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페미는 급진화되지 않는다

✂️한태경

1. 남성의 더 나은 전략?

2016년에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본스타인, 2015[1994])를 읽고 여러가지 몸의 수행을 바꾸어보겠다고 생각했다. 운좋게도 그해 여름부터 몸담기 시작했던 시민단체 또한 ‘교차성 페미니즘’과 퀴어정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단체였다. 젠더의 수행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패션이라는 영역을 바꾸는 것으로 일종의 다른 수행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새로운 종류의 옷과 꾸밈을 시도하는 일이었지만(ibid.,20), 다시금 생각해보면 치마와 스타킹 혹은 화장 등을 시도하는 일이 내게 정말 유익했는지는 불투명하다.

모든 남성이 이처럼 어리석진 않겠지만, 어쨌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페미니즘이 요청되었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은 드물었고, 페미니스트로 행동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페미니스트로 나선 이들의 실천도 마뜩찮았다. 기존의 페미니스트 그룹과 동료들을 향해 페미니스트가 되었음을 인정받으려는 속죄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떠드는 맨스플레인 사이에서, 남페미의 실천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곧 이들의 적절한 행위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보인다.

경험상 남페미가 취하는 전략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남자니까 나는 듣기만 하겠다”는 식의 체념 혹은 “지금까지의 남자됨을 바꾸겠다”는 식의 위반. 전자의 전략에서 남페미는 본인의 특권 의식을 과도하게 느끼는 탓에 대개 수동적이고 존중을 표한다는 수사의 뒤로 숨는다.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로 가장한채 아무것도 하지않는 가장 쉬운 방식의 연대다. 후자의 전략에서 남페미는 본인의 특권 의식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탓에 대개 여기에서 쉬이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페미니즘을 배우고 있고 여성학 강의를 들은 나는 더 이상 한남일 수 없다”는 식의 안일한 태도 말이다.

두 가지 전략을 이루는 기본 전제는 다르지 않다. 공통적으로 이들의 인식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되기 이전의 과거, 특히 자신과 남성이라는 정체성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것 같다. “그날 이후 나와 나의 남성성 사이의 관계는 변했다.” 그것이 속죄든 위반이든 간에 남성도 페미니스트도 아닌 ‘남페미’로 스스로를 의미화하는 데에 있어 이 수사는 중요하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이 가진 남성됨을 기존의 가부장제 내에서의 특권 의식으로 인식하고 비판해야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남성이라는 특권 의식에 대한 체념이든, 남성됨을 쉽게 위반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함이든 간에 이들의 중심점이 언제나 남성이라는 정체성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두 전략에는 별 차이가 없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고서부터 어중간한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대부분 남성으로 다르게 산다는 것의 모습이 무엇일지에 대한 애매한 고민과 실천으로 채워져있었지만, 위반도 체념도 내게는 제대로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구차하고 때로는 기가 차는 과거를 고백하는 일, 혹은 조신한 페미니스트가 된 기특함을 이 꽉 물고 칭찬해주길 기다리는 일 외에, 남페미를 위한 더 나은 전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2. 남성성 연구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내게 남성성 연구는 중요했는데 무엇보다도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지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남성성이 무너지고 균열이 나고 있다는 인식(마경희 외, 2017)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남성성의 발견(마경희 외, 2018)은 특히 국내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남성들의 남성성이 영향을 받았고,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삶을 상상해왔는지에 대한 진단과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남성성의 변화는 이미 반복적으로 주목되어왔다. 예를 들어 지배적인 남성성 모델의 분열과 관련하여, 존 베이넌은 1970년대 이후 단일한 전통적인 남성성 모델이 미디어의 이미지와 공명하며 부드럽고 친밀성을 중시하는 모습과 이전보다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로 분화되었음을 지적했다(베이넌, 2011[2001]). 미디어와 남성 이미지의 연구는 남성 수용자의 남성성의 변화를 설명하는 주된 방법이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수잔 제퍼드 또한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일종의 사나이로서의 남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밝혀냈다(제퍼드, 2002[1993]).

통시적인 관점에서 남성성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주목한 작업도 적지않다. 조지 L.모스는 제국주의, 인종주의, 나치즘, 전체주의 등과 관련하여 서구 남성성 형성의 역사를 다루었고(모스, 2004[1996]), 정희진과 권김현영은 한국의 맥락에 이 논의를 가져와 한국에서 식민지 경험과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식민지 남성성을 한국 남성의 남성성으로 분석해냈다(권김현영 외, 2017). 박노자 또한 한국의 유교와 식민지 경험, 군사주의 등을 한국의 남성성 형성과 엮어 분석했다(박노자, 2009).

위와 같은 연구는 남성성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며 독립된 변수가 아니라 공시적 혹은 통시적인 조건들과 상호작용하는 매개물로 작동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래윈 코넬의 남성성/들(Masculinities)이라는, 복수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로 집약된다. 『남성성/들』에서 코넬은 남성성이 복수의 양상을 갖는다고 주장하였으며, 권력 관계, 생산 관계, 카섹시스(cathexis) 관계라는 삼중모형을 통해 한 남성과 다른 남성이 서로에게 갖는 구도를 분석하였다. 사회 혹은 집단 내에서 가장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헤게모니 남성성과 이를 둘러싼 주변적 남성성/들이 관계 맺는 양상에 대한 분석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배적인 남성성이라는 단일한 모델을 부수고 남성성과 그로 인한 남성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넓혀주었다(코넬, 2013[2005]).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어떤 조건에 놓인 남성이 지배적인 남성상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남성성 규범과 페미니즘 규범이 있다면 남성은 무엇을 따르는가? 남성의 어떤 생애조건이 그들로 하여금 규범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고, 이 선택은 어떻게 남성으로 하여금 다시 삶의 질과 모습을 바꾸어내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서 남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그 내부에서 분화되고 다양화될지언정 남성이라는 고정적인 범주를 넘어서지는 않는듯 보인다. 다르게 말하자면 남성성 내부의 차이를 가시화해왔던 지금까지의 작업이, 남성성이라는 보편의 대립항으로서 여성성을 정의해온 변증법적인 이항대립에 얼마나 도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성성이라는 구성물은 그 내부에서 다른 물질적 조건들과 상호작용하며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계급이나 인종, 섹슈얼리티, 미디어 수용, 식민지 경험 등 다양한 범주와 경험에 따라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의 다양성과 복수성을 위한 기존의 작업은 남성성을 보편항으로 규정하고 그 바깥의 특수항으로서 여성성을 규정하는 이분법에 대한 질문까진 이어지지 않는다.

남성성 연구는 그 너머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성의 구성을 만들어내는 구조에는 질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남성성을 안정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변화가 추적될 뿐 여기에는 어떠한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3. 고여버린 남페미

남성성 연구가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한 발 늦을 뿐이라면, 남성 당사자들은 어떠한 실천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이후로 남성 스스로가 바라보는 남성에 대한 책이 에세이와 연구서 사이에서 종종 눈에 띄었다(오찬호, 2016; 최승범, 2018; 최태섭, 2018; 정한울·천관율, 2019; 박금산, 2020). 한국 남자들이 어째서 이상해졌는지에 대한 질문(오찬호, 2016; 최태섭, 2018; 정한울·천관율,2019)과 페미니스트라는 실천과 남성이라는 정체성 사이의 조화와 화해를 위한 모색(유진, 2018; 최승범, 2018; 박금산, 2020)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남성의 유의미한 작업이었다고 보인다. 자기 주변의 기존 남성사회를 바라보는 일과 동시에 자신 또한 기존 남성사회의 일원이며 남성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은, 일종의 고발과 같은 해당 연구서와 에세이가 갖고 있는 중요한 기획이었다고 보인다. 이들은 기존의 남성 사회에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들과 남성이라는 자신 내면에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들을 폭로하는 기능을 맡았다.

이러한 작업은 앞서 언급했듯이 남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라는 실천을 화해시키는 데에 있어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남페미는 자신이 긍정하던 기존의 남성사회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의심하지 않던 정체성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나서야 페미니스트로의 이행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해당 저서들은 남페미들이 자기에 대해 갖는 재인식이 시작되는 지점과 유사하다.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연구서와 에세이들이 폭로 혹은 속죄 이후의 고민을 이어나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 남성이 한국 남성에 대해 탐구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취하는 관점은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이상해졌고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원인에 집중되어 있다. 페미니스트와 남성의 조화를 다루는 저서들에서 마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이들이 어떻게 오랜 시간에 걸려 남성이라는 정체성에 페미니즘이라는 인식론을 끼워맞추는지에 달려있지, 그 이후에 남페미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은 누락되어있다. 

폭로와 속죄는 남성으로 저질러온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체류하며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체류는 책을 쓴 작가든 책을 읽은 독자든 간에 “나는 어쨌든 한남이다.”와 같은 체념으로 지속된다. 남성으로서 다른 남성을 비판하는 작업의 유의미함은 개선의 방향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그저 체념과 죄의식 속에 고여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남페미가 자신의 정체성을 쉽게 놓는 일 또한 마뜩찮다. 남성성을 가볍게 뒤틀 수 있다는 남페미의 유해한 상상력은 이 실천이 참고하는 페미니즘과 퀴어정치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 머리를 기르고,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치마를 입는 일이 나를 남성에서 멀어지게 만들지도, 페미니스트에 가까워지게 만들지도 않았다는 점은 명확하다.

다르게 살고자 하는 남성의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호명하느냐 하지않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이들이 남성을 어떻게 상상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지에 있다고 보인다. 남성이 어떻게 악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더 나아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누락되고, 이는 결국 이들이 끝없이 부끄러운 과거를 그저 면책용으로 휘두르는 듯한 인상을 만든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지금껏 남성으로 살아오느라 힘들었던 이야기는 이제 그만 들을 필요가 있다.

남성이라는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라는 실천 사이의 화해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디그비, 2004[1998]),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 이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보인다. 달라진 삶과 실천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남성과 페미니스트라는 실천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남성성의 변화를 추적해온 기존 연구와 남페미의 실천은 맞닿는 면이 있다. 둘다 급진화되지 않는다.

4. 남성성 연구와 남페미의 급진화를 위해

남성과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이어붙이느라 정신이 없는 남페미의 행보를 보고있자면, 십수년 째 ‘변화만 하고 있는 남성’에 대한 불안과 찬사 이외에 다른 질문이 이어져야 한다고 보인다. 변화하는 남성은 변화하는 패션 유행 마냥 계속 제자리를 돌고 돌고 있다.

남성성 연구는 남성성 자체를 구성하는 그 이항대립의 구도에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한다. 남성성은 분화하고 변화해왔으니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질문말이다. 남성의 실천 또한 계속해서 개선되어왔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남성으로서의 과거에 푹 고여있다. 자기혐오와 죄책감은 필요할지언정, 진정한 변화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순진하지 않고 유의미한 변화에 대한 고민이 더더욱 필요하다.

‘남성’과 ‘페미니스트’라는 과잉된 두 가지 자의식 속에 압도되어서인지, 남페미는 그 두 가지 이외의 고민을 그다지 이어나가지 않는듯 보인다. 기존 남성 사회를 향해 발언할 수도 없고 기존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발언할 수도 없다고 느끼면서 그다지 생산적인 논의를 이어나가지 않는다. 남성이라는 과잉된 자의식 속에 고립된 이들에게 정체성 정치에 대한 질문은 마냥 동떨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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