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문(波紋)〉: 자기 확신의 고립에서 낯선 타자와의 연대로

소영

한국 사회가 탄핵 정국으로 혼란스럽던 지난 1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파문〉이 개봉했다. 이 작품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고립되었던 중년 여성이 낯선 타인을 향해 다시 열리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 요리코의 여정은, 부정선거라는 비상식적 믿음이 법원 폭동으로까지 번졌던 지난 겨울의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남태령을 비롯한 광장에서는 연대의 순간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 글은 〈파문〉 속 요리코의 변화를 따라가며, 그와 함께 다시금 탄핵 정국의 풍경을 되짚고자 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이름을 떠올리면 〈카모메 식당〉(2007), 〈안경〉(2007) 같은 ‘힐링 영화’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파문〉은 이전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이 작품은 재난, 여성, 계급, 장애, 사이비 종교 등 일본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감독의 변화는 작품 활동이 중단된 시기, 일본 사회의 정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재난 대응 실패로 신뢰를 잃었고, 곧 자민당이 정권을 되찾았다(기사 보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 사회의 비판적 목소리는 급격히 위축됐고 보수화는 가속화됐다. 감독은 그 흐름 속에서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5년 만에 복귀한 나오코 감독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에서 트랜스젠더 가족의 삶을, 〈강변의 무코리타〉(2021)에서는 고독사와 가난을 조명했다. 〈파문〉(2025)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여성 주인공의 내면화된 감정 억압과 그것이 변화하게 되는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파문〉의 주인공은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던 당시 도쿄에 살던 중산층의 평범한 주부 요리코다. 어느 날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까지 버려둔 채 돌연 집을 떠나버리고, 요리코는 깨끗한 물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녹명회’에 빠지게 된다. 남편의 가출 후 요리코는 배신감을 느끼는 한편, 비로소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생겼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암에 걸렸다며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당연하다는 듯 집주인 행세를 하고, 요리코는 겨우 구축해 놓은 자신만의 공간이 침범받는다고 느낀다. 갑자기 찾아온 남편에게 강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요리코는 겉으로 아무 표현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밥을 차려준다. 집안에서의 장소 상실은 몸의 침범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리코는 병수발을 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성추행을 당해 불쾌함을 느낄 때조차 화를 내지 못한다. 자신이 캐셔로 일하는 마트에 진상 할아버지 손님이 찾아와 물건이 망가졌으니 반값에 달라며 호통을 칠 때도 요리코는 가만히 당하고 있다가 휴게실에 숨어 땀을 닦는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분노를 느끼는 요리코에게 녹명회는 깨끗한 물 ‘녹명수’를 마시면서 감정을 ‘정화’하고 남편을 용서하라며 자기희생을 종용한다. 사실 요리코가 느끼는 분노와 증오는 여성이 마땅히 돌봄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가부장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제된 돌봄에서 비롯된 부정적 감정을 그저 감내하라는 녹명회식 해법은 모순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요리코는 억압적인 해법에 의존할 만큼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누구도 요리코의 돌봄 노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야만 파문이 생긴다”고 말해주는 녹명회의 공간은 ⎯그것이 설령 자기희생일지라도⎯ 요리코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장소로 느껴졌을 것이다.

〈파문〉은 주인공이 내면화한 감정 억압을 고산수 정원의 이미지로 시각화함으로써 여성 억압의 내면적 풍경을 그려낸다. 요리코는 녹명회에서 배운 교리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한다. 명상을 수행하듯 요리코는 매일 아침 고산수 정원의 모래밭에 정갈한 물결무늬를 그려놓고 출근한다. 고산수 정원은 일본식 정원으로 물 없이 돌과 모래로 산수의 풍경을 표현하는 정원 양식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문(波紋), 즉 물결무늬는 영화의 핵심 이미지로 작동한다. 매일 아침 고산수 정원의 모래밭에 파문을 그리는 일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든 잠재우기 위한 요리코만의 명상 방법이다. 그 결과로 화면에 비치는 멈춰 있는 물결의 이미지는, 감정을 억누른 끝에 그가 도달한 표면적인 고요함을 보여준다.

모래에 파문을 그리면 그 물결이 그대로 고정되듯이, 요리코는 동요를 일으킬 만한 모든 낯선 이의 침범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채 평온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누군가 자신의 정원에 침범하여 물결무늬가 망가진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대상을 경멸한다. 그 침입자가 고양이든 남편이든 말이다. 그런 요리코가 낯선 타자의 침범을 허용하는 첫 번째 순간은 자신이 데려온 거북이가 모래밭을 향해 맹렬히 기어갈 때다. 거북이가 파문을 망가뜨리는데도 요리코는 편안하게 웃고만 있다. 요리코는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요리코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마트에서 청소 노동을 하는 직장 동료 미즈키와의 관계다. 휴게실에서 요리코와 처음 마주친 미즈키는 완경기 증상으로 열이 올라 힘들어하는 요리코를 알아봐 주고 수영이 도움이 된다며 조언도 건넨다. 조언에 따라 요리코는 수영장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다시 마주친 둘은 점차 친해진다. 요리코의 사정을 듣게 된 미즈키는 남편에게 복수를 하라며 녹명회와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매번 참기만 하던 요리코는 미즈키를 통해 감정을 표출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남편에게 “네가 버린 아버지를 내가 돌봤다”며 화를 낸다. 진상 손님이 또다시 찾아와 ‘손님은 신’이라며 반값을 요구할 때도 요리코는 굳은 표정으로 받아친다. “남편이 암이에요. 당신이 신이라면 남편 좀 살려주세요.” 손님이 당황하며 도망치듯 마트를 빠져나가자 요리코는 복수의 쾌감을 맛본다.

요리코가 처음에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는 이처럼 분노와 적대감으로 출발한다. 그는 자꾸만 자신의 공간을 멋대로 침범하는 남편을 죽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기를 바랐던 요리코의 소망은 미즈키와의 관계 속에서 점차 누군가가 살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변화한다. 미즈키가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그가 키우던 거북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요리코는 거북이를 살리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간다. 거기서 요리코는 온갖 쓰레기와 잔해가 뒤엉켜 냄새가 진동하는 집 안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발 디딜 틈이 없는 집 안의 한쪽 구석에서 그는 제단에 놓인 어린아이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 순간 그는 언젠가 미즈키가 말했던 ‘가출한 아들’이 사실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미즈키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아들을 잃었고, 그 일을 잊게 될까 두려워 차마 그때 어질러진 집을 치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사진이 영정처럼 보이는 풍경에 압도된 요리코는, 미즈키의 상실과 절망을 온몸으로 느끼며 처음으로 엉엉 울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신이 구해온 거북이가 물결무늬를 향해 걸어가는데도 요리코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아이를 잃고 정돈되지 못한 타인의 지저분한 마음에 함께 머물렀던 그 시간 이후에야, 그는 파문이 흐트러지는 일을 침범이 아닌 공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자에 대한 요리코의 태도 변화는 진상 손님을 다르게 응대할 때 재확인된다. 차마 집을 치우지 못하는 미즈키 대신 그의 집을 치워준 요리코는, 다음 날 마트에 출근하여 계산대 앞에 선 진상 손님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지난번 요리코의 복수 때문에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는 진상 손님에게 요리코는 흔쾌히 반값에 드리겠다며 밝은 표정으로 응대해 준다. 반값을 요구하며 ‘진상을 부렸던’ 그의 행동은 사실 과장된 연기였으며, 요리코 역시 마음 한켠으로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이제껏 그를 증오하며 굳은 표정으로 응대해 왔던 요리코가 처음으로 그의 연기에 적극적으로 응해준 것이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미즈키 집의 잔해들을 대신 닦고, 쓸고, 정리해 주면서 요리코는 미즈키의 마음을 돌보는 동시에 다른 존재를 증오하던 자신의 불순한 감정도 함께 정화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낯선 타인을 향해 열릴 수 있었다. 변화의 정점이 되는 마지막 엔딩 씬에서 요리코는 고산수 정원의 모래밭에서 비를 맞으며 플라멩코 춤을 춘다.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려는 듯 빠른 박자의 곡에 맞춰 열심히 발을 구르면서 요리코는 스스로 물결무늬를 망가뜨리고, 결국 집 바깥으로 나가 ‘올레!’하고 외치며 영화는 끝이 난다.[1]

영화는 요리코가 ‘깨끗한 물’을 숭배하게 된 이유를 단순히 개인의 비합리성에서 찾지 않는다. 영화 속 뉴스는 원전 사고로 인해 수돗물이 오염됐다고 경고하며, 요리코는 마트에 가서 개인마다 2통으로 한정된 생수를 사러 간다. 즉, 요리코가 깨끗한 물을 숭배하게 된 데는 수돗물에 대한 불안과 정부 대응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실제로 나오코 감독은 대지진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수를 사 먹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돌봄 노동을 강요받으면서도 정작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없이 고립된 여성의 구조적 취약성도 작용했다. 사이비 종교는 정서적 지지를 가장하여 이와 같은 구조적 취약성에 개입한다. 가정주부가 대부분인 녹명회는 서로의 헌신을 위로하는 공간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이 돌봄을 감내해야 한다는 가부장제의 정서를 반복하고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결국 〈파문〉은 비상식적인 확신에서 어떤 사회적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억눌린 감정이 사회적으로 다뤄지지 못할 때 왜곡된 분출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선을 한국 사회로 옮겨와 지난 탄핵 정국을 다시 떠올려본다. 지난 겨울 ‘애국시민’을 자처한 이들은 태극기 집회에서부터 세력화되었다. 여태껏 한국 사회는 ‘태극기 부대’를 단순히 비합리적인 개인들로 치부했고, 그 밑에 깔린 케케묵은 감정의 사회적 원인을 다루는 데는 실패해 온 것 같다. 그러나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보수 기독교인이 아직도 공산화의 징후를 찾아내고 심지어 그것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끼는 데는 트라우마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작용한다.[2] 한국 사회는 자꾸만 도래하는 이들의 트라우마적 감정을 공적으로 다루지 못했고, 그 결과 태극기 부대는 계엄령을 정당화하는 ‘애국시민’으로 성장했다.

〈파문〉은 사회적으로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해지는 ‘뒷공간’이 필요하다고 암시한다. 타자를 침범이 아닌 공명의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 요리코의 변화는 직장 동료 미즈키와의 관계에서 시작됐고, 둘의 마주침은 다름 아닌 ‘휴게실’이라는 무대 뒤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후기가 둘의 사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글은 연대가 형성되는 공적인 방식을 상상해 보기 위해 그들이 처음 마주친 장소인 휴게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휴게실과 대비되는 마트의 계산대는 말끔한 가면을 쓰고 올라야 하는 공적인 무대다. 진상 손님 때문에 땀이 나기 시작한 요리코는 무대에서 내려와 휴게실이라는 뒷공간으로 향한다. 휴게실은 집안에서조차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했던 요리코가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허락받은 장소인 동시에,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휴게실은 녹명회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녹명회는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통일체로 그려지며, 이곳에서 노숙인, 장애인, 암 환자는 일방적인 ‘선행’의 대상으로 타자화된다. 반면 휴게실은 서로 다른 세계관이 부딪힐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이곳에서 미즈키는 진상 손님에게도 반값을 요구하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꺼내고, 이후 요리코는 그의 연기에 화답하면서 처음으로 그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남태령 시위를 비롯한 무수한 탄핵 촉구 시위에서 희망을 맛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거리의 한복판에서 농민, 여성, 성노동자, 성소수자, 반도체 노동자, 장애인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장소들이 잠시나마 낯선 타자와 머무를 수 있었던 사회적 ‘휴게실’이 되어준 것은 아닐까.   


참고 문헌

  • 전순영(2020). “트라우마 기억의 관점에서 분석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태극기집회 참여 현상”, 『기독교사회윤리』, 제48호, 257-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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