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두

1. 공감과 불편 사이
국면 하나.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성공담론, 이른바 야망보지 서사는 공론장에서 적잖은 페미니스트들의 호응을 얻었다. 야망 있는 여성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자는 구호였는데, 그를 통해 남성 가부장 권력(남편, 아버지, 이외 사회 내 남성 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기에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는 여성해방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야망보지 서사의 대표적인 주인공은 번듯한 직장에서 한 자리 하는, 자기 사업을 일구어 성공한 CEO, 혹은 영리한 투자로 제법 자산을 마련한 ‘독신’ 여성이었다. 당시의 4B운동(비연애, 비결혼, 비출산, 비섹스)과 야망보지 담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독신’이라는 속성은 이 서사의 주인공인 여성에게는 꼭 필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장면 하나. 작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이전에는 본적 없었던 (것 같은) 부스를 발견했다. 은행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진 KB그룹의 생명보험 계열사 부스에서 ‘Money with Pride’라고 적힌 팜플렛을 나눠주었는데, 그에는 법적인 경제 공동체로 인정받기 어려운 퀴어 커플을 위한 파트너 동반 재무설계, 파트너 간 재산양도 컨설팅 등을 제공한다고 적혀있었다. “고객님의 노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파트너와의 안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드립니다.” 불안정성이 도처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비단 퀴어 커플에게만 호소될 것 같은 멘트는 아니었고, 헤테로 커플이 법적 결혼 후 자산 증식을 위해 으레 이용하기를 고려하는 금융상품을 참고하여 만든 듯 했다.
이 두 가지 국면과 장면에서 나는 비슷하게 공감하면서 또 불편했다. 왜 어떤 여성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국면에서 경제적 자립과 성공을 중시하게 되었는지 너무 이해가 됐고, 왜 퀴어문화축제에 금융상품 판매를 홍보하는 부스가 등장했는지 그 이유도 자연스럽게 납득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도 “왜 우리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가 전제된 자본주의의 틀과 논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느꼈던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이 불편함이 실제로 그러한 답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개인, 그러니까 실제로 ‘야망보지’가 되기 위해 주식에 투자하거나, 퀴어 커플을 대상으로 한 재무설계를 받을 누군가에게 향하는 것 같을 때는 한층 더 불편해졌다. 현실적인 공감과 겹겹이 쌓인 불편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왜 이런 감정들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이 한번쯤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운동과 실천 사이
페미니즘 리부트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다시 만난 세계’로 이끌었다. 이전까지 세계를 바라보았던 관점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이전과는 확실히 같지 않은 형태로 변했고, 비가역적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변화의 영향은 컸다. 이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라 아메드(2004; 2023)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경이에 가까웠다. 아메드는 경이로움이 우리를 페미니즘으로 이끌 때 그 감정은 우리와 우리의 세계가 다른 관계를 맺도록 안내한다고 이야기했다(2004; 2023: 382). 주체가 세계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경이가 선행되어야 하며, 세계를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바라보게 하는 일을 경이로움이 가능하게 한다. 뤼스 이리가레(1993: 73)는 이러한 경이 자체가 우리를 이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이로운 페미니즘의 렌즈로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였다. 두 가지 모두 이전까지의 삶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마치 공기처럼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이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주요한 하부구조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적으로 젠더가 구성되고 배치되는 방식은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연결된다. 수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며 그를 벗어난 삶의 태도와 실천이 필요함을 역설했다(Mies, 1986;2014; Gibson-Graham, 1996;2013). 이들의 논의를 접하며 나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았고, 덕분에 체제 저항적인 페미니스트로 세상을 조금 더 비뚤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앞서 가있는 페미니스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새로이 해석하게 된 세계에서의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지를 동시에 고민했다. 답은 없지만서도 기존의 삶의 방식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여러 페미니즘 운동 담론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활발히 공유되고 있었고, 페미니스트들은 여러 공론장에서, 광장에서 젠더 불평등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며 그 틀을 벗어나 행동하고 사유하는 삶을 만들어나가자 호소했다. ‘주인의 도구가 아닌 것으로 주인의 집을 무너뜨리기 위한’[1] 운동 의제와 구호들이 나를 포함한 다수 페미니즘 리부트 주체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힘 있는 발언들에 고양되고 가슴이 뛸 때마다, 한편으로 “그래서 나는 지금 이 호소를 얼마나 개인의 삶에 실천으로 끌어들이고 있는가?”라는 다소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다.
[1] Lorde, A.(1984). Sister Outsider, Crossing Press, 주혜선·박미선 옮김(2018), 『시스터 아웃사이더』, 서울: 후마니타스, 178쪽의 문장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를 패러디했다. 해당 문장은 구조 바깥에 놓인 아웃사이더들과의 연대를 요청하고, 그를 통해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것을 역설하는 맥락에서 쓰였다. 자본주의의 언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 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해당 문장의 긍/부정태를 반대로 하여 인용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시간이 될 때마다 성차별적 자본주의 체제 규탄한다, 를 외치는 페미니스트 집회에 참석하여 함께 투쟁을 외치고 반자본주의 운동 지지 연명에 참여했지만, 일상적으로 그 자본주의가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주의, 경제적 성취 등과 같은 삶의 모습을 좇는 역설적인 선택을 내렸다. 삶에 깊게 뿌리내린 불안정성과 조급함은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선택지 외의 것들을 잘 볼 수 없게 방해했고, 그래도 그를 따르는 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내 삶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것이라 믿었다. 이는 분명히 가부장제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문제들을 다시금 그 자체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한계적인 시도였다(Kim, 2017). 동시에 한편에서 그러한 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여전히 석연찮은 마음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이처럼 지지하는 운동의 구호가 개인의 삶에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적잖은 괴리가 남은 것 같을 때, 나는 결국 불편하고 괴로웠다.
3. 그 사이 감정이 하는 일
불편함과 괴로움은 우울을 불러일으켰다. 우울은 때로 스스로 혹은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혐오가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연결되었다. 지향과 실제 삶의 간극,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감정은 서로 질척거리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질척거림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경험한 이들의 번아웃을 연구한 이정연(2022)은 페미니스트들이 대외적인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스스로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괴로움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냈는데, 이 괴로움은 마치 공통 조건처럼 동년배 페미니스트들의 경험에 전제되어 있었다. 견디기 어렵고, 참을 수 없는 양가적이고 불편한 감정을 보편의 영역에 둔 상태에서는 소진되기도 쉬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같은 질척이는 감정이 (페미니스트인) ‘우리’의 토대로 구성된 것일까?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이길래, 나아가 무엇을 하기에 페미니즘의 경이 이후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다시 아메드의 감정 논의(2004; 2023)를 빌려 보자면, 감정은 개인적이지 않고 그를 느끼는 주체를 ‘넘어 움직인’다. 그렇기에 감정은 사회적이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겪으며 내가 느낀 경이, 불편, 괴로움, 우울은 특정한 무언가‘로 인해’ 갖게 된 인과가 뚜렷한,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여러 페미니즘 대상 및 타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접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효과에 가깝다. 즉 감정은 관계를 전제한다. 감정이 관계한 타자들 사이를 지나며 순환할 때, 그 안에 놓인 몸들에는 비슷하거나 다른 흔적이 남는다. 같은 대상과 접촉할 때도 각 주체는 서로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감정은 다시 서로 마주하면서 달라붙는다. 그렇게 엉겨붙은 감정들은 막연히 그 자장 안에 놓인 (쉽게 ‘우리’로 불리는) 이들의 공동 작업물이 되고, 동시에 효과로서 주체를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나를 비롯한 페미니스트 주체들은 이 엉겨붙은 감정에 다시금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딘가에 고정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끊임 없는 감정의 순환 과정에서 나는(혹은 너는) 마주한 페미니즘의 대상이 촉발하는 감정에 이끌리고, 그를 나의 표면으로 수용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유 체계를 만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세계와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는 감정의 애착이 끊어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감정의 효과와 마주하게 되면서 때로 이질적인 공존이 지속되었다. 야망보지 서사와 Money with Pride를 마주하며 마음 한 켠에 불편과 반가움이 뒤섞여 함께였던 것은 이러한 공존의 개인적인 예시 중 하나였을 것이지만, 결국 감정이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라면 어떤 페미니스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부흥의 시기를 지난 이후에도, 페미니스트인 나와 너는 여전히 공존하는 모순된 감정의 자장 안에 있다. 여전히 운동과 실천 사이에서 방황하며 말로 쉽게 풀 수 없는 불편함과 찝찝함을 안고 산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감정의 경로를 해석해보려 하지만, 다양한 방향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일관된 답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다 우울에 빠지고, 주저앉고, 회의감에 휩싸여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마주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이 감정 덩이들의 범람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한다. 사이에 놓인 감정은 이러한 매 순간의 선택과 머뭇거림을 하게 한다.
4. 그 사이 감정의 가능성
페미니즘 리부트는 그를 통과한 많은 이들이 복잡한 감정의 관계망 속에서 차이의 마주침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삶을 정치화했기에 한 시절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후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좀 더 익숙해졌을지언정 그때의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 김관욱은 아메드의 감정 논의를 빌려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관계된 감정은 시간이 흐른다 해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김관욱 외, 2024: 168). 나를 공감과 불편, 운동과 실천 사이에서 괴롭게 하는 감정의 순환이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다시 힘들게 하는 한편 우습게도 기대하게 한다. 또 어떤 순간에 새롭게 불편함을 느끼고 움직일지, 같은 것들을 말이다.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서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때, 더욱 중요한 건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일 테다(Ahmed, 2004; 2023: 45). 감정이 생성된 맥락을 검토하는 작업은 그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드러내기를 요청한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지향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가치와 대치되는 것 같은 선택을 내리며 괴로움, 죄책감, 우울에 휩싸일 때, 어떤 사회구조적 배경이 이 감정들을 촉발했는지, 어떤 다른 주체들이 이 감정들과 함께하는지 성찰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를 통해 감정은 운동과 삶의 원동력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치의 장을 열어낼 가능성을 계속해서 이어지게 한다.
참고문헌
- 김관욱 외(2024). 『달라붙는 감정들』. 서울: 아몬드.
- 이정연(2022), “페미니스트들의 ‘번아웃’ 호소를 통해 드러난 강남역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 Ahmed, S.(200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서울: 오월의봄.
- Gibson-Graham, J. K.(1996). The End of Capitalism(As We Knew I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엄은희·이현재 옮김(2013),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서울: 알트.
- Irigaray, L.(1993).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trans. C. Burke and G. C. Gill, London: The Athlone Press.
- Kim, B(2017). “Think rich, feel hurt: the critic of capitalism and the production of affect in the making of financial subjects in South Korea”, Cultural Studies, 31(5), pp.611-633.
- Lorde, A.(1984). Sister Outsider, Crossing Press, 주혜선·박미선 옮김(2018), 『시스터 아웃사이더』, 서울: 후마니타스.
- Mies, M.(1986).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London: Zed Books, 최재인 옮김(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서울: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