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참사가 계속되지 않도록

🐺영경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2025),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파주: 동녘

가정폭력, 스토킹 살인, 교제폭력, 데이트폭력, 이별 살인…. 국가가 방치한 사각지대에서 이름만 다른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벌어진다(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 2025 :31). 여성의 목소리가 주변화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기록해 온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팀’은, 교제폭력으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기자로서의 책임감으로 기록한다. 표지 디자인의 작은 네모 칸들과 칸 안의 동그라미는 2009년부터 2024년까지의 총 5,840일이라는 시간을 표시하고, 칸 안의 동그라미는 그 시간 동안 친밀한 남성 파트너에게 목숨을 잃거나 위협당한 4,423명의 피해자를 표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법이 언제나 많은 죽음 위에서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교제폭력 관련 법의 제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자 하는 바람을 이 기록에 담았다.

책은 2024년 8월 20일부터 2025년 2월 7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기획기사 ‘더 이상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친밀한 사이에서 오는 폭력의 특성과 심각성을 살피고, 2·3장은 교제폭력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구조적 모순을 짚어본다. 마지막 4장은 교제폭력 이후, 폭력을 객관화하며 가능해진 피해자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각 장마다 교제폭력 피해의 실태를 살피고, 보다 진전된 법제를 갖춘 해외 사례를 통해 한국 법제도의 개선 방향을 제안한다.

1. 도서를 통해 모인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

저자 플랫팀은 피해자와 그 가족, 조력자의 이름은 실명으로 밝히는 한편, 가해자는 모두 동일한 익명의 ‘A’로 표기하는 의도적인 서술 방식을 택한다. 교제폭력은 어떤 유별난 개인의 일탈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젠더의 위계에 따른 폭력이라는 점이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주제로 다루는 많은 언론 기사의 경우, 직업, 나이, 성격, 정신질환과 같은 가해자의 개인적 결함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젠더의 위계와 그를 내포하는 관계성에 주목한다면, 개별 가해자의 특수성은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와 다르게, 피해자의 실명을 호명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방치된 개별 피해자의 상황 즉, 정치적으로 개별화되어 온 상황을 조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교제폭력 범죄는 오랜 시간 축적되어 왔지만, 피해자와 유가족은 여전히 이를 개인의 문제로써 감당하고 있다. 사건이 법의 테두리 안에 들기도 쉽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분리와 강력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건 대응과 처리 과정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거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공적 시스템 속에서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 범죄 피해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 ‘누구와 교제하다 다치거나 죽었는지’가 치부로 여겨지는 환경 속에서 피해자와 유가족이 느끼는 실망, 배신, 소외, 고립감,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고 타당하다.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은 흩어져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아, 교제폭력을 사회적 참사로써 드러낸다. 이는 역설적으로 각 사건을 학문적·정치적 틀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2. 교제관계가 가정하고 있는 것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가리고, 명확히 선을 넘었다고 인식되는 일들도 친밀한 관계에서는 ‘사랑’이라 생각해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같은 책 172). 교제관계는 존중과 사랑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그 관계가 언제든 개인의 선택으로 시작되고 끝맺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관계 내 둘 간의 동등함을 가정한다. ‘어쩌다 한 번 그럴 수 있는 일’로 지나치는 것, 가해자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폭력을 단순 실수로 보기 등), 피해자가 가해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잘 보듬어주면 계도할 수 있다’ 등), ‘연인 간 늘 있는 싸움’으로 넘겨짚는 것,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폭력의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왜곡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에서 일방적 폭력이 있을 리 없다’거나 ‘폭력이 진짜 문제였다면 진작 헤어졌을 것(올바른 대처를 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공유한다. 둘은 동등하고 자유롭게 유지되고 있는 관계라는 믿음, 그러므로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식의 믿음은 강고하다. 

그러나 이같이 교제관계에 수반되는 맹목적인 믿음과 가정은, 교제 과정에서 축적되는 개인적 정보와 맞물리며 피해에 대한 취약성을 키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통제와 폭력은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지고, 가해자에게 피해자는 가장 안전하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상대가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피해자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배당하며 스스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그의 지인, 가족의 정보를 이용해 협박함으로써 신고를 어렵게 만든다. 피해자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고립되지만, 폭력 이후 이를 견디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해, 갈취, 강간, 불법 촬영 등 혐의가 중첩되며, 피해의 정도 또한 커진다.

책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 상황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그 믿음의 배경이 되는 젠더 위계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특수성을 설명한다. 1장을 마치며, 독자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과 통상적인 상해 사건의 차이를 한층 더 면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개입에 실패한 공권력

피해자는 친밀한 교제관계 그 자체에 고립된다. 이 말은 곧, 범죄 차단을 위해 가장 중요한 핵심이 그 관계 자체를 단절시키는 데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교제폭력 범죄는 누군가의 사적 주거지, 인적이 드문 장소나 시간 등 제3자의 개입이 불가한 곳에서 다수 발생한다[1]. 때문에 신고를 접수받은 수사·사법기관의 이후 조치가 피해자 보호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책 2·3장은 공권력이 교제폭력 문제에 개입하는 데 실패해 왔음을 보여준다. 둘만 있을 때 벌어진 사건이기에 파악이 어렵다는 답변, 피해자가 괜찮다고 답변했다며 돌아가는 모습, 상호 간의 폭행 흔적을 파악하는 기계적인 처리가 계속된다. 판결은 헤어지기 위해 혹은 폭력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가해자를 회유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피해자의 동의로 보고, 매번 때리다가 죽이게 된 것을 살인의 고의성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가벼운 수준의 처분을 내린다(기사 보기). 사건의 대응에서 판결에 이르기까지 기관은 가해자에게 어떠한 경고도 주지 못했고, 가해자는 때려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입법기관이 책임져야 할 제도적 공백이 존재한다.

최근 들어서는, 수사·사법기관에서도 사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5년 8월, 경찰청은 교제폭력 관련 법안의 미비로 인한 피해자 보호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스토킹처벌법상의 일회성 행위에 대해서도 경찰이 현장에서 직권으로 즉시 접근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교제폭력 대응 종합 매뉴얼>을 제작·배포했다(기사 보기). 이어 12월 3일, 법무부는 교제폭력 가해자의 ‘실제 위치’를 피해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기능을 개발하고, 2026년까지 부처 간 시스템 연계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하였으며, 교제폭력 범죄자에게 접근금지명령, 전자장치 부착, 유지창 유치 등의 잠정조치를 적용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교제폭력 및 스토킹범죄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접근금지를 청구하는 제도를 도입할 예정임을 밝혔다(보도자료 보기). 12월 2일에는 형사소송법 개정안 통과로, 범죄피해자가 법원과 검찰이 보관 중인 형사재판기록 및 증거자료를 열람·등사할 수 있게 되었다(보도자료 보기). 

하지만 여전히 개선해야 하는 점들이 많다. 책이 제시하듯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전문가로서 객관적으로 위험도를 평가해 피해자 지원과 가해자 분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파출소 등 일선 현장 인력이 <매뉴얼>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보다 체계적인 전문 훈련 계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경찰 내부에서 활용되는 가해자의 위험도 체크 지표를 IACP 가이드라인 수준에 맞추어 함께 보완할 필요 또한 있다. 무엇보다, 친밀한 관계 내 폭력 관련 법안 입법이 요구된다[2]. 친밀한 관계에 의한 발생하는 사망 사건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공식 통계 마련, 사망검토제의 도입(기사 보기), 가정폭력 휴가제도의 도입, 강압적 통제 행위에 대한 법적 개념 도입 등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책이 안내하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4. 서로의 연대자가 되는 일

4장은 교제폭력 피해를 경험했던 당사자들이 폭력의 본질을 인식하며 회복에 들어서는 과정을 글로 옮겨낸다. 이들은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젠더 위계에 뿌리를 둔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확인하고 여성폭력 범죄가 ‘범죄’로 명확히 정립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배우면서, 자신에게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책과 무가치함에 사로잡혔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과 주변 관계, ‘잃어버린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다. 당사자는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있고, 승리자, 조력자, 연대자로 나아간다.

이 책은 독자에게 연대자로 함께할 것을 제안한다. 독자는 피해를 경험한 당사자들의 회복을 글로써 공유받으며, 자신이 어떤 가족 혹은 연인, 친구와 지인으로 당사자와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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