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wd, 엇박의 궤적들이 엮어가는 공간

👻보라돌이(이다은)

# 엇박의 궤적

페미니즘 리부트가 10주년을 맞이했다. 여러 페미니즘 이슈들이 불려와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저 깊은 곳에서 묻어놓고 한동안 들여다보기를 외면했던 감정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소외감이었다. 사실 이 느낌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쏘아올린 공에 맞아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로 나를 계속 따라다닌 익숙한 감정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동시대성과 불화한다는 감각을 지닌 채 스스로를 “어정쩡한 페미니스트”로 여기며 살아왔다. 리부트 이후엔 한동안 뜨거웠던 트위터 페미니즘의 세계는 나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렏펨과 쓰까의 논쟁은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 같았다. 많은 이슈에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뜨겁고 빠르게 반응할 때, 나는 어딘가 결이 다른 감각을 지닌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줄곧 헷갈린 상태에서, 어느 한 쪽을 쉽게 지지하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보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동시대의 “핫한” 페미니즘 이슈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불안과 소외감을 느꼈다. 

나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는 많은 경우 “모두가 힘들게 싸우고 있을 때, 게으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만큼 빠르거나 뜨겁지 않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인가?” 하는 자기검열이나 “나는 덜 충분한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회의로 귀결되곤 했다. 

이 감정은 Fwd에 들어오고 나서도 계속 되었다. Fwd의 기획이 만들어질 때나,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해 Fwd가 빠르게 성명서를 내는 흐름 속에서, 나는 늘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모두가 함께 몰입하고 분노하고 있을 때, 나만 빗겨나 있는 감각. 함께 끼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끝내 가까워지지 못한 페미니즘은, 마치 실패한 짝사랑처럼 내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 감정을 덮어둔 채로 몇 해가 흘렀다. 그리고 오랜만에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이라는 계기 속에서 이 감정이 다시 떠올랐을 때, 이번에는 이 감정을 출발점 삼아 페미니즘 리부트를 돌아보는 하나의 의미 있는 렌즈로 구현해보고 싶었다. 항상 페미니즘의 “메인” 이슈에 끼어들지 못하고 언저리를 돌고 있었던 것 같은 내 이야기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의 궤적에서 어디쯤 위치할 수 있을까?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가장 뜨거웠던 과거의 주요 이슈만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연대기 식의 단선적인 흐름으로만 정리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처럼 동시대의 “메인 흐름”에 온전히 끼지 못하고, 불화해온 감각들을 함께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인 무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그 언저리를 맴돌며 함께 고민하고 나아간 사람들, 혹은 더 이상 같은 “페미니스트”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없을지라도, 분명히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함께 지나왔던 이들의 이야기 또한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지나며 느낀 “메인” 동시대성과 어긋나 있는 나의 감각을, 공간적 상상력을 통해 새롭게 사유해보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나는 먼저,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이 응축된 하나의 미시적 장으로서 Fwd를 살펴보고자 한다. 

Fwd 필진들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기점으로, 또는 그로 촉발된 페미니즘적인 사회적 이슈를 통과해오면서 저마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Fwd의 창간 또한 그 연장선 상에 있었다. Fwd는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의 자장 안에서 형성되고 활동해왔으며, 리부트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현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느낀 엇박의 감각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Fwd를 공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 내부의 다양하고 미세한 결들을 읽어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는 더 크게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하나의 장으로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공간적 상상력으로 바라본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의 시간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함께 얽히며 여전히 생성 중인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단선적 시간선을 넘어 공간적 상상력으로

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공간을 위하여』에서 우리의 일상이 시간중심적인 사고에 갇혀있다고 지적하며, 공간이나 지리는 그저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처럼 죽어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비판한다.[1] 그런데 여기서 매시가 지적하는 시간중심적 사고란 시간에 대한 특정한 방식의 상상력, 즉 직선적인 시간관을 뜻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에 흔하게 깔려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간을 시각화할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직선의 모습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매시는 이렇게 납작한 직선적 시간관이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공존하는 공간적 이질성이 하나의 시간 축 안에 줄지어 배열된다고 비판한다. 가장 단적인 예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각기 공간적 이질성, 각기 다른 역사와 시간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단 하나의 궤적만이 존재하는 시간적 틀에 줄세워져, “앞선” 선진국과 “뒤쳐진” 후진국으로 줄세워지는 서사를 들 수 있다(Massey, 2016). 

나는 매시의 단선적 시간성에 대한 비판에 공감하며, 이로부터 페미니즘 리부트의 10년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지 하나의 실마리를 얻었다. 우리가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시각화한다고 할 때, 가장 왼쪽에 2015년 메갈리아 사건, 그 다음 2016년 강남역 사건이 위치하고,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순서대로 정렬되는 연대기적인 직선을 상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매시는 2차원적인 직선적 시간선에 갇혀있는 다양한 시간성의 궤적들을 끄집어내어 “공간”으로서 해방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하려면 공간은 입체적이고 열려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매시는 공간을 다중적 역사와 시간성의 궤적들이 공존하고, 그 궤적들이 조우하며 만드는 관계들에 의해 항상 생성 중인 것으로 정립한다. 

“공간성을 인정하는 것은 동연대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해 적어도 일정 부분 자율권을 지니고 있는 각각의 궤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궤적들은 단 하나의 스토리로 엮이어 순서대로 정렬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140)”

매시가 언급했듯, 공간적 상상력은 동연대성, 즉 동시대에 함께하는 타인 또한 내가 사는 세계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나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열어준다(Allen, 2022). ‘역사화’가 자기를 고립된 원자적인 존재가 아닌, 역사적 변화와 흐름 속에서 나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면, 나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적 흐름 속에서 나를 이해하게 하는 지리적 상상력은 이 세계의 상호의존성과 연결성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Allen, 2022).

여기서 나는 내가 느껴왔던 엇박의 감각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 비로소 열리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과 조급함은, 어쩌면 Fwd라는 공동체 혹은 페미니스트로의 여정을 납작하게 단 하나의 선형적 시간축 위에 얹어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나중에 Fwd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안 사실은, 이들 역시 “내가 Fwd에 맞지 않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처음에 전공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속감에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 한편 Fwd에 나중에 합류한 멤버들은, 밖에서 봤을 때는 Fwd가 합의된 동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Fwd 구성원들을 비롯해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고백한 어긋남들은 단순히 실패보다는 페미니스트로서 하나의 동일한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엇박들은 이미 우리의 장이 다중적 시간성과 리듬 속에서 생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 개별의 선들, 다중의 리듬들

매시가 개념화한 “공간,” 즉 서로 다른 시간적 궤적들이 얽히며 생성 중인 장은,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가 제시한 “선” 개념을 이용하면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잉골드는 『라인스』에서 사람의 삶을 계속해서 생성 중인 “선”으로 비유하며, 삶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얽혔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여정이라고 본다. 잉골드의 선은 끊임없이 생성 중에 있으며, 방향도 속도도, 모양도 정해져있지 않다. 나는 잉골드의 은유에 공감하며 Fwd의 멤버들을 각자의 방향, 속도,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선으로 상상하곤 했다. 

잉골드가 『라인스』에서 제시한 선의 삶(186). 
잉골드는 모든 존재가 “존재”한다기 보다는 “발생”한다고 보는데, 계속 진행 중인 선의 삶이 그것을 보여준다.

나의 선은 페미니즘 리부트와 여성학과, 그리고 Fwd를 지나 조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박사과정을 위해 싱가포르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는 한국의 이슈들과 점점 벌어지는 시공간 간극을 더욱 체감했다. Fwd가 처음 시작할 때 한국, 그것도 특수한 서울의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뜨겁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싱가포르라는 먼 곳에서는 점차 그 리듬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한국의 페미니즘 이슈에 더 엇박으로 반응하고, 한 발 늦게 뒷북을 쳐대는 사람이 되었다.

글로벌 도시 싱가포르는 국적도, 문화도, 언어도, 체류 이유와 기간도 제각각인 외국인들이 짧은 시간 교차했다가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곳이었다. 매일 같이 보면서 일상을 밀도 있게 공유하던 대학원 동료들과 교수님도, 그 다음 학기면 현지조사나 귀국, 다른 나라 대학으로의 이동 등의 이유로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처럼 싱가포르에서 뜨겁게 가까워졌다가 금방 스쳐지나가는 관계의 밀도를 경험하고, 각자 뻗어나가는 여정을 관찰한 후에, 나는 Fwd와 나의 페미니즘 리부트 여정을 보는 내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Fwd라는 곳도 결국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펼쳐진 개인의 선들이 잠시 얽혀 만들어낸 교차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2010년대 후반이라는 시간대, 특정한 문제의식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조우하는 순간 우연히 얽혀진 하나의 매듭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잉골드가 본 대로 선의 논의를 발전시켜서 Fwd를, 더 나아가 페미니즘 리부트를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 각자의 속도로 조응한 Fwd 기획

잉골드가 제시한 “선” 의 은유는 Fwd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틀을 제공한다. 선의 은유를 빌리자면, Fwd를 이루는 기획과 글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멤버 각자의 선이 뻗어나가는 도중에 어떤 사건이나 정동의 선이 각자를 건드릴 때,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하며 일시적으로 엮여낸 매듭들. 

그런데 여기서 선은 반드시 사람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다. 감정과 정동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 사이를 흐르는 어떤 것임을 고려한다면(아메드, 2023), 정동 또한 하나의 선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필진들을 통과해온 분노, 좌절, 연대, 환멸, 공포 등의 감정들 궤적 또한 Fwd를 통과하며 Fwd를 엮어간 선의 일부이다.

잉골드(2024a)는 이 선들이 얽혀 만드는 매듭을 “조응(Correspondence)”이라고 부르며, 선으로서의 삶은 조응의 과정이라고 제시한다. 이를 잉골드(2024b) 가 제시한 선의 그림으로 쉽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잉골드가 『라인스』에서 제시한  얽힌 선들의 그물망(meshwork). 잉골드는 이 선들의 얽힘이 만들어가는 그물망이 인간과 비인간 상관없이 살아있는 존재가 거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양상이라고 보았다(잉골드, 2024b: 170).

그림 속 A,B,C,D,E,F,G를 Fwd의 구성원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이들의 선은 모양도 방향도 제각각이다. 그들을 가로지르는 선 H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우리를 관통하며 다양한 정동들을 촉발시킨 사회적인 이슈들로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적 정동은 과거의 기억, 본인의 배경 지식, 관심사 등을 건드리며 서로 다른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고, 그 응답은 각자의 속도에 따라 기획 세미나, 기획 기사, 성명문 제작 등으로 이어지며 Fwd를 만들었다.

잉골드(2024a)는 선들의 조응이 정치적인 차원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것은 답하면서 책임지고 귀 기울이려는 것이다. 실제로 Fwd의 기획과 글을 살펴보면 특정 시기의 사회적 정동과 긴밀히 얽혀있었다. 백래시나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기획,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게임업계 내 젠더 이슈에 대한 성명문 등은 모두 Fwd 필진들이 특정 사건과의 조우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조응한 결과였다.

# 매듭으로서의 장소, Fwd

다시 잠시 매시의 공간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매시(2016)는 공간은 배경처럼 고정되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궤적의 관계가 교차하면서 일시적으로 결합한 장소이자 사건이라고 제시했다. 이 시각에서 본다면, 내가 Fwd를 “공간”으로 보자고 제안할 때에 공간이란, 잉골드(2024b)가 제시한 “매듭으로서의 장소”에 가깝다. 

살아서 뻗어나가는 여러가지 제각의 선들,즉 Fwd 멤버들이 우연히 엉키고 조응하는 과정에서 매듭을 만든다. 그리고 바로 매듭이, 하나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Ingold, 2024b:200). 나는 Fwd를 바로 이런 매듭으로서의 장소라고 이해한다.

잉골드가 『라인스』에서 제시한 허브 중심의 장소와 사람 모델(왼쪽)과 얽힌 생명선의 매듭으로서의 장소(오른쪽).
(그림: Paavolainen, 2011) 

왼쪽의 장소 모델은 안과 밖이 명확히 나뉘며, “거주자”들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배경이나 용기(container)처럼 기능한다. 반면에 오른쪽에 제시된 매듭으로서의 장소는 생명선들의 얽혀감, 즉 사람들의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된다. 

Fwd에 나중에 합류한 구성원들은 종종, 밖에서 보았을 때 Fwd가 하나의 동질된 합의가 존재하는 단체처럼 보였다고 말하곤 했다. 이는 마치 Fwd를 2019년에 매끄럽게 닫혀 보이는 노란색 동그라미 로고처럼, 고정된 경계와 내부 질서가 명확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상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잉골드가 비판하고자 한 허브 중심의 장소 모델과 닮아 있다. 관계의 얽힘과 생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공간을 사람과는 무관하게 미리 정해진 형태로 존재하는 그릇처럼 여기는 방식이다. 이는 그 뒤에 있는 다양한 시간성과 리듬, 속도, 거리감, 감정의 흐름들의 선이 얽힘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 개별 선들의 다른 리듬, 속도, 방향, 온도의 차이들은 때로는 우리에게 “내가 계속 Fwd에 남아 있어도 되나?” 혹은 “내가 계속 페미니스트일까?”라는 회의, 거리감, 망설임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차이들이야말로 Fwd가 공간임을 말해준다. 매시와 잉골드가 말했듯,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이가 있는 궤적들이 얽히고 만나며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매듭을 지나 제 갈 길을 가는 선

잉골드(2024a)는 선의 “삶이 계속되는 한 끝단은 언제나 풀려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한때 함께 묶여 있던 선들은 제 갈 길을 간다”고 말한다(56). Fwd라는 매듭으로 잠시 엉켰던 Fwd 구성원들 또한 6년의 시간 동안 취업, 박사재학, 유학 준비, 결혼 등 다양한 갈래의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시간이 갈수록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 이전만큼 페미니즘 이슈에 뜨겁지 않다는 거리감과, 사는 세계와 환경, 시차가 달라지면서 생긴 “다름”으로 Fwd 멤버들은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페미니스트 연구자일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잉골드(2024a)는 말한다. “매듭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56) 잉골드는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묶였던 흔적으로 선의 기억 속에 간직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 때 얽혔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가더라도, 그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조응했던 흔적들은 그들의 여정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잉골드가 말하듯,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생성 중인 여정에 있다. Fwd는 페미니즘 리부트 흐름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향, 속도, 리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여정 중에서 다양한 궤적을 따라 들어오고 나가면서 잠시 얽혔다가 흩어지고, 지금도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 “여전히 생성 중”: 페미니즘 리부트의 다중적 궤적들

Fwd를 잉골드의 매듭으로서의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페미니즘 리부트의 10년 또한 하나의 입체적인 공간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인류학자 애나 칭(Anna Tsing)이 『세계 끝의 버섯』에서 복수의 시간성과 리듬의 예시로 제시한 다성음악의 이야기는 -비록 작은 맥락은 다를 수 있지만- 페미니즘 리부트를 다채롭게 상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서양 음악에서 다성음악은 자율적인 멜로디가 뒤얽히는 음악을 가리킨다. (…) 이런 음악은 현대인이 듣기엔 그 형식이 구식 같고 낯설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다성음악의 자리를 통일된 리듬과 멜로디로 작곡되는 음악 형식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바로크 양식 이후에 등장한 고전음악은 통일성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논의한 의미의 ‘진보,’ 즉 시간의 통일된 조율이었다. (…) 나는 다성음악을 처음 접하면서 감상에 새로이 눈뜨게 됐다.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등장하는 멜로디들을 골라내야 했고, 또한 그 멜로디들이 함께 빚어내는 화음과 불협화음의 순간들에도 귀 기울여야 했다. 배치가 갖는 복수의 시간적 리듬과 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알아차림이 필요하다.”“(Tsing, 2023: 58-59)”

이처럼 각각의 멜로디들이 하나의 선율로 통일되지 않으면서도 함께 울려 퍼지는 장을 상상해보자. 각각의 선율은 잉골드가 말한 선,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에 각자의 속도, 온도, 감각으로 참여해왔던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궤적으로 상상해보자. 

어떤 선들은 특정 이슈에 깊이, 혹은 살짝 스치며 얽히고, 어떤 선들은 한때는 뜨겁게 조응하다가 페미니즘 장과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선들은 나중에 새로 합류해 다른 매듭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리듬과 궤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의 뒤얽히며 만들어내는 그 관계의 장. 이것이 매시가 제안하는 공간의 예일 것이며, 바로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한 가지 서사의 궤적이 아닌, 얽히고 교차하는 다중적인 궤적들로 형성중인 페미니즘 리부트의 공간적 상상.
원본 이미지는 다른 맥락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여러 리듬과 속도, 정동이 공존하는 장으로서의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을 감각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비유로 재구성해 사용했다. (이미지: Klenk, 2018: 318 재구성; 삽화: April Brust)

이렇게 잉골드 “선”과 매시의 공간적 상상력을 통해, 빗겨나고 어긋난 리듬을 드러내는 작업을 거치며, 나는 엇박과 불협화음이 열린 공간의 본질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나 자신의 엇박을, 어긋난 감정의 온도와 시차를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동안 “페미니즘 리부트,” “페미니스트,” 혹은 “Fwd의 일원”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놓고, 나의 여정 또한 그 정체성과 함께 하는 하나의 선 위에 고정시켜버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상상 속 “페미니스트”는 하나의 시간선 상에 서서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강박 아래 있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리부트의 10년을 직선적인 시간선 위에 욱여넣고, 메인 서사의 궤적만을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는, 그 안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던 다양한 리듬을 포착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공간적으로 현재를 상상하기 시작한다면, 독특한 시간성들을 엮어 새로운 구성으로 만들어내는 가능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Vol. 9의 다섯번째 기사 오온의 ““두 유 노 4B?”: K-페미니즘과 디아스포라 곤경”(글 보기)은 ‘지금-여기’에 과거의 다양한 궤적들이 뒤엉켜 함께 울려퍼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로 여겨지는 4B 운동의 궤적은, 저 태평양 넘어 다른 시차와 공간에서 “엇박”으로 울려 퍼지는 선율로 다시 포착된다. 공간적 상상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선율이 닿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동시대적 다른 장소를 상상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적 귀와 눈을 갖는 일이다. 그렇게 확장된 세계관 안에서, 미국이라는 또 다른 방향에서 흘러온 궤적의 리듬과 만나고 이를 인정할 때, 매시가 말하는 언제나 생성 중인 관계의 공간이 열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다른 궤적들이 얽히며 새로운 일시적 마주침을 만들고, 관계를 맺고, 매듭을 형성하며, 또 다른 장소의 가능성들을 펼쳐내고 있다. 우리 또한 다른 관심사와 속도, 리듬, 방향으로, 엇박의 궤적들로 함께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또 다른 얽힘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화음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계속되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장을 설렘 속에서 열어두자.


참고문헌

  • Ahmed, S.(200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서울: 오월의봄.
  • Ingold, Tim(2007). Lines: A Brief History, Routledge, 김지혜 옮김(2024),『라인스』, 포도밭.
  • Ingold, Tim(2015). The Life of Lines, Routledge, 차은정 외 옮김(2024),『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OIUI.
  • Massey, Doreen B.(2005). For Space, SAGE Publications, 박경환 외 옮김(2016),『공간을 위하여』, 심산.
  • Allen, J. (2022). Geography Matters! (팟캐스트 에피소드). Spatial Delight. The Sociological Review Foundation. https://www.youtube.com/watch?v=F7qFmdgTYJM
  • Klenk, N.(2018). “From network to meshwork: Becoming attuned to difference in transdisciplinary environmental research encounters”, Environmental Science & Policy, 89, pp.315–321. https://doi.org/10.1016/j.envsci.2018.08.007
  • Paavolainen, T.(2011). Textures of thought: On dramaturgy, cognitive ecology, and evental space. DREX / Centre for Practise as Research in Theatre, University of Tampere. https://researchportal.tuni.fi/en/publications/textures-of-thought-on-dramaturgy-cognitive-ecology-and-event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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