있고, 타인의 작은 관심과 호의에 매료되어 섣불리 관계에 헌신하려 하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습관적으로 나의 욕망보다 타인의 욕망을 먼저 살피는 건, 그러지 않기로 앞으로 수십, 수백 번을 더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옅어지지 않을까 싶다. 같은 궤적을 따라온 다른 소녀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직 종종 그러곤 하는 나의 명치께에 걸려 있다. 네 욕망에 잘못이 없는데 그 때문에 자신을 미워했던 시간과 감각이 떠올라 동시에 괴로워진다. 어떤 말을 뱉으면 그저 탓을 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염려되기도 한다. 아무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일말의 책임감 같은 것일까.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인식과 감정이 소녀를 흔든다.

“아직도 다른 여성에게서 내 안의 어떤 부분 – 네가 되려고 작정한 그 잡년 – 이 보일 때마다 견디기 힘들다. 희미한 빛을 내는, 남성을 원천으로 삼는 자아,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부질 없는 욕구, 그들이 우리에게 음식이라 알려준 것으로 보이지 않는 허기를 채우려는 욕구다. 그 여성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프고, 심지어 그들을 벌하고 싶고, 막고 싶고, 지키고 싶다는 혼탁한 욕망이 찌르르 느껴지기도 한다(127쪽).”

3. 해방

“자기 혐오를 버리고 자유를 깨치려면, 자기혐오로부터 이득을 얻는 체계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162쪽).”

가부장제의 유령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내내 소녀와 함께했다. 그러나 소녀는 ‘나’를 파헤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위험한 것으로만 치부되었던 욕망을 온전히 자신의 쾌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 덕분이었다. 열여섯에 학교를 자퇴하고 사귄 릴리언은 소녀와 같은 소녀였다. 릴리언과의 관계는 소녀의 진짜 욕망을 일깨웠다. 릴리언은 이전까지 다른 소년들이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본인의 욕망으로 소녀의 욕망을 내리누르지 않았다. 소녀는 그에게 가장 주도적으로 애정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자신의 칠칠치 못하고 못난 부분을 들켜 릴리언이 떠나갈까 봐. 릴리언과의 섹스는 분명히 이성애 섹스와 같은 각본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그 각본상에서 매력적이었던 자신의 몸이 이 관계에서는 덜 흥미롭거나 어쩌면 역겹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소녀의 말마따나, “성적 경험이라는 선물이 이성애주의의 처방전에 훨씬 덜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 나서도 자유롭지 않았다(157쪽).”

자기 감시는 계속되었다. 릴리언 이후에 만난 다른 연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그들에게 벗은 몸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드러내는 게 무서워서 섹스는 불균형했다. 얽매임의 반복 속에서 어느 날 소녀는 자신이 10대 시절부터 끊임없이 독점적 연애를 해왔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타인에 대한 끌림에 습관적으로 반응하며 관계에 의존한 날들이 그의 뒤에 있었다. 이제는 정말 쉴 때가 되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게 오랜 버릇이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소녀는 사소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바깥에서 안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온종일 글을 쓰고 자기 몸을 돌보았다. 여태까지 회피하고 혐오했던 가슴, 손, 엉덩이, 허벅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애정 어린 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드디어 진짜 자유와, 가장 진실한 사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급격한 변화는 나와 내 몸이 맺는 관계에서 일어났다. 열두 살 때 언뜻 깨달았으나 온 힘을 다해 몰아냈던 자기 사랑이라는 본능이 여태껏 나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나는 새 침대를 샀고, 아침마다 혼자 잠에서 깨어 귀한 보물을 확인하듯 온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162쪽).”

이제 소녀는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이고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다소 진부하게 들리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에 여러 경험이 도움을 주었다. 도미나트릭스[1]로서 일했던 시절 겪은 일과 느꼈던 감각은 어떤 욕망이 노동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그와 비슷해 보이는 다른 욕망은 명백하게 폭력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주었다(물론 둘 사이의 경계는 언제든 흐릿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다채로운 욕망을 마주했을 때 그를 수용하고, 자신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처리해 내는 방법도 배웠다. 다른 여성들이 공유해 준 내밀한 사랑과 혐오, 통제와 원치 않았던 성적 동의의 경험담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가부장제 발작’이라는 단어는 올해의 신조어상 부문이 있다면 반드시 수상의 영예를 안을 것이다. “그거 가부장제 발작이야! 공황 발작이나 심장 발작 같은, 가부장제 발작이라고(270쪽)!” 커들 파티[2]에 참여해서는 거부하고 싶은 손길에 다소 쉽지 않았지만 “싫어요”를 말한 후 “자신을 아껴줘서 고마워요”라는 답을 들었다.

“여성은 성적 경험의 결과로 해로운 증상을 경험하거나 이를 강화할 수 있다. 이런 가학적 역학 관계를 무효화하는 과업은 더 많은 이들이 이 결과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만드는 데 달려 있으리라. 새로운 어휘 없이는 학대나 트라우마 같은 용어가 과용 또는 오용되는 한편, 이와는 다른 형태를 띤 심각한 정신적 영향은 완전히 간과되고 만다(296쪽).”

소녀는 마지막으로 페르세포네 신화를 이야기한다. 그는 원치 않았으나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 세계로 끌려갔고, 그의 어머니 데메테르는 별안간 딸을 잃은 슬픔에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쳤다. 대지는 황폐해졌으며 땅 위의 생명들은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신들의 왕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한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속여 지하세계의 음식인 붉은 석류를 먹인다.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은 이상 페르세포네는 밝은 땅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3분의 2만큼만 어머니와 함께 지상에서 지내게 됐다. 여기까지가 익히 알려진 페르세포네 신화의 한 판본인데, 이 이야기에서 페르세포네는 주로 어머니의 보호 아래 놓인 존재, 수동적인 납치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소녀는 그런 페르세포네로부터 다른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 그가 하데스를 사랑했을 가능성,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힘 있는 여신이 되었을 가능성 등을 말이다. 그저 피해자로만 남지 않은 페르세포네의 이면은 동시에 그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페르세포네가 하데스를 사랑했다고 상상해보자. 그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까? 결국 페르세포네는 죽어서도 하데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때로 우리를 납치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만약 내가 앞으로 평생을, 영원의 절반 동안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게 된다면, 나 역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리라 상상해본다(229쪽).”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자연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자연의 실현이다(238쪽).”

소녀는 더 많은 페르세포네들이, 우리 주변의 소녀들이 스스로를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치유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는 그와는 정반대다. 그건 열어젖히는 일이다. 내가 잃어버린 나의 일부 속으로 뚝 떨어져 그것을 되찾아오는 일이다(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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