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영화

소연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된다.”

존 버거(1972).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1. 당신을 그리러 왔어요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는 자신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누드(nude)’라는 예술형식과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누드’를 그린 유럽의 회화들에서 여성은 ‘보여지는’ 대상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한다. 회화 속 여성들은 남성으로 상정되는 관객의 시선-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털이 제거된 상태에서 몸을 적절히 비틀고 있되 가슴과 얼굴은 정면으로 향하도록 그려진다. 벌거벗었다는 것(naked)은 통상적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 즉 사회적 관계 또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지만 회화 속 벌거벗은 여성은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남성의 시선을 ‘입은’ ‘대상’이 된다.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그리게 될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 또한 누드화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정혼자에게 보내질 그림 속에서 이 귀족 아가씨는 남편에게 충분히 성적으로 어필하되(빛을 받아 하얀 피부와 붉은 뺨, 풍만함을 강조한 가슴) 정숙(멍한 표정, 수동적인 포즈) 해야 할 것이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마리안느에게 마리안느의 아버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이 그림이 밀라노에서 자신보다 먼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남편을 기다릴 초상화 속 여인의 몫이 어머니에게서 엘로이즈의 언니로, 언니가 자살하자 엘로이즈에게로 건너온 것과 같이 억압의 역사를 재생산하는 화가의 붓은 마리안느의 아버지에게서 마리안느로 넘어간다. 물론 그 붓을 쥐여주는 사람은 엘로이즈의 어머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회화와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역사영화이자 18세기 여성들의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그려낸 여성 영화, 퀴어 영화이다. 누드도 그려본 적이 있냐고 묻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여자만요,라고 답하는데, 엘로이즈가 수치심 때문이냐고 다시 묻자 마리안느는 “어떤 것은 여성 화가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다. 물론 관객들은 마리안느의 입을 빌려 이 영화가 폭로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건 그다음 이어지는 엘로이즈의 질문에(“그럼 그리지 않나요?”) 마리안느가 몰래 그린다고 답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감독은 여성들의 ‘살아있음’에 대해 영화 내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만 같은데, 또 다른 예시로 영화 초반 벌거벗은 마리안느가 두 개의 빈 캔버스 사이에서 편하게 담배를 피우며 젖은 몸을 말리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마리안느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대상화된 캔버스(혹은 누드화) 속 여성이 아닌, 그로부터 해방되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성을 나타내는데, 이와 같은 표현이 마치 ‘나는 지금부터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는 시아마 감독의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영화를 규정할 수 있는 다양한 카테고리들이 결합하여 생성해내는 변주는 이외에도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소피의 낙태 시퀀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다. 묵묵히 약초를 준비하는 여인들과 너무 아프지만 소리 하나 지르지 않다가 눈물을 떨구는 소피, 그의 뺨을 어루만져 주는 아기는 그동안 재현되어 온 방식과 달리 낙태가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부분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구성됨을 일깨운다. 소피와 기꺼이 동행하기로 한 마리안느와 시선을 회피하는 그에게 (소피를) 보라고 말하는 엘로이즈는 이 인물들과 결합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바로 그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독특한 감동을 부여한다.

2.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어딜 보겠어요

가부장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엘로이즈의 강한 생명력은 영화 초반 절벽을 향해 곧 죽을 사람처럼 달리며 평생 이 순간을 꿈꿔왔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처음 분출된 후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러닝타임 내내 약동한다. 마치 노려보는 것만 같은 엘로이즈의 시선은 자신을 관찰하는 마리안느의 가부장적 시선(“계속 내 남편의 시선을 하고 있군요.”)에 대한 반항인 것 같다가도 마리안느를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퀴어의 시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마리안느를 향한 엘로이즈의 시선은 영화의 서스펜스를 생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마리안느는 처음 엘로이즈의 옆모습을 관찰하다가 엘로이즈와 눈이 마주치고 당황하여 고개를 돌려버린다. 또한 중반쯤 마리안느가 침대에서 잠든 엘로이즈를 그리는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자신을 관찰하는 마리안느를 전복적으로 당황시키는 것을 넘어 오히려 마리안느를 유혹하는 포즈와 시선을 던지기까지 한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어딜 보겠어요?”하고 되묻는 엘로이즈의 대사는 이 영화가 끌어온 서스펜스를 최고조에 올려놓는 장치이기도 하다.

어머니에게서 엘로이즈로, 아버지에게서 마리안느로, 한 세대를 더 이어온 억압의 관계는 이들에 이르러 변화한다. 마리안느의 시선은 엘로이즈의 시선과 결합하여 새로운 불꽃을 피워낸다. 마을 축제 때 합창하는 여자들 틈에서 서로를 바라보다 엘로이즈의 드레스 자락에 불이 붙은 걸 뒤늦게 알고 이어지는 놀라움과 침묵은 그들이 피워낸 불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기도, 공동으로 창작해낸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때 합창은 물론, 여러 사람이 함께 조화로운 목소리를 내야 완성되는 예술 형식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가진다.

약 열흘간의 격렬한 사랑을 그리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제한된 공간과 인물, 무엇보다 평균적으로 긴 숏들로 인해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을 띤다는 점은 꽤나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직조해내는 감정의 서스펜스를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연출 형식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와 맞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통상적으로 그러하듯 음악, 조명, 화려한 편집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배우의 시선 또는 표정과 숨소리, 침묵을 통해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유지되는데, 여기서 카메라의 역할은 그저 인물을 차분히 응시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수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관객이 감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듯, 좀처럼 인물을 프레임의 중앙에서 벗어나도록 배치하는 법이 거의 없고, 이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 역시, 배우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내내 지켜보는 관객들까지 바로 이 영화를 창작해내는 과정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3.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소피와 엘로이즈, 마리안느가 오르페우스 신화를 함께 읽으며 재해석하는 시퀀스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를 형성한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는 엘로이즈의 해석과 오르페우스가 시인의 삶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마리안느의 해석은, 이들이 끝내 함께하는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운명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복선으로 장치한다. 화가로서 계속 활동하며 때때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출품하는 마리안느와, 귀족 부인으로서 초상화의 모델이 되지만 p. 28이 보이도록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엘로이즈는 억압 아래에서도 각각 타협과 전략을 달리하며 삶을 지속하는 과거 여성들의 초상이기도, 동시대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며 낙태 후 소피의 모습을 그리길 제안했던 엘로이즈처럼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기억해 나가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보는 자로서 화가와 보이는 자로서 모델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에서 피어난 공동 창작물로서의 예술작품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고양시킬 수 있는지 영화의 엔딩은 말해준다.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삐걱대는 음정들과 함께 어설프게 연주된 마리안느의 사계-여름과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여름이 엘로이즈에게서 공명하여 슬픔과 그리움, 환희의 눈물로 태어날 때, 결국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기로 선택한 엘로이즈의 삶이 그린 궤적은 이 공동의 예술의 일부분이 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캔버스에 선을 긋는 소녀들의 손과 모델이 되어 소녀들에게 그려지고 있는 마리안느는 지속되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예술이 재생산될 수 있음을, 영화 후반에 다다라서야 “이젠 슬프지 않”다고 말하는 마리안느의 입을 빌려 전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벌거벗은 몸으로 등장했던 마리안느는 영화에서 유일한 누드화의 주인공이 된다.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그가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을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린 마리안느 본인의 누드화는 당연히, 기존 유럽의 회화에서 등장하는 누드화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물론 형식적으로도 다르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는 건 매우 중요하겠다. 머리카락과 눈썹 등을 제외하고 털이 모두 제거되어 있는 전통적 회화 속 여성들과 달리 영화에서 마리안느는 자신의 음모를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축제에서 산 약초를 자신의 겨드랑이에 바르던 엘로이즈의 손과 그의 겨드랑이 털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전통적 회화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축소시키기 위해 털을 제거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털의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한다. 서로를 욕망하는 관계가 한 가지 방식the way of seeing의 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가 있음을 인정, 수용, 나아가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감에 따라 새롭게 직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순간들이다.


참고문헌

  • Berger, John(1972). Way of Seeing, London :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최민 옮김(2012),  『다른 방식으로 보기』, 파주: 열화당.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영화”의 2개의 생각

  1. 여러모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원래 아가씨를 제일 좋아했는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아가씨와는 또 다른 면에서 대단한 작품같아요. ‘귀족과 평민 여성의 퀴어적인 사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에 따라서, 또는 감독에 따라서 전개과정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아가씨는 귀족-주인-일본인-하얀 피부로 표상되는 히데코와 도둑-하녀-조선인-까무잡잡한 피부로 표상되는 숙희의 계층적 대립, 또 남성-여성의 위계관계를 깨부수는 전개인 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정략결혼이라는 가부장적 억압에서 잠시 벗어나 비교적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이 한국과 유럽의 페미니즘이 무엇을 지향하는 함의하는 듯 해요. 또한 아가씨는 감독이 남성이다 보니 – 물론 작가는 여성분이지만 – 남성 페미니스트가 겪는 모순들을 초탈하기 위해 주인공 외부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억압적인 장치들을 설정하여 이 것을 극복하면서 일종의 감독 자신의 자아성찰(?)비판(?)이 아닌가 싶었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감독 자신이 레즈비언이라 그런지 외부의 억압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것에서 비켜가서 – 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는 없는 – 좀 더 미시적이고 감각적인 여성들 간의 사랑을 표현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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