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슬러 K. 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은 르 귄의 데뷔작을 포함한 단편 18편을 쓰여진 순서대로 담은 단편선입니다. 이번 페미니즘 SF 읽기 모임에서는 이 중에서 두 작품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 날」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상적인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한 가지 비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도시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한 아이가 감옥에 갇혀 일평생 빛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르 귄은 “한 영혼만 고통을 당하면 그 낙원에 있는 수백만 명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윌리엄 제임스의 글을 읽고 ‘서늘한 인식적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출발한 상상이 바로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1973)」입니다. ‘오멜라스’라는 이름은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도시 세일럼(Salem,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을 거꾸로 읽어 착안해낸 것이라고 하네요.
한편 어떤 사람들은 숨겨진 비밀을 알고 나서 견디지 못해 도시를 떠납니다. 「혁명 전 날(1974)」의 주인공은 이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 중 한 명으로, 노년의 여성입니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이끈 지도자이자 사상적 지주이죠.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 우상화된 자기 자신과 혁명 세력이 바라는 세상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한 아이의 고통으로 유지되는 유토피아—오멜라스—와, 오멜라스를 떠나온 사람들이 꿈꾸는 새로운 유토피아, 그리고 그로부터 소외되는 노년 여성을 그리면서 르 귄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 대담 내용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1.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의 ‘혁명 전 날’
오온 :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 날」 두 단편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해요.
상상 : 저는 사실 「혁명 전 날」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연결 짓지 못했어요. 「혁명 전 날」이 한 사람의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구요. 주변이 온통 혁명에 대한 열기로 들끓고 있음에도 혁명에 대한 의욕도 사라졌고, 혁명의 날 당일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어하는 노인 여성을 다루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선녀 : 「혁명 전 날」은 감옥에 갇힌 아이를 보고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 중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죠.
상상 : 이 두 소설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두 소설이 시간적으로, 그리고 또 공간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는 아직 파악을 못했어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보다 「혁명 전 날」이 시간적으로 앞선 이야기인지, 「혁명 전 날」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오멜라스와 가까운 곳인지 아니면 먼 곳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죠.
오온 : 저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 날」의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어슐러 르 귄의 SF 세계가 출발하는 사유적인 기원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르 귄의 SF는 대부분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구체적으로는 르 귄이 살던 시대의 미국—와 다른 세계를 설정하고 그 곳의 문화를 자세하게 그리는데요, 이 각각의 생소한 세계 하나하나가 모두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닐까 싶은 거죠. 「혁명 전 날」의 세계도 마찬가지이구요. 제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SF 장르에 대한 은유로 읽혔어요.
선녀 : 저는 「혁명 전 날」의 주인공이 오멜라스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아이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숨겨져야만 하는 자였던거죠. 그래서 오멜라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거구요. 그런데 「혁명 전 날」의 나이 많은 주인공은 오멜라스에서라면 겪지 않았을 일들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오멜라스에서는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영웅이자 우상으로 박제가 되고, 상징이 되어야 했지요. 오멜라스에서는 나이 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말이죠. 또 오멜라스에서는 정부와 정치 체제가 없어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데, 여기에서 주인공은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오온 : 다시 상상의 궁금증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오멜라스와 「혁명 전 날」의 배경은 물리적으로 같은 세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혁명 전 날」의 배경은 삶의 더러움이 찌들어 있는 도시인 반면, 오멜라스는 마치 동화 속의 아름다운 중세 시대 마을처럼 그려져요. 이렇게 기술적인 묘사는 다르지만, 르 귄이 「혁명 전 날」의 프롤로그에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 중 한 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오멜라스란 새로운 세계의 심리적인 출발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르 귄의 장편 『빼앗긴 자들』이 「혁명 전 날」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구요.
2.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사고 실험의 힘
상상 : 『빼앗긴 자들』은 어떤 작품인가요?
오온 : 우리가 읽은 두 단편과 직접적으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장편 『빼앗긴 자들』의 태양계에는 소유주의를 따르는 행성 우라스와 ‘오도주의’라고 불리는 공동체주의를 따르는 행성 아나레스가 존재합니다. 아나레스의 ‘오도주의’가 바로 「혁명 전 날」에 등장하는 혁명 이념이죠. 이 소설은 아나레스 출신의 박사가 우라스로 망명 신청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다룹니다. 한 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류학적 경험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이 소설은 1970년대 뉴 웨이브 SF의 대표작이기도 한데요, 읽다보면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각각 미국과 소련을 유비하고 있다는 점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어요. 르 귄은 현실의 문제를 SF의 세계로 구현해내는 데 정말 탁월한 것 같아요. 비록 오십 여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을 읽으면 약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나나 : 르 귄의 「젠더란 필요한가?」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 있어요. 르 귄이 『어둠의 왼손』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에세인데요, ‘두 젠더가 상호협조적으로 잘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을 소설을 통해 실험해보고자 했다고 해요.
미현 : 르 귄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체제의 세계관을 실험하는데요, 발정기에만 일시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분화하는 중성인들이 사는 행성을 무대로 한 장편 『어둠의 왼손』의 경우에는 성별을 중요한 변수로 다루고 있지요. 성별 체계가 우리 사회의 골격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사고 실험을 통해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실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재의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힘을 갖죠.
선녀 : 오멜라스에서는 문제가 있거나 주변화된 사람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데요, 결국 오멜라스의 행복은 주변화된 존재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소설 속에서 이 희생양은 어린 아이로 그려졌지만, 사실 이 희생양은 여성일 수도, 흑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희생을 담보로 오멜라스의 다른 모든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데요, 저는 이 상태가 이상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더라구요. 그보다 1950년대 미국의 중산층 백인들처럼 무언가를 외면하면서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행복하고 이상향처럼 보이는 곳에서 사실은 타자를 어디엔가 숨겨놓은 거지요. 아무도 보이지 않게 말이죠. 하지만 이 타자들은 그들이 누리는 행복을 방증하기 위해서 가끔씩 일부러 전시되기도 합니다.
미현 : 희생양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볼 수 있을까요?
선녀 : 희생양은 신께 기도할 때 사람 대신에 양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고대의 풍습에서 시작되었죠. 한국의 심청과도 비슷해요.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 뱃사공 대신 ‘처녀’를 사서 죽이는 거죠. ‘한 영혼을 희생시켜 다른 모두가 살 수 있다면?’과 같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개념이라고 봐요.
오온 : ‘오멜라스’라는 도시 이름도 살렘(예루살렘)을 거꾸로 읽어서 착안해냈다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이에요. 이상향이라고 여겨지는 장소가 갖는 희생과 폭력의 역사라는 아이러니를 분명히 겨냥하고 있는 셈이죠.
선녀 : 이 소설이 쓰여진 시점(1974년)을 고려한다면, 르 귄은 당시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통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르 귄을 읽으면서 백인 사회를 공격했던 당시의 흑인 운동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혁명 전 날」의 등장인물이 정확히 흑인이라고 지칭되지는 않지만, 1960년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비유라고 읽을 수도 있지요.
미현 : 듣고보니 196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상을 투과해 이 두 단편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유토피아라고 여겨졌던 미국을 등지고 세계를 바꿀 것을 요구하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다시 회의를 느끼는 흑인민권운동가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어낼 수 있겠네요.
선녀 : 르 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 「어슐러 르 귄의 환상특급(2018)」이라는 다큐멘터리에도 나오지만, 르 귄의 아버지는 인디언 연구를 했던 인류학자입니다. 다큐멘터리에 르 귄이 인디언에 대한 전시 등을 보면서 책임을 느꼈다고 나오는데요, 그 만큼 르 귄이 미국 사회를 외부에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3. 르 귄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읽기: 본다는 것의 의미
미현 : 얼마 전 베트남에 있는 호이안이라는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올드 타운의 화려한 레스토랑 뒤 홀보다 작은 공간에서 한 식구가 모여 사는 모습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유토피아 같은 여행지 뒤에 숨은 어두운 공간들이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많이 존재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는데요. 경험한다는 것, 본다는 것이 뭘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상상 : 맞아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도 아이를 보는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던 것 처럼요.
오온 : 떠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는 점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 아이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다고 언급되지 않나요? 모두가 이 아이를 알고 있는데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도 흥미로웠어요.
선녀 : 알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다는 것은 망각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많은 비극을 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극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되짚는 사람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이 ‘떠남’은 지금 이 현실을 문자 그대로 떠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보고 난 후의 세계를 보기 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게, 새롭게 직조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페미니즘 인식의 모멘트와도 유비될 수 있겠네요.
상상 : 맞아요. 추상적으로 아는 것과 구체적인 모멘트를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모멘트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몸의 경험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르 귄의 두 단편은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페미니스트인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느껴지네요.
유토피아로 그려지지만 타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이 타자에 대한 착취로 모두의 행복이 유지되는 오멜라스에서는 ‘아무도 몰래’ 떠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납니다. 소설 속의 윤리적인 딜레마는 지금 여기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 세계가 운용되는 원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혁명 전 날」에 등장하는 여성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혁명 이후를 꿈꾸며 가졌던 희망, 설렘은 모두 잊고 이제는 늙고 지쳐버려 권태감만을 느끼는 이 혁명 투사의 모습은 SF소설이 형상화하는 세계가 오롯한 유토피아일 수 만은 없음을 상기시키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되, 유토피아를 만병통치약으로 손쉽게 제시하지 않는 르 귄의 소설은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페미니즘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리 : 미현, 상상, 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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