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가능성을 통해 페미니즘 리부트를 재해석하기: ‘망설임’의 정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송유진

계엄, 민주주의,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

이 글은 지난해 말 갑작스럽게 시작된 계엄 정국을 통과하며 생겨난 나의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시작된 계엄은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한 관심, 정확히는 그 시기를 지나온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관심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 올렸다. 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 여성들, 1980년대 민중가요와 최신 케이팝에 맞춰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색색깔의 응원봉을 흔들고, 광화문과 여의도와 남태령 고개를 오가며 연대를 말하는 청년 여성들의 모습은 대체 무엇이 저 여성들을 하나의 정치화된 집단으로 묶어 냈는지, 특히 또래 남성 집단과 구분되는 그들의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답으로 길어 올려진 것은 ‘페미니즘’과 ‘메갈리아’, 그리고 ‘강남역 살인 사건’, ‘소라넷 폐지운동’, ‘혜화역 시위’와 같은 사건들의 이름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경험이 동시대 청년 여성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에 주목했고, 이는 곧 이러한 유산을 체득한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를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지목하는 말들로 이어졌다. 많은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 과정에서 ‘여성’과 ‘광장’, ‘민주주의’, ‘소수자 연대’와 같은 가치를 함께 이야기했고,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의의를 다른 방향에서 강조하는 효과를 낳았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지우지 말라, 여성들의 투쟁의 기록을 없애 버리지 말라는 당위적인 주장을 넘어,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하며 축적된 경험들이 지금의 민주주의에 확실한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와 민주주의, 소수자 정치의 가능성을 한데 묶는 말들이 주는 뭉클함과 고양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100% 공감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이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놀라며 “젊은 여성들이 참 장하다!”고 칭찬하는 기성세대 진보운동권에게는 물론, 젊은 여성 청년들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적장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몇몇 동료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나는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민주주의를 이끌고 있다!”라는 간편한 문장으로 압축해 버리기엔 현실이 너무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계엄 정국을 거치며 광장에 쏟아져 나온 페미니스트들의 언어는 매우 다양했고, 그중에는 익숙한 혐오를 품고 있는 말들 역시 다수 존재했다. ‘퀴어들 마이크 왜 이렇게 많이 잡냐’는 말, ‘트젠들 말 좀 그만 하게 하라’는 말, ‘여성들이 일궈 놓은 업적을 퀴어가 다 가져간다’는 말은 수많은 소셜미디어 계정들의 입을 타고 광장으로 흘러나왔고, 익숙한 논쟁 구도를 되불러 냈다. ‘생물학적 여성-페미니스트’와 ‘비-여성 퀴어(혹은 트젠)’을 구분하는 언어들, 가부장제하에서 고통을 겪는 ‘진짜 여성’과 거짓 고통을 호소하는 ‘가짜 여성’을 대립시키는 언어들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만들어진 논쟁 구도를 아무런 수정 없이 재생산했고, 때로는 더욱 강화했다.

이런 상황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나는 엄청난 ‘연대 뽕’과 ‘페미 뽕’에 취하는 동시에, 진작에 지나왔다고 생각한 복잡한 감정들 속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사건을 함께 지나온 이들, 그로 인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게 된 이들에게 깊은 동지 의식을 느끼는 한편으로, ‘진짜 페미’ 대 ‘가짜 페미’ 간의 대립 구도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에 진한 탈력감 또한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내가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한 것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게는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잔뜩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교차 페미’ 대 ‘랟펨’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서

이런 고민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부여할 것인가?’라는 나의 관심사와 만나 더욱 구체화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각각의 운동이 어떤 성과와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정리하는 작업들은 뜨문뜨문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역사적 사건을 메타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위치시키는 작업에는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메갈리아 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사건이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고 있는지, 이러한 해석이 현재의 페미니즘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루어진 몇몇 시도들은 페미니즘 리부트에 대한 생생한 투쟁의 기록을 남기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들은 리부트 당시 이루어졌던 저항과 전복의 시도들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운동의 주체들이 어떤 전략을 택해 싸웠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논쟁은 무엇이 있었는지 등을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해석의 형식은 학술 논문, 단행본, 토론문, 인터넷 기사, 칼럼, 인스타그램 만화, 위키, 여러 소셜미디어 속의 기록 타래 등으로 다양하지만, 이들은 모두 의도적인 망각 속으로 사라지려는 운동의 역사를 길어 올리고, 거기 현재적인 의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페미니즘 리부트를 ‘교차성 페미’와 ‘래디컬 페미’ 간의 갈등을 통해 이해한다. 흔히 ‘교차 페미’ 대 ‘랟펨’, 혹은 ‘쓰까 페미’ 대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간의 충돌로 이야기되어 온 갈등 구도를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관점으로 채택하고, 거기서부터 운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페미니즘 리부트는 현실 속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외면한 채 무책임하게 ‘윤리’, ‘소수자성’만을 외치는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학계 페미니즘 때문에(이원윤, 2023), 혹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자 배제적 운동을 한 ‘랟펨’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일부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상반되는 주장을 하며 서로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차 페미’ 대 ‘랟펨’, 혹은 ‘학계 페미니스트’ 대 ‘메갈리안’이라는 대립 구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교차성’과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이 사용된 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전의 논의들이 보여 주듯이(윤소이, 2020), 이러한 구도는 명백히 허구적이고 또한 자의적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확히는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의 구분을 전제하며 진영 논리를 재생산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의 논쟁들이 피아가 정확히 식별 가능한 전선(戰線)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일부 해석과 달리, ‘교차성’, ‘트랜스젠더 배제’, ‘소수자 연대’, ‘여성’, ‘정체성 정치’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은 ‘너 아니면 나’라는 흑백 논리를 통해 소화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탈코르셋을 하는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페미니스트, 퀴어 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페미니스트와 실제 운동 현장에서 퀴어들과 연대하는 페미니스트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었던 것처럼, ‘교차 페미’ 대 ‘랟펨’이라는 대립 구도는 현실을 충분히 담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해석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상황은 ‘교차 페미’와 ‘랟펨’의 대립 구도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유효한 기준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과 지난 계엄 정국의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여전히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와 그 밖의 다른 것들 간의 구분을 전제하는—가 겹쳐 들리는 것을 단순한 착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다는 점, 현실 속 운동 주체들의 입체적인 입장과 갈등을 담아낼 수 없는 관점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지만, 무엇보다도 허구적인 경쟁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뭐였는지’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가장 문제적이다. 교차성과 정체성 정치, 래디컬 페미니즘이 정말로 우리—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를 거쳐 온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사이의 갈등을 설명하는 최종심급의 원인이 아니었다면, 그저 허구적인 구분과 대립을 위해 사용된 기표에 불과했다면, 우리를 그토록 치고받고 싸우고 서로 증오하게 만들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이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이 글은 경직된 이분법이 아닌 불확정의 가능성을 통해 페미니즘 리부트를 새롭게 해석하기를 제안한다. 한 시대의 페미니즘운동이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펼쳐진 ‘사건’이었으며, 또한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발견과 재현의 작업을 통해 재구성되는 미완의 대상이자 열린 세계”(김보명, 2017: 306)임을 생각했을 때, 단일한 대립만을 전제하는 관점은 이러한 ‘열린 세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해석, 추후에 찾아올 다른 언어들의 자리를 막고 완결시켜 버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사건을 재해석하고 재방문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역시 남겨 두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동일한 결론만을 영원히 반복할 뿐인 이야기밖에는 없을 것이다.

부정(否定)으로부터 열린 세계의 가능성을 건져 올리기

따라서 이 글은 ‘열린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도들, 확정되지 않은 형태의 이야기들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들에 주목한다. 또한 이러한 시도들을 ‘망설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망설임이란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태도를 결정하지 못함’의 상태를 의미하는 ‘hesitation’보다는, 불확정 혹은 부정(否定)의 상태를 나타내는 ‘indetermination’에 가깝다. 아직 명확한 형태나 결론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 모순적인 감정과 판단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정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굳이 ‘부정’이나 ‘불확정’이 아닌 ‘망설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여러 모순을 끌어안은 채 고민하는 주체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확한 당위를 제시하는 ‘이즘(-ims)’과 울퉁불퉁 입체적인 개인의 실천 사이에서 ‘망설이는’ 주체로서, 이들이 느끼는 감정적·윤리적 차원의 고민은 운동의 모순과 균열, 갈등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나온 논의들 중 일부는 탈코르셋, 4B운동, ‘야망보지’운동 등 메갈리아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핵심적인 운동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이들이 운동의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며 갈등을 겪는 과정에 주목했다. 소셜미디어를 주 무대로 하는 운동이 전개될수록 운동의 적법한 주체를 가리는 기준은 점차 늘어났고, 이는 곧 ‘완벽한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박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완벽한 페미니스트’란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 탈코르셋을 하는, 비혼·비연애·비출산·비섹스라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연애나 돌봄, 꾸밈 등 ‘여성화된 노동’을 거부하며 자신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투자하는, 그러면서도 ‘생물학적 여성’ 집단의 해방을 위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액티비즘에 투신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소위 ‘한남’과 연애하는 여성, 긴 머리와 화장을 버리지 못한 여성 등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이 되었고, 이는 곧 운동 주체들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낳았다. 내가 이런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실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혹은 다른 ‘자격 미달’ 동료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의 과정을 다룬 논의들 중 일부는 우울, 불안, 죄책감, 피로감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감정에 주목했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갈등을 겪는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개인적, 집단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들이 발생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페미니스트 번아웃’에 주목한 이정연(2022)의 연구는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완벽한 페미니스트’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고, 페미니스트 동료들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번아웃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이들은 페미니즘 공동체 안에서도 다양한 페미니즘이 논의되지 못하는 상황, ‘쓰까’ vs. ‘랟펨’의 구분을 벗어나는 복잡하고 비일관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페미니즘이 수용되지 못하는 상황을 목격하며 좌절감과 배신감, 짙은 피로감을 느낀다.

페미니스트들의 ‘죄책감’에 주목한 최예령(2023)의 연구 역시 신자유주의 사회 체제와 페미니즘적 대안 정치의 사이에서, 또 계속해서 소비를 권장하는 소비자본주의적 사회와 이에 저항하는 에코페미니즘적 가치 체계 사이에서 분열하는 페미니스트 주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들은 기후 위기를 가속하는 쓰레기 생산을 멈추기 위해, 또 여성에게 가해지는 꾸밈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페미니스트 불매’를 실천하지만, 이런 실천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강한 동력은 ‘죄책감’이다. 이들은 비윤리적인 소비를 통해 동료 페미니스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죄의식, 그리고 이런 ‘페미니스트 선’을 지키지 않을 시 페미니스트 공동체로부터 추방될 수도 있다는 걱정 속에서 매일의 실천을 이어 나가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TERF’적 입장을 지지하는 10~20대 여성들에 대한 송지수(2021)의 연구 또한 여성 주체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을 구체화하고, 이를 자신의 삶에 체현시키는 과정에서 ‘완벽한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박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이런 강박이 어떻게 소모되는 감각으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과정에서 발생한 ‘가라앉는 정동(이정연, 2022)’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페미니즘에 대한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망설이는’ 주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감정들은 보통 운동의 성장과 지속을 위해 뒤로 감춰야만 하는 이야기로 여겨지지만, 내부의 모순과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종종 생각지도 못한 방향의 문을 열어젖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가라앉는 정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역설적인 형태의 가능성을 발견해 낸 것처럼 말이다. 최예령(2023)의 논의에서 죄책감은 운동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기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운동의 의제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시에, 이런 모순적인 감정을 소화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페미니즘, 즉 ‘완벽한 페미니스트’ 강박에서 벗어난 페미니즘을 상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정연(2022) 역시 번아웃을 페미니즘의 종료가 아닌, 개인이 페미니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가는 과정에 가까운 것으로 의미화한다. 주체들이 어떻게 하면 번아웃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페미니즘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실험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번아웃은 또 다른 ‘페미니스트 되기(becoming)’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망설이는 주체들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일 것이다.

‘망설이는 정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정동 이론 철학자인 브라이언 마수미는 새로운 흐름이 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비확정성 혹은 비결정성(indeterminacy)의 영역에 주목했다(마수미, 2011). 마수미에게 있어 정동이란 감정(emotion)과 행동(action) 사이에 존재하는 것, 아직 명확한 형태와 방향성을 갖추지 않은 일종의 흐름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언제든 새로운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는 잠재력의 장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정동은 실재하는 몸과 함께 움직이며 언제든 특정한 감정—공포, 분노, 사랑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주체가 기존의 체계를 벗어난 행동을 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기도 한다. 즉 정동의 비확정적이고 비결정적인 특성과,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들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렇듯 모호하고 부정확한 정동에 정치적 가능성을 부여하는 입장을 일부 빌려, ‘망설임’이라는 정동과 이에 주목하는 행위가 갖는 의의를 조명하고자 했다. 망설임의 정동은 운동의 주체들이 페미니즘 의제와 실천 사이에서 간극을 느낄 때, 그리고 이런 간극이 페미니즘 공동체 내에서 안전하게 이야기되지 못할 때 주로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페미니스트’라는 환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탈페미니즘’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른 선택이겠지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 단계에서 명확한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모순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종종 그저 결단을 미루고 있을 뿐인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되지만, 망설임의 정동은 운동 주체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망설임의 시간을 통해 느끼고 성찰한 것을 토대로 소셜미디어상의 ‘대문자 페미니즘’과 나의 실천을 구분하고, 이를 토대로 더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페미니즘 실천을 이어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는 “망설임의 정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글은 “‘망설임의 정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하고자 했다. 망설임의 정동이 이런 실천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면,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 즉 망설임의 정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동시대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부로 끌고 들어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또한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망설임의 정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계속 요동치는 정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 역사화 작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별 운동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는 논의들과는 분명 다른 시각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진짜 페미’ 대 ‘가짜 페미’라는 대립 구도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타진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느끼는 불안함과 배신감, 피로감 등을 공동체 차원에서 수용하고, 이를 운동의 새로운 양분으로 삼는 방향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정동에 대한 논의는 운동의 ‘화력이 죽었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운동 주체들의 고민과 노력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최예령, 2023). 사람들은 흔히 겉으로 보이는 시위의 빈도와 크기, 제도 개선의 속도 등을 통해 운동의 생사를 판단한다. 하지만 정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예를 들면 운동 주체들의 내면과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운동을 지속시키는 핵심적인 동력으로 기능한다. 운동의 가장 뜨거운 시기에 만들어진 지식/인식은 그 시기가 끝나고 난 뒤에도 주체들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들의 삶이 ‘빨간 약’을 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리부트 시기 만들어진 정동은 보다 잔잔하고 지속가능한 형태로 여전히 우리 안을 순환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머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페미니즘운동의 잠재적인 자원이자, 또 다른 실천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참고문헌

  • 김보명(2017), 「감히 나쁘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급진 페미니즘」, 『한국여성학』, 33(1), 305–316쪽.
  • 김현미(2020),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 문화』, 13(2), 41–77쪽.
  • 마수미, 브라이언(2011), 『가상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 조성훈(역), 갈무리. (Massumi, B.(2002).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ke University Press.)
  • 송지수(2021), 『페미니즘 알기의 의미: 10-20대 여성들의 ‘TERF’ 지지 입장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 윤소이(2020년 10월 7일), “‘쓰까’ 정치학에 대한 소소한 회고”,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https://fwdfeminist.com/2020/10/07/vol-4-8/
  • 이원윤(2023), 『아직, 메갈리안: 메갈리아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이프북스.
  • 이정연(2022), 『페미니스트들의 ‘번아웃’ 호소를 통해 드러난 강남역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 최예령(2023),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의 정치적 소비와 그 정동적 동인으로서의 죄책감 연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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