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타임보다 오래 수다 떨기: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대담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유수연, 2025) 영화 포스터

지난 3월 11일, 네 명의 Fwd 필진들은 유수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이미 웹툰과 드라마 〈정년이〉를 모두 감상한 필진에서부터 여성국극을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필진까지 여성국극과 맺어온 관계는 저마다 달랐지만,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느꼈던 느낌은 모두 같았습니다. “재밌다”, 그리고 “(여전히) 새롭다”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출구 근처 통로에 모여 요란하게 나누던 감상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워 필진들은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에 대한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1. 〈정년이〉와 여성국극의 ‘부흥’

영경: 드라마 정년이가 방영되던 당시, 여성국극에 대한 정보를 잘 정리한 유튜브 영상이 많이 올라왔어요.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는데, 여성국극 1·2세대 시기에는 이 장르가 크게 성행하다가 TV와 라디오 시대가 열리면서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펼쳐지던 ‘드라마’가 화면 속으로 옮겨가며 인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이었어요. 또 한편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 들어 전통 예술을 지원하며 한국 예술의 맥을 잇도록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국극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요. 물론 여성국극의 역사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당대의 기술적 변화와 정책 흐름 속에서 점차 중심 무대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2세대 여성국극인 홍성덕 선생님을 중심으로 1990년대에 작게나마 부흥이 있었고(기사 보기) 최근 ‘여성 서사’라는 트렌드와 함께, 그리고 드라마 정년이를 거치며, 대중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것으로 그 역사가 이어져온 듯 해요. “여성국극이 보여준 문화적 실천과 의미가 사장될까 조바심이 난다”(김슬기, 2013: 134)는 평가가 2013년에 있었는데요, 김슬기 선생님께 ‘여성국극이 (다행히도) 잘 이어졌고, 25년도에 저희가 만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윤: 그리고 그 세대 구분도 되게 흥미롭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실 진짜 배우분들의 나이로 보면 2세대와 3세대 간 간극이 크잖아요. 2세대와 그 3세대 사이에 그 시간은 대체 누가 메우고 있었고 어떻게 유지가 되어 오고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도 생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영화 초반에 놀랐던 게 ‘여성국극이 계속 되고 있었어?’ 이런 생각이었거든요. 2018년 정은영 작가님의 작품과(전시정보 보기) 웹툰 〈정년이〉를 통해 여성국극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공연이 올려지고 있는지는 몰랐던 거예요. 영화 초반에 지영 씨, 수빈 씨가 “난 진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이렇게 말씀하신 게 그냥 팬의 마음으로, 여성국극이 전성기였던 시대를 살아보고 싶다 이런 건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배우로서 계속하고 계셨던 거예요. 내가 또 이렇게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진: 수빈 씨와 지영 씨를 비롯한 분들은 사실 〈정년이〉 붐이 있기 전에도 계속 여성국극을 해 오셨던 거잖아요. 나는 평생 여성국극을 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여성국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무슨 느낌이었을지 궁금해요.

영은: 이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난 5살 때부터 여성국극 했다, 혹은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여성국극 노래 들으면서 컸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그냥 평생이 여성국극이고 그게 삶이었는데, 어느 순간 <정년이> 때문일 수도 있고, 여성 서사의 부흥과도 연관이 될 수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이 갑자기 트렌드의 시류를 탄 거죠. 그렇다고 현재의 여성국극이 트렌드의 한 중심에 있다고 보기에도 지금은 또 애매해진 상황이긴 하죠.

지윤: 영화에서 수빈 씨가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저는 엄청 인상 깊었는데,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그때가 아마 〈정년이〉 웹툰이 인기를 끌고 드라마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이었을 것 같아요. 1세대 선생님은 이제 몇 분 안 계시고, 여성국극이 대중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얼마나 마음이 급하고 절박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유진: 어떻게 해야 시류를 잘 탈 수 있을까.

지윤: 그런 부담이 엄청 컸을 것 같아요. 원래 여성학을 하시던 분들이 대중적으로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이했을 때 그런 기분이셨을까요. (웃음) 아무튼 영화에서도 수빈 씨랑 지영 씨가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고 나서 심장이 아플 정도로 부럽다는 말을 하잖아요. 일본은 여전히 다카라즈카가 성행하고 있고 한국 여성국극보다 관객 규모도 크고. 일본에서는 계속 이어져내려오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 역사가 이어지기 힘들었을까 하는 슬픔도 느껴졌어요.

2. 여성국극의 동성친밀성과 퀴어성

영은: 영화에서 〈레전드 춘향전〉 극을 만들었잖아요. 개인적인 아쉬움 하나는, 저는 극을 전부 다 보여줄 줄 알았어요. 드라마 〈정년이〉도 마지막 화에 쌍탑전설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주는데, 드라마의 완결성과 완성도를 떠나서 그게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래서 영화에서 극을 편집해서 부분부분 보여주는 게 조금 아쉬웠어요. 물론 러닝 타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알지만요. 더해서 2세대 이몽룡과 3세대 춘향이, 그리고 2세대 춘향이랑 3세대 이몽룡 이렇게 크로스로 엮어서 그 조합이 장면마다 나눠서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그 의도가 좀 궁금하긴 했어요.

지윤: 2세대 이몽룡-3세대 성춘향, 2세대 성춘향-3세대 이몽룡은 국극 바깥에서는 그저 ‘할머니와 손녀’ 혹은 전통의 담지자인 스승과 그를 보필하는 기특한 청년 제자 정도로 그려졌을 거 같은데, 무대 위에서 이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성애적인 관계가 되잖아요. 저는 세대간 크로스되는 춘향-몽룡 조합이 새롭다고 느꼈고, 이 영화가 좋았던 지점 중 하나였어요. 보통 나이든 여성과 젊은 청년 여성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하고, 노년 여성이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잘 못하잖아요. 할머니를 욕망한다는 것, 노년 여성의 동성애적 욕망, 이런 말들이 그 자체로 부자연스럽고 부도덕적이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어쨌든 나이든 여성, 노년 여성, 할머니라는 존재를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만 그리고 다루어왔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 재미있는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레전드 춘향전〉의 공연 포스터(출처: 안산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영은: 할머니는 아닌데, 최근에 디즈니 플러스에서 나온 〈조명가게〉라는 드라마 아세요? 〈조명가게〉에서도 생각해봄직한 조합이 나오거든요. 배우 김민하 씨와 김선화 씨가 연기한 캐릭터 조합인데요. 두분이 극 중에서 사귀는 사이로 나와요. 레즈비언 커플인데 김민하 배우는 연하고 김선화 배우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쪽이죠. 드라마 장면 중에 둘이 이사갈 집을 돌아보는 장면이 있어요. 근데 이제 공인중개사가 ‘두 분은 모녀신가?’ 하고 물어보는데 김선화 배우는 대답을 못 하고, 김민하 배우는 순간 화가 나서 나가버리죠. 김민하 배우는 ‘언제까지 이렇게 숨고만 살건데’ 하고 김선화 배우는 자기가 너무 나이가 많은 탓을 해요.

그래서 그 장면을 보면서도 어떤 식으로 나이 많은 여성이, 특히 헤테로 커플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퀴어적인 성애 관계에서도 나이 많은 여성이 등장하는 서사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찾아보니 이번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사에서 〈두 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최근에 냈더라고요. 그게 노년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작업물이었어요. 그래서 약간 이런 식으로 조망하는 작업들이 좀 있을 필요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윤: 제가 영화를 보고 여성국극제작소 SNS를 찾아봤어요. 〈드랙X남장신사〉,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연출했던 구자혜 님이 올해 초 여성국극 작품 〈벼개가 된 사나히〉도 연출하셨더라구요. 그 작품에서도 30대 여성과 80대 여성 인물이 전 연인 관계인 설정이 있었어요. 연출가님 인터뷰를 보니 기존의 여성국극이 성별이분법을 적극적으로 가지고 노는 장르라면, 이 작품에서는 성별이분법을 해체하고 다양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수행하는 퀴어 공연을 만들고자 했다고 해요. 그 예시로 이 설정이 소개가 되더라구요. 이걸 고려했을 때 〈레전드 춘향전〉에서 세대의 크로스는 우연한 설정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세대/연령 규범을 넘어서는 퀴어한 사랑에 대한 상상을 촉발하려는 의도도 담겨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여성국극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 역사 속에서 관계성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였겠지만요.

유진: 저는 여성국극을 바라보는 세대 간 차이 같은 것도 흥미로웠어요. 영화 속 1~2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여성국극은 무조건 전통 그대로 가야 돼’, ‘현대적으로 변용하면 안 돼’, ‘남역은 남역다워야 하고 여역은 여역다워야 해’ 하고 여러 번 강조하잖아요. 반면 3세대 배우들은 요즘은 여자 남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여자가 너무 여자답지 않아도 사람들이 좋아한다 하면서 선생님들을 설득하려 하고요. 최근에는 여성국극에 퀴어 서사를 접목하려는 시도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여성국극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그 시대 선생님들이라고 해서 안전한 이성애규범성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영은: 이미 하고 있었죠. 어떻게 언어화할 순 없지만 이미 그들은 너무나 퀴어 러브 하고 있었고, (맞아요) 그들도 아마 느꼈을 것 같기도 해요. 말로는 할 수 없는 그런 멜랑콜리한 관계. 솔직히 연습하면서 한 번쯤은. (웃음)

3. ‘전통 젠더와 전통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성국극의 미래(?)

지윤: 근데 여성국극의 출발 자체가 그렇게 전통적이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또 전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겠지만. 저도 잘 모르긴 하지만, 판소리는 원래 1인극이고 극마당도 남성들이 주로 역할을 맡지 않았나요? 그런데 여성국극은 뮤지컬처럼 실내무대에서 공연하고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맡잖아요.

유진: 그 시대를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파격적이었을 것 같아요. 극을 올리는 사람도 다 여자, 팬덤도 다 여자.

영은: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그렇기는 했죠. 남녀가 유별하고, 여자들이 쉽게 남자가 나오는 극을 보러 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되게 그 시대상에서는 여성국극이 굉장히 안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죠. 그게 역설적으로 되게 퀴어한 실천과 모먼트들을 만들어내고, 그 사이에 절대로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는 어떤 감정들이 분명히 오고 갔을 것이고.

유진: 그것도 있잖아요. 60~70년대 한참 우리나라에 그 만화 잡지 엄청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도 소년 청춘물을 그리고 싶은데 만화에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이 만나서 연애하는 내용이 나오면 너무 심의에 빡빡하게 걸리니까 여자애들끼리 연애하는 내용을 사람들이 많이 그렸는데 그건 안 걸렸다고. (웃음)

지윤: 저는 그런 맥락에서 다카라즈카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다카라즈카는 말하자면 여역도 남역도 다 여성 배우들이 맡아서 공연을 올리는 일본의 여성국극 같은 거죠. 그래서 어머니들이 청소년 딸을 데리고 가서 공연을 보여주는데, 이게 청소년기 이성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들을 우회해서 풀어낼 수 있는 대안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이성과 접촉하는 것은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배우가 여성이어서 ‘안전한’ 다카라즈카를 통해서 그런 욕망들을 해소할 수 있게끔.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안전한 이성애로 들어가는 방식인 거죠. 여성국극도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해요[1]. 그런데 사실 그걸 본 여자아이들은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고. (웃음)

영은: 마치 부모님이 너 연애질 할까 봐 여고 보내는 거야, 했는데 외려 거기서…? (웃음)

1990년 다카라즈카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포스터 (출처: 한큐문화아카이브스)

유진: 또 여성국극에 대해 얘기할 때 ‘젠더 교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여성국극은 여성들이 모든 역할을 다 하는 극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젠더 질서를 교란하는 효과가 일어난다는 설명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이거 그렇게 단순하게만 얘기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보다 보면 ‘무대 위에서 남역은 더 남자다워야 한다’, ‘여역은 더 여자답고 예뻐야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오잖아요. 그러기 위해 여역 배우는 더 살을 빼서 가녀려져야 하고, 남역 배우는 더 남자다운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요. 그런 말들이 배우들에게 또 다른 규범 혹은 압박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은: 근데 또 마지막에 국극 오디션 보니까 또 다 남역만 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어쨌든 이 극을 이끌어가는 센터가 남자 역할임에는 변함이 없고. 이 서사의 주인공의 성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런 식으로 흘러가잖아요.

유진: 그런 맥락에서 지영 씨가 ‘여역을 어떻게 해야 더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여성국극의 여역이 남역만큼이나 큰 팬덤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데, 사실 아무도 그 고민에 대답해 주지 않잖아요. 여성들만 참여하는 여성국극인데도 남역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기대가 쏟아지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했어요.

영은: 2세대 춘향이 하셨던 김성예 선생님도 보면 자기는 이상한 거 안 할거다, 요즘 스타일 이런 거 안 할거다, 하고 완강히 거부하시잖아요. 본인 고집을 안 꺾는 진짜 여자의 악마(?) 그 자체인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웃음) 흥미로웠고. 그럼에도 마지막에 수빈 씨와 지영 씨가 한복을 벗고 현대극 안으로 녹아들려는 시도를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그 이후에 어떻게 됐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든 여성 ‘국극’이니까. 국극이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가 또 있잖아요.

유진: 여성국극이 연루되어 있는 시간대가 너무 다양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1950년대부터 여성국극을 직접 해온 선생님들의 시간성과 그것을 중간에 이어받아 계속 해온 이들의 시간성,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성국극의 새로운 가능성과 의의를 찾고 있는 이들의 시간성이 뒤엉켜 있잖아요. 그 사이사이에 페미니즘 리부트나 여성서사 붐 같은 것들도 끼어들어가 있고요. 그래서 그 복합적인 시간성을 감당하면서 여성국극을 해내는 사람들이 정말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은: 아마 수빈 씨와 지영 씨도 페미니즘 리부트의 수혜를 받았을 것 같고, 제가 드라마 <정년이>를 보면서 느꼈던 그 개빡침(!!)과 그럼에도 김태리, 신예은, 정은채 겁나 멋있어, 하는 모순된 감정을 그분들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 같아요. 1세대, 2세대 선생님들 보면서 진짜 저게 전통 여성국극이지, 하면서도 그분들이 하는 어떤 선택들, 이를테면 “나는 이런 코사주 이상한 거, 이런 현대적인 거 안 할 거야” 혹은 “너는 성춘향인데 왜 이렇게 뚱뚱하니?” 하는 이런 것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그 불편함. 진짜 너무 고민될 것 같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이 역사를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되고 있나, 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게 너무 괴롭고.

지윤: 한편으로는 우리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초 흥분상태로 상영관 앞에서 떠들다 갔잖아요.

유진: 영화 끝나자마자 “너무 재밌는데?!” 다른 연로하신 관객분들 사이에서 “서사 개맛도리다…” 하면서.

지윤: 영화가 주는 도파민이 순간적으로 엄청 컸던 것 같아요.

영은: 상영관 나오면서 ‘이 얘기하면 사람들 분명히 공감할 거다’ 하고 생각한 게 있었는데, “2세대 선배님들 짱이지 않냐?” 였어요.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치, 맞지.” 할거라고 거의 98% 예상했죠. (웃음).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전형성에 부합하는 분들이었잖아요. (지윤: 전통 부치와 전통 펨.) 그러니까 우리 마음 속에 계속 있는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식됨. (웃음) 너무 맛있, 아니 멋있었어요. (유진: 심지어 이옥천 선생님도 그렇게 분량이 많지도 않았어요.) 아니 처음에 등장하셨을 때 이미 끝났어요.

유진: 그러니까 나는 여성국극을 보러간 거지 부치를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는 못 했던 거예요.

영은: 진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좀 더 많은 부치가 필요해. 특히 여성국극 판은.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그 마지막에 남역들만 지원했던 그 맥락과도 이어지는 건데 어떤 공통 열망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어떤 콘텐츠가 현대 사회에서 부흥을 하려면 2030 헤테로 여성을 잡아야 하잖아요. 그건 솔직히 아무도 부정할 수 없죠. (유진: 근데 2030 여성은 부치를 좋아해.) 맞아, 그들은 남자를 좋아하기보다 부치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그게 어쨌든 여성국극이 부흥하려면 저는 좀, 현실적으로는 진짜 1, 2세대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남역이 잘해야 된다” 가 그 맥락에서는 통하는 것 같아요. (영경: 그때도 이미 많이 먹혔었고 성공의 공식에서는 그게 맞는데.) 맞아요. 이미 검증된 역사잖아요. 근데 그럼에도 또 한편으로 남역이 잘하려면 선생님들 말처럼 여역이 잘해야 돼.

유진: 근데 이게 되게 슬퍼져. 이제 남성성 팔이 장사가 시작되는 거지. 이거 페미니즘일까? 남성성을 팔아 장사해서 먹고 사는 건 페미니즘일까? 쉽지 않아요.

영경: 1, 2세대 여성국극 역사 영상 보다가 남역 배우 분이 팬이랑 결혼 사진을 같이 찍어준 걸 봤어요. 결혼의 한 장면을 같이 해 주신. (영상 보기)

유진: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그걸 사진 찍어가지고 평생 간직하게 해주고. 전통 부치는 보법이 다르다. 결혼식을 해준다고?

여성국극 조금앵 배우와 그의 팬이 올린 가상결혼식 사진(왼쪽). 웹툰 〈정년이〉(가운데)와 드라마 〈정년이〉(오른쪽)에서도
관련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출처: 한국일보, NEWS M)

영은: 그런 면에서 여성국극 대중화의 딜레마가 있는 것 같아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어려운…? 여성국극의 의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측면을 부각하려는 순간 서사적 재미를 잃기 쉬워지고, 그렇다고 그 미묘한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섹슈얼한 텐션과 도파민 삭 도는 내러티브만으로 끌고가기에는 여성국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유구한 의미가 크게 있잖아요. 어쨌든 지속적으로 여성국극 팬덤이 형성되고 유지되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결국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좀 질척이고 달라붙어야 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웃음)

유진: 〈정년이〉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저는 보는 내내 여성국극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두 이야기 모두 여성국극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모두 여성국극을 하는 여자들의 관계와 서사에 더 주목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정년이〉 드라마 버전을 보고 더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원작에 있던 인물들 간의 미묘한 관계성과 섹슈얼한 텐션에 대한 서사를 빼버리고, ‘여성국극’과 ‘주인공 정년이의 성장’ 딱 두 가지 키워드만 남겨놓은 거죠.

영은: 그래서 재미가 없어졌어요. 마지막으로 가면서는 김태리 배우가 거의 혼자서 끌고 가는 느낌까지 들었으니까. 처음에 드라마 시작했을 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종국에 다른 모든 캐릭터들의 서사가 정년이의 득음과 성장을 위해 희생되어 버리니까 허무하게 끝났죠. 사실 근데 이런 위험은 현 시점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의 기저에 놓여있는 위험 요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실제로 〈정년이〉에서도 “문옥경(니마이 전문 여성국극 배우 캐릭터)이 은퇴하면 여성국극 망한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고, 이게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이 든 성배라고 해야 하나. 여성국극 장르에 되게 독보적인 남역이라는 존재 혹은 자리가 어느 정도의 비중이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럼 그런 독보적인 ‘남역’이 더 많으면 되나? 제2, 제3의 문옥경만 있으면 여성국극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건가? (지윤: 일단 저는 좋을 것 같긴 해요. (웃음)) 제2의 이옥천이 나오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지윤: 그래서 그 지영 씨의 고민이 여성국극에 대한 핵심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게, ‘여역 배우에게도 저런 남역 배우 팬덤만큼 큰 팬덤이 있을 수 있을까?’, ‘그만큼 중요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계속 등장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역과의 관계 속에서 되게 부각되는 역할로만 여역이 계속 포함될 때, ‘그럼 내가 여성국극에 기여하는 바는 여역으로서 뭘까?’ 하는 되게 실존적인 고민이 들 것 같아요. 남역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여역이 묻히거나 아니면 뒷받침하는 역할밖에 안 되는 것 같긴 하거든요. 여역만 둘을 세워 봐. (영은: 맞아, 그 생각도 했어요.) 그쵸. 여역 둘이서 서로 사랑하게 해.

유진: 이 장르가 배우 한두 명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장르로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되는데. 그거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는 것 같아요.

영경: 정말 많이 공감돼요. 저도 지영씨가 던졌던 ‘여역을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질문이 영화를 보고난 후 지금까지도 계속 남아있었거든요.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다는 그 표현도 너무 와닿고요. 한편에서 저는 그 고민이 결국 창작의 영역에서의 고민, 작품성에 대한 고민으로 또 이어질 것 같긴 해요. 전체 작품에서 여역을 어떻게 위치시킬 건가, 어떤 성격과 특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낼 것인가는 결국 작품 전체의 이야기와 맞물리게 되니까요.

영은: 어쨌든 수빈 씨와 지영 씨가 아마도 전형적인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섹슈얼한 텐션이나 서사, 연애 관계가 아닌 다른 시도들을 해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더군다나 수빈 씨는 여성국극 대중화에 대한 욕망을 영화에서도 크게 드러냈고. 아무튼 이 영화 잘 됐으면 좋겠어요.

4. 그 ‘벽장’은 무엇이었을까

영은: 마지막에 수빈 씨가 말하는 맥락을 들어보면, 자기도 아직 준비가 좀 안 됐다, 하지만 나도 이번 계기를 통해서 나만의 벽장을 깨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직접적인 언급은 끝까지 피하죠. 왜냐하면 주인공 둘의 개인적인 서사를 또 영화에, 그러니까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들의 어떤 연애 서사를 살려버리면 영화가 약간 난잡해질 것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부분에 관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지윤: 저는 영화 후반부에서 벽장을 언급한 그 부분이 내가 아는 그 벽장의 의미가 맞나 헷갈리기도 했어요. 레전드 배우들을 모시고 성공적으로 공연을 올릴 수 있을까, 를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배우 분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여성국극을 대중적인 문화예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시기에 ‘우리끼리’ 해오던 장르를 하나의 벽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벽장을 깨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외부의 자극들이 개입됨으로써 변화가 생긴다, 이런 의미였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퀴어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그 ‘벽장’이 맞았다면, 배우 간의 로맨스 서사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자칫 여성국극 영화가 아니라 대국민 커밍아웃 영화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웃음)

유진: 저는 사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연인 관계를 드러내거나, 감추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여성국극을 했고, 선배이자 동료, 친구, 그리고 연인으로서 아주 오랜 시간과 경험을 함께해왔을 거잖아요. 저희는 그 두터운 관계의 한 단면만 뚝 잘라서 우연히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그 관계는 자매나 친구, 동료, 연인 중 무엇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관계이고, 영화도 그냥 그 관계를 복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이 커플링을 나눠 끼고 있는 장면 같은 것도 신경 쓰였다면 지울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보낸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했고요.

영경: 말씀해주신 내용들에 모두 동감해요. 수빈 씨가 영화 초반에 ‘내 존재를 증명해야 되는 것처럼 여성국극이 느껴져서 좋았다.’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벽장을 깨는 것’을 언급하시잖아요. 영화 제목이기도 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이 대사들을 생각해 보면, 저는 결국 그 말들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3세대 국극인분들이 여성국극의 의미를 인정받고, 여성국극이 보다 대중들과 더 잘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투쟁의 과정이 영화를 통해 그려졌다면, 결국 목표에는 어떤 문을 깨거나 열어 그 밖과 만나도록 하는 이미지를 그려둔 느낌. 저희가 이미 ‘벽장을 깨는 것’을 관용어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출연자 개인에 주목하게 되기도 하지만, 저는 수빈씨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여성국극의 존재 의미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고 느껴졌고, 그렇다면 그 둘을 분리해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하나의 얘기로 봐도 무방하겠다 하는 생각이에요.

유진: 영화를 보면 초반부에 ‘여성국극은 계속해서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되는 장르다’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대사를 들으면서 여성들끼리 모여 있는 곳은 항상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여대도 그렇고, 여성 공간도 그렇고요. 그 과정에서 존재 의의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전통’인 것 같아요. “여성국극 1950년대부터 했고, 70년 넘는 역사가 있어. 이게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돼.” 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쉽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전통을 강조할수록 점점 그 전통의 가치에 얽매이게 되는 거죠.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면 ‘그건 전통이 아닌데?’ 하는 반발에 부딪히게 되고요.

하지만 여성국극이 장르로서 살아남으려면 계속 전통을 재해석해야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 복잡한 문제들이 다 합쳐지면서 여성국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려운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여성들끼리 모여 있다고 해서 왜 그렇게까지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퀴어예술가들의 인정 투쟁이라는 말이 진짜 맞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이렇게 증명하고 계속해서 이렇게 보여주려고 하는 게 그 예술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기도 하고요.

영화 대담을 빙자한 수다회는 러닝 타임보다 오래 진행되어 편집에 다소 애를 먹었습니다만, 여성국극이 가져다주는 재미와 상상과 망상에 관해서라면 이만큼이나 할말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월 19일 개봉한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의 ‘수다’가 궁금해집니다.

정리: 지윤, 영경, 영은, 유진


참고 문헌

  • 김슬기(2013), “여성 국극을 잊어야 하는 시대: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 여/성이론
  • 김지혜(2010),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제26권 1호: 9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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