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은

* 이 글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취업-결혼 중심 ‘생애과업’과 젠더화된 돌봄의 경합 : ‘가족돌봄청년’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의 일부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1. 들어가며
‘가족돌봄청년’이라는 범주가 등장한 시기는 2021-2022년으로, 코로나 19 위기로 인한 돌봄 공백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돌봄청년이 마주한 어려움은 ‘자립의 기회를 놓친 청년’이라는 개별화된 문제로 재현되면서, 돌봄 공백에 대한 구조적 논의는 소거되었다.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전수조사와 지원사업들이 등장한 지 3년이 되어 가지만, 이번 21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공약에서 여전히 청년은 돌봄과 분리되어 있었다. 청년 관련 공약들은 일자리·주거·자산형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돌봄 관련 공약들은 고령화·저출생 문제의 대응책으로 논의되거나, 기존의 시범적으로 진행하던 복지 정책을 확대·강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돌봄 관련 제도의 구조적인 개혁보다는 일터와 돌봄의 분리에 기반한 돌봄 정책을 확대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처럼 청년의 보편적 생애가 돌봄과 분리된 논의 지형에서는, 돌봄 필요 가구원과 함께 살면서 일자리도 찾아야 하는 ‘젊은 돌봄자(Young Carer)’[1]들이 “취약계층 청년”[2]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1] 가족돌봄청년’은 국립국어원의 권고에 따라 정부에서 ‘가족돌봄휴가’라는 법률 용어를 차용해 ‘영케어러(Young Carer)’를 번역한 용어이다. 본고에서는 친인척, 친구, 동거인 등, 가족이 아닌 사람을 돌보는 어린 나이의 돌봄자들까지 포괄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가족돌봄청년’ 대신 ‘영케어러’ 혹은 ‘젊은 돌봄자’를 혼용하고자 한다.
[2] 2023년 9월 보건복지부는 가족돌봄청년, 고립· 은둔청년, 자립준비청년을 비롯한 “취약계층 청년”을 위한 복지 지원책인 「청년 복지 5대 과제」를 발표한 바 있다.
현재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지원을 살펴 보면, 필자가 2년 전 석사논문을 작성할 때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기요양서비스,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등 기존의 돌봄·의료 서비스와의 연계, 금융·주거·일자리 서비스 연계, 자기돌봄비 지원이 주요 골자이다. 기존의 복지 지원책들에 젊은 돌봄자를 연계하고 마는 것은 이들의 ‘취약성’을 보완해주지 않는다. 필자가 인터뷰한 연구 참여자들은 일자리 면접에서나 직장 생활 도중,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이 있다고 말하면 “긴급하게 휴가 낼 일이 좀 있겠네요?”라는 말을 듣는다고도 하였고, 실제로 입사 초기에 “그럼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일은 어떡해요?”라는 말을 듣고 해고 당한 경험도 있었다. 이는 직장에서 “애 키우면 급하게 퇴사하게 된다”라는 이유로 기혼 여성을 기피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 일-가정 분리와 관련하여 독박 돌봄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혼 여성들의 독박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문제에서 이미 여러 번 반복되어 다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돌봄청년의 지원 정책은 이러한 일-가정 분리 지형 위에서 형성되었고, 젊은 돌봄자들은 일터나 면접에서 “가족을 돌보느라 긴급하게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떡하냐”라는 회사의 시선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거나, 이러한 시선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 있다. 현재 영케어러들이 겪는 문제를 그동안 반복되어 온 독박 돌봄 문제와 연결짓지 않는다면, 아무리 돌봄자의 정책적 범주가 중년에서 청년으로 넓어지고, 돌봄자에 대한 지원이 많아져도, 현장과 제도 사이의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편, 실제로 청년기에 돌봄을 맡게되는 것은 중·장년기에 돌봄을 맡게되는 것과 다른 특수성을 보인다. 현재 청년 정책의 근거가 되는 「청년기본법」 을 살펴보면, 제4장 “청년의 권익증진을 위한 시책”의 하위 조항들은 “청년 고용촉진 및 일자리의 질 향상”, “청년 창업지원”, “청년 능력개발 지원”, “청년 주거지원”, “청년 금융생활 지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청년기가 안정적인 경제 활동 및 주거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시기로 상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년기에 원가족을 돌보게 되는 경험은 원가족으로부터 경제적·물리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규범과의 긴장 속에서 구성된다. 본고는 그중에서도 경제적 자립과 주거 독립을 모두 담지하는 ‘혼인’에 주목하였다. 혼인 여부는 자녀를 돌보는 기혼 여성과 원가족을 돌보는 가족돌봄청년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특히 여성 영케어러들에게는 혼인 여부가 돌봄 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 혼인 위에 그어지는 돌봄의 경계
젊은 돌봄자들이 모두 “내가 돌볼게.”라는 선언을 통해 돌봄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돌봄 부담의 비중은 가족 내에서 별도의 합의를 거치기보다는 물 흐르듯이 ‘정해져 간다.’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 신체적 역량을 갖춘 사람이 자녀/손자밖에 없어서 이들이 돌봄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돌봄 역량과 별개로 돌봄 역할이 정해지기도 한다. 특히 딸들은 가구 내 돌봄 필요와 딸로서의 위치가 특수한 방식으로 얽히며 ‘젊은 돌봄자-딸’이 되어 간다. 딸이라는 위치는 혼인 여부, 가족 내 서열 등과 맞물리며 돌봄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는 데에도, 이후 돌봄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하게 되는 데에도 중요한 골자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딸의 혼인 여부는 딸들에게 지워지는 돌봄 비중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기능한다. 딸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딸이 맡게 되는 가족 돌봄의 비중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결혼을 하신 상태였다면, 아버님을 누가 돌보게 되느냐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나요?)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엄마가 거의 전적으로 하시지 않았을까요? (중략) 지금처럼 완전 온전히 그냥 제 생활 다 두고 아빠를 보호자 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저도 남편이 있으면 그쪽 가정이 또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맡지는 않았을 것 같고 엄마도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지우>[3]
[3] 본고에 등장하는 연구참여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다.
지우는 결혼해서 남편이 생기면 “그쪽 가정”이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버지를 “전적으로” 돌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쪽 가정”과 지우의 돌봄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필자의 연구 참여자들 중 혼인을 한 형제·자매가 있는 참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혼자서 돌봄을 맡게된 이유에 대해, “그쪽은(형제·자매는) 그쪽 가정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즉, 돌봄 비중은 실제로 딸들, 혹은 딸들의 형제·자매가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보다는, 가구를 중심으로 결정된 것이다.
필자의 연구 참여자들에게 ‘혼인’은 과거에서부터 형성된 가족 서사와 맞물리며 ‘분가’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규범적으로 작동하는 혼인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딸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원가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며, 가족 돌봄을 독박으로 맡게 되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이 가족을 돌보는 여성 영케어러가 비혼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케어러의 결혼 선택은 원가족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으로 이해되며, 돌봄 대상자에게도 돌봄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와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성 영케어러의 혼인 여부는, ‘진정한 독립’을 의미하는 혼인의 규범적 맥락이 가구 중심적인 돌봄 분배와 맞물려, 돌봄 분배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3. “언제 또 아프실지 모르잖아요”: 일터의 문턱에서 배제되는 영케어러
일터를 중심으로 재편된 사회 조직은가족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한정시켰고, 그조차도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소수의 여성만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가족 돌봄이 드문 일로 이해되는 노동 시장은, 청년들이 돌봄과 ‘생애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어려움을 만들어낼까? <민아>의 경험을 통해 일-가정의 분리 지형에서 가족돌봄청년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부터 어떻게 주변화되는지 분석할 수 있다.
한 번은 아빠가 너무 아프셔서 제가 그때도 면접이 잡혀 있었는데 취소했어요. 아빠가 아프다는데 제가 어디 갈 수가 없잖아요. 아빠는 괜찮다고 하는데 아픈 사람이 지금 있으니까. 그 말씀을 드리고 제가 “혹시 이러이런 상황이 있는데 내일 면접을 가면 안 될까요?” 하니까 거기서는 이제 “언제 또 아프실지 모르는데 내일 오실 수 있겠어요?”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냥 아무래도 회사 입장에서도 좀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민아>
민아는 아버지를 돌보기 이전에 이미 수 년간의 일 경력이 있었지만, 지금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돌봄 관계는 취약성으로 형성된 관계이기 때문에 돌봄자에게 응급 상황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하지만 노동 현장과 가정이 분리된 구조에서는, 가족 돌봄이 일터에 포함될 가능성 자체가 처음부터 차단된다. 돌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응급 상황들은 ‘일 중심적 사회 조직’[4]에 의해 ‘일에 방해되는 시간’으로 의미화되고, 이는 가족을 돌보는 젊은 돌봄자들이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이다.
[4] 강이수(2007)는 한국 사회에서의 산업화 이후 일-가족 영역의 관계를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라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에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에서 남성노동력을 핵심 인력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남성의 가정 밖 영역과 일이 우선시되는 ‘일 중심적 사회 조직’으로의 변화가 진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미취업 상태의 영케어러 여성들은 돌봄과 생계 유지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시간제·단기간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정규직 노동시장으로의 접근이 더 어려워지게 된다. 특히 노동 시장에서 ‘나이듦’이란, 자신의 미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매 분 매 초를 관리해야 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즉, 미래에 시간제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나이가 될 것을 대비하여, 현재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한 준비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케어러 여성들은 가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긴급하게 발생하는 의료비, 요앙보호사 구인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를 포기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부딪힌다. 결국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의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은 제한적인 조건에 있는 여성들만이 이용 가능한 제도이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으로의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4. 누구를 돌볼 것인가, 누구와 가족일 것인가
영케어러들은 그동안 돌봄 대상자와 어떤 관계를 형성해 왔는지와 상관없이, 그저 법적 가족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느 날 갑자기 돌봄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영케어러들은 아버지/어머니/형제와 십 수년간 따로 살았어도, 연락을 끊은 지 오래 되었어도, 어느 날 갑자기 걸려 온 친척이나 병원의 전화를 받고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당장은 본인 혼자 아버지/어머니/형제를 돌보게 되어도, 영케어러들은 자신이 앞으로 돌볼 사람을 다르게 선택하거나, 혹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돌봄 관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인터뷰 참여자 중 <하윤>은 현재 아버지를 돌보고 있지만, 하윤이 아버지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고, 하윤의 향후 돌봄에 대한 계획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결혼을 하시고 난 이후에도, 만약에 돌봄을 계속 해야된다면?) 그거 이미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것들을 생각을 하셨어요?) 엄마는 진짜, 정말 한숨이 나는데, 엄마는 아예 그냥 해외로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트인 데로. 왜냐하면 정말 진짜 행복했던 시절이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거든요. 아기 때. 정말 탁 트인 데에서, 그니까 그냥 거기서 요양을 좀 시켜주고 싶어요. 그 생각은 이미 하고 있어요. 하고 있어. (그 생각을 언제쯤부터 하셨어요?) 아빠가 속썩이고 나서. <하윤>
하윤에게 독립이란 법적 가족으로 얽혀있는 돌봄 대상자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정서적 친밀함을 느끼는 어머니를 돌보며 살 수 있는 삶이다. 하윤은 늘 자신을 “속썩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와 자신이 정말로 행복했던 시절을 보낸 캘리포니아에서 어머니를 돌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하윤의 부양을 당연시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온 가족이 하윤에게 의존하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어머니를 보며, 하윤은 “아빠는 이미 가족으로 인지하지 않게된 지 오래되었다”라고도 말했다.
젊은 돌봄자들을 ‘가족돌봄청년’으로 호명할 때, ‘이들이 돌보는 가족은 어떤 가족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십 수년 간 연락도 안 했던 법적 직계 가족을 돌보게 된 영케어러의 맥락과, 십 수년 간 한 집에서 같이 산 친척을 돌보게 된 영케어러의 맥락은 같지 않다. 이들을 모두 ‘가족돌봄청년’으로 뭉뚱그려 호명할 수 있을까? ‘가족돌봄청년’이라는 용어는 젊은 돌봄자들의 돌봄 경험을 담아내기 부족할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관념적 표상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돌봄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한다. 따라서 ‘젊은 돌봄자들은 어떤 가족을 돌보는가?’라는 질문에서 더 나아가, ‘젊은 돌봄자들이 돌보는 대상은 가족이어야 하나?’라는, 기존과 다른 관점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5. 결론: 누구나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위하여
그렇다면 영케어러 돌봄 논의의 인식적 외연을 넓히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필자가 참관했던 더불어 민주당의 ‘사회권 보장 불평등 완화 위원회 3차 토론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토론회의 주제는 “영케어러에서 케어러로: 선별적 돌봄 아닌 보편적 돌봄!”이었으며, 입법의 장에서 본격적으로 돌봄의 외연을 보편적 권리로 다루었던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자리였다. 다만, 그동안 돌봄을 해왔던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 드러났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젊은 돌봄자들의 존재가 그동안 구조적으로 축소되었던 것이 아닌, 마치 새로운 사회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되었던 게 아쉬웠던 것이다. 그 토론회에서 이야기하는 청년들의 돌봄은,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이주 가사노동자 등, 그동안 돌봄 노동자들이 제공해 온 돌봄과 연결되고 있을까?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돌봄이 필요한 가구원과 동거하는 이들은 청년보다도 중장년층, 노년층이 더 많지만, ‘가족돌봄중년’, ‘가족돌봄노인’이라는 용어는 없다. 따라서 젊은 돌봄자들을 갑자기 늘어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 왔지만 청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가 최근에 주목하기 시작한 존재들로 봐야 한다.
돌봄의 인식적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는 기존의 접근과 다른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우선, 정책이나 지원사업을 기획할 때 돌봄 제공자-돌봄수혜자의 관계를 넘어, ‘돌봄’ 그 자체의 특성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돌봄 관련 정책 및 지원사업들 대부분이 돌봄이 필요한 사람의 생애주기, 혹은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생애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돌봄 필요를 아동기 혹은 노년기에만 발생하는, 혹은 청년기 돌봄제공자에게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분절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돌봄을 단절적이고 일회적인 행위가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정적·신체적·사회적 친밀도가 변화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본다면, 기존과는 다른 접근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돌봄 진입기-돌봄 성숙기-애도기’처럼, ‘돌봄 주기’를 하나의 궤적으로 보는 상상력을 더할 수 있다.[5]
[5] 이 예시는 “돌보는 조직은 무엇을 바꾸는가”라는 주제의 DEI 세미나에서, 영케어러 당사자 커뮤니티 “N인분”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케어러 지원 활동가의 발표 내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다음으로, 기존에 가족을 돌보던 사람들의 경험이 축소된 구조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토론회뿐만 아니라 나이 어린 돌봄자들의 경험에 대한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돌봄을 받아야 할 아동이 돌봄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고, 둘째는 ‘생애과업을 수행해야 할 청년이 돌봄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문제제기의 초점이 아동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청년은 일해야 한다는 표상에 기대어 있다. 하지만 많은 아동/청년 돌봄자들은 바로 그 표상 때문에 주변에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어려워 한다. ‘아동은 보호받아야 한다’, ‘청년은 생애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강한 규범적 인식은 오히려 돌봄을 수행하는 아동이나 청년의 현실을 지우고, 그들의 목소리를 주변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에 기반한 문제제기는 돌봄자 개인의 경험보다 그들이 ‘정상적인 생애궤도’에 부합하는지를 우선시하게 하며, 그로 인해 돌봄 공백에 대한 구조적 원인이나 대안에 대한 논의가 축소된다. 따라서 아동과 청년에 대한 규범적 인식에서 벗어나, 각 돌봄자들의 목소리가 축소되었던 구조적 매커니즘을 파악하는 데 문제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나이 어린 돌봄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돌봄이 특정 시기, 특정 집단에만 속한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돌봄의 보편성과 다양성이 더욱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돌봄 행위와 돌봄자의 외연을 넓히다 보면, 겹치고 중첩되는 영역이 생기면서 보편적 돌봄을 위한 논의의 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봄이 가족 내/외의 구분, 아동/청년/노인의 구분과 얽히면서 발생하는 특수성에 주목하면서도, 돌봄 그 자체는 보편적인 권리로 두어야 한다. 돌봄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권이라는 보편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다양한 돌봄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 강이수 (2007). “산업화 이후 여성노동시장의 변화와 일-가족 관계” 『페미니즘 연구』 7(2), 1-35쪽.
너무 멋진 글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눈치를 보지 않는 사회가 됐음 좋겠고, 되기위해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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