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우정과 사랑의 교집합 혹은 합집합

🍀싱두

릴리 댄시거 지음, 송섬별 옮김(2024; 2025).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파주: 문학동네. 표지 이미지

우정과 사랑 그 어느 사이

종종 나를 둘러싼 여러 관계를 다소 감상적으로 돌아볼 때가 있다. 가장 최근에 그랬던 적은 영화 <해피엔드>(2024)를 본 후였다. 영화의 주인공 유타와 코우는 영화의 시대 배경인 근미래 일본을 살아가는 고등학생으로, 테크노 음악을 좋아해 교내 음악 연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우정을 이어간다. 몸 전체를 감싸는 울림과 리듬에 심취하는 시간은 기나길 인생에 비하면 찰나일 뿐이지만, 그 순간에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염원, 혹은 착각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의 소동을 계기로 코우와 유타는 각자가 위치한 곳이 상이했음을 깨닫고 조금씩 멀어진다. 상영이 끝나고, 영화의 스토리와 비슷하게 빛이 바랬던 내 주변 사람과 관계들이 문득 떠올라 “많은 관계가 결국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라고 한편으로 생각하면서도 조금 서글퍼졌다. 그런데 이다음, 그러니까 성인이 된 다음 두 사람은 다시 관계를 이어갔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아마 안 그러지 않을까?

영화 줄거리 설명과 간단 소회를 살짝 제쳐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둘이 사랑한다.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다. 근데 둘 다 모르거나 적어도 한 사람은 모른다. 아무 근거 없이 망상을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극 중 초반 유타는 코우에게 “사랑해”라고 말한다. 과대 해석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둘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 이후 어색하게 어긋나는 모든 대화는 권태기를 맞이한 연인의 그것을 닮았다. 코우가 다른 여자아이와 연애한다고 오해해 야살스럽게 질투하는 유타의 행동을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지?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 불명 밈 마냥, “이런 게 우정이면 난 친구 없다.”

이렇듯 ‘우정 이상 사랑 이하’라는 미묘한 관계성은 여러 미디어 콘텐츠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표면적으로 우정을 자처하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보통의 연애 각본을 수행하는 연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이는 쉽게 이성(남녀) 간의 썸 등으로 축소되곤 하는데(좀 더 납작한 버전으로 여/남사친 논쟁이 있다), 그 틀 너머 보다 난해하고 수상한, 짐짓 ‘퀴어한’ 지점을 포착하게 되면 관계를 이야기하는 일은 훨씬 풍성해지며 한층 깊이를 더한다. 말하자면 같은 성별의 친구에게 느닷없이 설렜던 때, 동성 친구에게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순간 많은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 느꼈던 복잡하고 이름 없는 감정을 풀어낼 언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2024; 2025)는 바로 그 언어를 통해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해 온 여성 간의 우정과 사랑 사이를 섬세하게 다루어 풀어내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다정하고 복잡한 여자들의 세상

책의 저자인 릴리 댄시거는 어렸을 적부터 사촌 여동생인 사비나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그가 처음 러브레터를 보낸 대상도 사비나였고, 부모님을 제외하고 처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도 사비나였다. 몇 번의 이사와 이주를 겪으며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지만, 둘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서로를 만나러 갔다. 친구를 사랑하는 일의 눈부심을 사비나는 댄시거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줬다. 예상치 못한 단절은 사비나의 스물한 살 생일 파티를 앞두고 일어났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집 앞에서 살해당했고, 댄시거는 그날 이후 자신을 구성하던 커다란 세계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아직 어렸던 댄시거는 첫사랑을 잃은 상실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마구 흔들렸고, 고통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일을 그저 애통한 비화, 범죄 이야기로만 재현하지 않는다. 첫사랑을 잃은 슬픔에 뒤덮인 자신의 옆에서, 또 그런 자신을 대가 없이 사랑하는 여자들이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번갈아 내 곁을 지켜주었던 게 기억난다. 룸메이트 리아는 위스키와 담배와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챙겨주었고, 때로는 뭐라도 좀 먹으라면서 저녁에는 일하러 가기 전 잠깐이라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헤더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데도 우리 집을 찾아와 다섯 층 아래 거리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내 곁에 있어 주었다(29쪽).”

댄시거는 사비나로부터 배운 사랑을 그다음 이어지는 여자들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관점으로 활용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바, 동네 공원에서 술과 마약에 심취하고, 여자 친구들과 애무에 가까운 키스를 나누며 각자 몸의 경계를 흐트러뜨렸다. 내가 오로지 ‘나’이지 않고, 내가 너에게 흘러들어 ‘우리’로 존재하게 되는 시간을 즐겼다. 그 시간 동안 감각했던 관계의 양상은, 정상성으로서의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정이라 불리게 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또 서로에게 온전한 성욕을 느끼는 상태라고 단언하기에도 뭔가 부족했다. 사비나를 사랑했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댄시거는 그러한 여자들 관계 사이의 불분명함과 복잡함을 한편 자매애로 해석하기도 했다.

“서로를 자신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신체적 친밀성이 내재한다. 그건 우리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식이다. 우리는 손잡고 길을 걸었고, 때로 서로의 집에서 꼭 끌어안고 자기도 했고, 공연을 보다가, 특히 엑스터시를 복용했을 땐 서로를 애무하기도 했다. (…) 그건 마치 서로를 삼키고, 또 서로에게 삼켜지며, 침과 숨결을 나누고 싶은 것에 가까웠다…… 이렇게 쓰자니 역시 섹스를 묘사하는 것 같지 않나? 하지만 아니다. 나도 어떤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껴 키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헤일리와의 키스는 그런 게 아니었다(54쪽).” 

그렇다 해서 댄시거는 그저 그 여자애와 키스하고 싶었던 자신의 천연덕스러운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동시에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쉽게 정체화하지도 않는다. 키스를 나누었던 여자 친구가 “이성애자와는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반발심이 들었고,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걸 단박에 깨달았으나 애써 수정하지 않았다. 그냥 담배나 피우기로 했다. 혼란을 혼란인 채로 두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수치스러움과 슬픔은 사비나를 애도하는 마음과 종종 뒤섞였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들의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유영하던 시기가 점점 저물어갈 때쯤, 댄시거는 이번엔 그 시절을, 그 당시 주고받았던 소중한 호의를 돌봄으로 다시 한번 돌아본다. 서로가 가장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 늘 관계의 문을 열어두고 곁을 내어주는 일이 가장 섬세한 돌봄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돌봄이 반드시 타인의 기준에서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고, 정돈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댄시거가 아, 이게 돌봄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계기도 그랬다. 돌봄은 자주 거친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함께 담배를 말아 피울 때 실현되었다.

“서로를 모르던 시절, 헤더가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앉아 그날 오후 내내 피워도 충분할 만큼의 담배를 말아주었던 일을 그후로도 잊지 않았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몹시 중요하게 느껴졌다. (…) 어쩌면 이 돌봄이야말로 지금 내가 말하려는 바의 핵심인 듯하다. 누구에 관해 신경쓰는care about 것을 넘어, 그 사람을 위하고care for, 돌보는take care of 일(191쪽).”

댄시거는 이 돌봄이 마치 엄마 노릇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말아주는 엄마가 그렇지 않은 엄마보다 많을 가능성은 낮지만. 그의 관점에서 여자들은 서로를 대상으로 모성애를 표현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엄마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어린 시절 가족 문제(부모의 이혼과 약물 중독, 방치 등)로 갖게 된 모성애의 빈자리를 여자 친구들의 돌봄이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진짜로 한 아이의 엄마인 상태와 엄마 노릇을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댄시거는 엄마 노릇이 꼭 엄마인 상태를 전제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저, 꼭 누군가의 실제 엄마여야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타인에게 자양분을 주고 돌보는 일, 그 사람에게 다정함을, 그리고 대체로 그 사람에게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는 세계에서 정서적 쉼터를 내주는 일, 사랑받는 사람이 그 사랑이 자기 삶을 지탱한다고 느낄 만큼, 세상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 절대 들지 않을 만큼, 맹렬하게, 무한하게 사랑을 쏟아붓는 일.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내게 해주는 일이자 내가 그들에게 해주고자 하는 일은 바로 그런 것이다(194쪽).”

낯선 이야기에서 느끼는 기시감, 그리고 번역

이 책을 읽고 난 후, <해피엔드>를 본 후에 그랬듯 약간은 어쩔 수 없이 나와 얽혀있던 관계들, 그중에서도 여자들과의 관계를 돌아보았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애틋하게 여기고, 다정함을 주고받고, 미워하고, 돌보아주었던 몇몇 주요 인물과 장면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었다. “나 그때 그거 우정 아니고 사랑했던 거였나?” 하면서. 그래서인지 겪어본 적 없는 저자의 어린 시절을 접하며 계속해서 기시감을 느꼈다. 담배도, 마약도 입에 대본 적 없건만 여자들의 관계성엔 묘하게 익숙해서 여러 문화적 거리감에서 오는 낯섦을 이겼다. 우정 아니면 사랑, 사랑 아니면 우정이라는 고루하고 멍청한 이분법에, 저자인 릴리 댄시거는 혼란함 그 자체로 응수하는 선택을 했다. 그에게 “이런 게 우정이면 난 친구 없다”라는 말은 차라리 친구 관계의 속성을 재정의해 볼 수 있는 도발적인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우정이 그래서 뭔데? 그런 우정 못 하면 친구는 못 되는 건가?”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를 읽을 다음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길 바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의도와 다르게 여성들의 관계를 지나치게 낭만화한다고 해석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저자인 댄시거의 문장 대부분에서는 여자들의 우정과 사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그 이면에 그러한 태도가 단순한 이상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저자 또한 모르지 않는 듯하다. 때문에 좀 더 섬세하게 쓰고, 여러 번 쓰며 의도를 재확인하려 한다. 이를테면 댄시거는 자신의 글쓰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글을 쓸 때 나는 부드럽고도 취약한 진실을 드러내되 그것들을 딱 맞게 배치하고 강조해 어떤 것을 미화하고 특정한 효과를 위해 어떤 추한 부분은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외에도 ‘물론’, ‘그럼에도’ 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다시 한번 드러내는 방식으로 문장을 이어 나간다. 저자의 이 같은 노력을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알아볼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책을 국문으로 옮겨주신 송섬별 번역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끝 옮긴이의 말에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닿고 싶어서 읽고 쓰고 번역한다”라고 썼다. 여성, 성소수자, 노인, 청소년이 등장하는 책을 좋아한다고도 밝혔다. 그의 책 취향이 다행히도 나와 겹쳐서, 이 책을 읽기 전 벌써 몇 권이나 그가 번역한 책을 접했다.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2021; 2024)(관련 서평 보기), 『당신 엄마 맞아?』(2012; 2019), 『죽음의 스펙터클』(2015; 2016) 등등. 그가 옮긴 글에서는 언제나 저자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이 듬뿍 느껴져서 좋다. 해서 더 많은 이들이 그의 번역서를 다양하게 읽어봤으면 한다. 저자 릴리 댄시거를 존경하는 마음과 번역자를 향한 애정을 담아, 송섬별 님이 쓴 옮긴이의 글 한 토막을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범죄 이야기, 혹은 죽음 이야기가 아닌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는 점을 가장 좋아한다. 그 안에 담긴 용감함이 좋다. 우정의 가장 핵심적인 재료는 용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치열하게 따라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의 곁에 있다는 것은 네 이야기가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아물지 않은 나의 취약한 부분을 열어 보이는 일이다. 이 이야기의 주도권을 내 손에서 네 손으로도 일부 넘겨주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확인하고, 시험하고, 계속해서 실패하는 일이다. 마침내 어느 깊은 시간이 찾아와서, 그래서 어디까지가 나의 몸이고 어디서부터 너의 몸이 시작하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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