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진

플래시백(flashback): 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 혹은 그 기법. 현재 시제로 진행하는 영화에서 추억이나 회상 등 과거에 일어난 일을 묘사할 경우 이 장면을 플래시백이라고 한다. (두산백과)
2015년 2월 그라치아에 실린 김태훈의 칼럼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2015년 5월 메르스 한국 유입 이후 확산한 여성혐오적 유언비어에 대응하며 등장한 메르스 갤러리, 그리고 이를 통해 탄생한 ‘메갈리아’를 기점으로 본다면, 2025년 현재 우리는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1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2015년 중반 이후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을 지칭하기 위해 문화연구자 손희정(2015)이 고안한 용어로, 기존 페미니즘 운동과의 단절 및 접속 지점을 의식하면서도, 영화 산업의 ‘리부트’라는 개념처럼 이전 시리즈와는 다른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손희정, 2015: 15).
한편 작년 12월부터 계엄 및 탄핵 정국을 거치고 마침내 파면이 이루어진 지금, 지난 넉 달간 우리가 경험한 복잡한 감정들은 지난 10년 간의 페미니즘 리부트 과정에서 축적된 감정들과 중첩되며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광장을 가득 채운 응원봉의 눈부신 LED 조명, 각양각색 깃발의 흔들림에서 느껴지는 경쾌한 리듬, 정치적 주체로서 ‘젊은’ 여성 집단의 호명, 개개인의 정체성을 연루시키는 정치적 발화 방식 등에서 우리가 느낀 기시감과 기묘함은 파편화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현재로 불러냈다. 광장에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벅참, 동시에 그 거대한 흐름에서 약간은 유리되어 있다는 어색함, 연대와 임파워링의 언어만큼이나 넘쳐나는 혐오와 배제의 언어들… 마치 영화에서 과거의 장면이 현재의 순간에 갑자기 끼어드는 ‘플래시백’ 기법처럼 말이다. 탄핵 정국이 야기한 플래시백은 우리를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소환하는 한편, 같지만 같지 않은, 친숙하지만 낯선, 과거의 언어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했다.
이러한 공통 감각 하에 Fwd의 필진들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10주년을 기념하고 기록하는 아홉 번째 기획의 제목을 ‘플래시백’으로 명명했다. ‘리부트’가 영화 산업의 용어인 것처럼, ‘플래시백’ 역시 영화적 표현으로서 우리의 집단적 기억이 시간을 초월해 연결되는, 과거의 경험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현재의 경험 위로 중첩되며 흐르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첩된 시간성에서 핵심적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 혹은 정동이다. 필진들은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지난 10년간 전개된 다양한 논쟁들과 액티비즘, 최근 탄핵 정국의 응원봉 연대를 비롯하여 페미니즘 운동이 마주한 현 상황이 공포, 분노, 망설임, 혼란, 경이로움, 즐거움 등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통해 더 풍부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감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플래시백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감정은 모호하고 복잡한 경험들이 끈적이며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과정을 거쳐 의미를 생산하고, 그 결과 시간순으로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서사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운동의 언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 언어가 구성원들을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까지 어떤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감정과 정동의 렌즈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페미니즘 리부트’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페미니즘 리부트의 궤적을 감정과 정동의 렌즈로 재조명하려는 과정에서 기존에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발화되고, 감정적 경험들이 재평가됨으로써 페미니즘 담론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개인들이 느끼는 곤란함이나 모순, 망설임 같은 모호한 감정들 역시 언어를 통해 해석되고, 페미니즘 정치의 동력으로서 재의미화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래시백 속에서 감정은 단순히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아니라, 의미를 재구성하고 미래의 정치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사라 아메드가 말했듯이, “감정이 세계를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어떠한 변화를 분명히 만들어내기는 한다.”(Ahmed, 2014;2023: 54) 페미니즘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의 감정들이 현재와 만나 어떤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지, 그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기획의 핵심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Fwd의 아홉 번째 기획에는 총 여섯 명의 필진이 저마다의 질문을 갖고 참여한다.
먼저, 윤소이는 윤이형의 소설 『붕대 감기』를 읽어 내려감으로써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간을 재방문하고자 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실망하는지,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오해하는 순간이 어떤 감정들이 만들어지는지를 ‘페미니스트-분노’의 순간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이 지속하기 위한 돌봄의 조건을 제안한다.
다음으로, 만두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국면에서 운동의 결집과 구성에 공포라는 감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되짚어본다. 여성 대중 사이에서 ‘여성의 공포’를 공유하고 이해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조건처럼 여겨진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여성의 공포’가 남성과의 접촉 및 관계에 대한 것으로 구성됨으로써 그에 상대되는 여성 주체 및 공적 영역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진 방식을 살핀다. 그러면서 공포를 경유하여 친밀성과 돌봄을 거부하게 된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의 한 축과 돌봄 의제를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마주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한다.
하영은 정치적 의제로서의 돌봄과 정동으로서의 돌봄을 페미니즘 담론과 실천 속에서 살피며, 돌봄이 실패한 흔적들을 짚어내고자 한다. 특히 필자가 함께했던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을 사례로 들어, 그 안에서 어떤 돌봄이 상상되었고 동시에 불가능했는지를 돌아보며, 돌봄의 실패는 왜 공적으로 논의될 수 없었는지를 분석한다.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돌봄의 실패 기록들이야말로 ‘실패할 권리’이자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 될 것임을 주장하며, 낭만화할 수 없는 돌봄의 끈적함을 전면에 배치하고자 한다.
싱두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경험하며 지향하게 된 삶의 가치와 실제 삶의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주목한다.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감정은 무엇이며, 그러한 감정이 어떤 것들과 얽히며 페미니스트 주체를 움직이게, 혹은 멈춰 서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중요한 건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온은 작년 11월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 4B 운동이 바이럴한 인기를 끈 현상에 주목하면서, 미국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코스모폴리탄 디아스포라 연구자의 위치에서 4B 운동의 초국적인 가시화를 마냥 자랑스러워할 수도, 단호히 규탄할 수만도 없는 곤경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서구의 관심이 한국 페미니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도 그 결함을 폭로하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K-페미니즘’이 초국적 담론장에서 단일한 상품으로 소비되는 구조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보라돌이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자장 안에서 형성된 Fwd를 공간으로 읽어내기를 시도한다. 필자는 다양한 시간성과 궤적들의 얽힘을 드러내는 ‘공간적 상상력’을 통해, Fwd를 서로 다른 속도, 온도, 방향을 가진 필진의 여정이 다양한 페미니즘적 의제 및 정동들과 조우하고 얽히며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의미화한다. 이를 바탕으로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 역시 단일한 선형적 시간 선상의 과거 회고가 아닌, 다양한 엇박들의 궤적이 얽히며 현재진행 중인 생성의 장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이 기획을 준비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은 필진들에게 지난 10년간의 시간을 다시 재방문하고, 재의미화하는 과정이었다. 리부트 이후 1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필진들은 지금도 페미니즘 리부트와 공명하는 동시에 불화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 역동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굴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과거의 사건을 역사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역사화란 현재의 문제의식을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지금의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과거와는 달라진 새로운 맥락 위에서 어떤 문제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리부트를 새롭게 의미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필진들은 2025년 현재의 감정적 지형도 위에서 지난 10년을 바라보며, 페미니즘 리부트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고 평가하는 작업의 기반을 닦고자 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우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현재의 우리는 그 과거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실천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10년을 되돌아보는 이 작업 역시 그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박제하는 작업이 아닌, 미래의 정치적 실천을 예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이 페미니즘 리부트를 그저 ‘실패한 혁명’으로, 혹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현재의 우리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한 현재를 일부 구성하기도 하는 사건으로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플래시백처럼, 하지만 그 파편적인 기억을 통해 비로소 설명되는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경험들처럼, 페미니즘 리부트는 지금 이 순간의 여러 장면과 공명하며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 손희정(2015).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서울: 나무연필.
- Ahmed, S.(201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파주: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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