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이대녀’? : 페미니스트 짜깁기

라니

들어가며

2022년 대선은 페미니즘 백래시의 장이었다. 정당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이대남’의 표를 얻기 위한 ‘젠더갈등’ 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윤석열 당선인은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으며 이러한 논리 안에서 ‘여성가족부 폐지’가 대선 후보의 주요 공약으로 등장, 당선 후 폐지를 위한 절차를 밟기도 했다. 청년세대를 타겟으로 한 정치에서 페미니즘 백래시는 ‘이대남’과 ‘이대녀’를 가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차별을 두 집단 간의 ‘다툼’으로 환원시켜 그곳에 내재한 권력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더불어, ‘이대남’을 중심으로 구축된 이분법은 다른 한편에 타자로서 ‘페미니스트’를 위치시키고 ‘이대남’의 주장에 맞게 ‘페미니즘’을 왜곡시킨다. 이 구도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와 이것이 청년, 여성, 지역에 초래하는 비용을 삭제하는 동시에 2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그 위기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김보명, 2021). 이 이분법은 일견 ‘이대남’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이대남’에게도 아무런 혜택을 안겨주지 않는다. ‘젠더갈등’의 그 어디에도 청년세대의 고용문제에 대한 답은 없다.[1] 다만 그 관심을 돌릴 곳으로 ‘세대 갈등’과 ‘젠더 갈등’을 택했을 뿐이다.

[1] 이대남 담론은 4·7 보궐 선거 이후 강화되었다. ‘젠더갈등’, ‘이대남’ 담론과 할당제 폐지론은 청년세대 고용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는 대신 대기업을 위한 규제 개혁, 시장 친화적 정책을 옹호하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사는 페미니즘 백래시와 고용구조 개혁(경제민주화)에 대한 백래시, 탈냉전에 대한 백래시가 중층적으로 결합된 형태이다(권명아, 2022).

다른 한편, 대선 투표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페미니즘 백래시에 대항하는 정치적 주체로 ‘이대녀’를 주목하는 언론보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항의 주체로 ‘이대녀’에 주목하는 것은 ‘이대남’에 주목했던 정치와 얼마나 다를까? 이러한 분석은 마찬가지로 일군의 사람들을 연령과 성별로 묶어내 정치적 주체로 위치시키는 방식이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이대녀’를 호명하는 것은 페미니즘 백래시와 분리된 현상이 아니며 우리는 페미니즘 백래시의 맥락 안에서 누가,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재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같은 문제의식 아래, 여기서는 대선 레이스의 전반, 그리고 개표 결과 이후에 언론이 ‘페미니스트’, ‘이대녀’, ‘2030여성’이라는 집단을 묶어 재현한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공정’하지 않게 혜택을 원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기도 하고 ‘이대남’과 대립되는 집단으로 위치지어지기도 한다. 혹은 ‘20·30대’, ‘여성’이라는 인구통계학적 조건들로 묶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지만, 또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방식으로 겹쳐지면서 호명되고 재현되었다. 이 글은 ‘페미’와 ‘이대녀’를 중심으로 한 2022 대선에서의 ‘페미니스트 짜깁기’를 추적하면서 ‘이대녀’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성별, 연령대의 사람들을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진 집단으로 분석하는 방식이 페미니스트 정치를 축소하고 ‘이대녀’와 ‘이대남’의 이분법 구도를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논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 딱지와 소외의 전략

2022년 대선 정국에서 ‘페미’는 걸러야 할 것이 되었다. ‘젠더갈등’ 프레임과 ‘이대남’의 집결을 통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은 페미니즘을 왜곡된 방식으로 재현한다. ‘페미니스트’는 ‘공정’의 위반자이자 ‘남성혐오’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정치에 발을 들이려는 기회주의자로 그려졌다. ‘페미니즘’이 부정적이고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면서 대선 후보들의 성평등 정책은 풍부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폭력과 안전 정책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는 ‘여성’ 정책과 ‘여성’가족부가 여성만을 지원하기 때문에 ‘편향되었다’고 평가되었으며 그 속에서 양성평등[2]은 ‘남성들도’ 혜택을 받게 하겠다는 백래시 슬로건으로 전락했다. ‘이대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언설은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 되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선 후보들은 남초 커뮤니티에 방문, 인증 글을 올리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한편, 특정 매체들에는 대선후보가 출연하는 것 자체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닷페이스’에 이재명 후보의 출연이 확정 되었을 때 후보 측의 캠프에는 남성 지지층의 항의 메시지가 쏟아졌고 3천명이 접속한 공개 라이브는 ‘찢’, ‘형수’, ‘꼴페미’, ‘ㅋㅋㅋ’와 같이 조롱을 담은 슈퍼챗으로 도배되었다(조소담, 2022). ‘닷페이스’와 ‘씨리얼’과 같은 매체가 공격을 당한 이유는 이들이 페미니즘을 포함한 사회적 차별의 문제를 다뤄 ‘페미’언론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주요 언론의 스피커를 타고 대중들에게 확대되어 전해지는 반면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을 다룬 언론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에 대해 논의할 공론장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2] ’양성평등’은 한국의 여성정책의 발전 과정에서 보수기독교 세력의 ‘성소수자 반대’ 논리, 혹은 남성도 정책의 수혜를 받아야 한다는 기계적 평등의 논리와 결합해 왔다(유정미, 2019). ‘양성평등’이라는 용어의 실천적 의미를 고려하여 이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유정미, 2019)도 있지만 양성평등이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생물학적’ 성별 구분에 기초한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지적도 있다(신경아, 2016). 이번 대선에서는 ‘양성평등’이 ‘젠더갈등’ 담론과 결합하여 여성정책과 여성기구는 여성에게만 혜택을 주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이 주류 담론 및 주류 정서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온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젠더화된 삶의 각본에 저항하고 ‘정상성’의 폭력에 대항해온 페미니스트들은 자주 ‘불행’의 정동과 얽히며 분위기를 깨는(killjoy) 사람으로서 낙인 찍혀왔다(Ahmed, 2021). ‘행복’의 정동을 다루는 페미니스트 학자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페미니스트들이 주류 정서 공동체에서 ‘소외’의 경험을 해왔다는 점을 짚어낸다. 소외는 ‘사회적으로 좋은 것(재화)으로 유통되는 특정 대상들’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쾌락을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난다. 때문에 규범적인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고자 하거나 남성중심적 공동체를 유지해 온 차별과 폭력의 관행에 문제제기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소외를 경험하게 한다. “뒷전에 물러나 있어야 하는 사람의 경우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저항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존재는 ‘행복(분위기)을 깨는 사람’으로 읽힌다(Ahmed, 2021: 113). 

주목해야 할 점은, 이번 대선에서는 페미니스트를 ‘분위기를 깨는 존재’로 낙인찍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불행’과 ‘소외’의 정동은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얽히기 시작했다. 여기서 등장한 새로운 전략은,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제기 해온 사회적 차별의 문제들의 원인으로서 ‘페미니즘’을 지목한다. 예컨대, 페미니즘 백래시 정치에서 청년세대의 노동시장 성차별은 ‘공정’ 담론을 통과하여 남성 노동자를 차별하는 ‘역차별’로 탈바꿈했다. 성폭력은 무고죄로 다스려야 하는 ‘거짓 범죄’로 해석되며 여성 피해자는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사회문제를 ‘페미니즘’에 역으로 돌리는 것은 남초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담론일 뿐만 아니라 당선인의 공약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특히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윤 당선인의 선거 광고인데, 선거 광고에서 청년세대의 고용문제는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신입사원 공개채용 모집의 면접장에는 여성 면접관 두 명과 남성 면접관 한 명이 앉아 있다. 여성 면접관은 중앙에 앉아 면접자들에게 질문을 건넨다. 남성 청년은 좌우의 면접자들을 의아한 눈빛으로 둘러보다 면접장을 빠져나와 실망스런 표정으로 이름표를 뗀다. 영상의 중앙에는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라’는 메시지가 던져진다(영상 보기). 이 장면에서 ‘무너진 공정’과 상식의 문제는 질문을 던지는 여남 2:1 성비의 면접관과 그에 대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남성 청년 양쪽의 면접자들, 그리고 의기소침해진 남성 청년-국민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광고가 현실의 채용 성차별 문제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장예찬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청년본부장은 페이스북에서 “(광고 속 남성은) 빽 없고 힘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이다. 옆자리는 부모 찬스로 입시와 취업하는 내로남불 기득권의 자녀들”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대답은 그 ‘자녀들’에게 찬스를 주는 기득권자들과 면접관의 위치가 어떻게 젠더화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처럼 구조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없이 선동적인 메시지만 난무하는 정치 속에서 페미니스트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페미니스트 정치와 ‘드디어 깨어난’ 이대녀?

대선 동안 페미니스트들의 말하기는 성토대회에 가까운 형식을 띠었다. ‘소리 성(聲)’에 ‘칠 토(討)’자를 쓰는 ‘성토’라는 말은 당시의 페미니스트 말하기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크게 소리치고 울분에 차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듯 말하는 페미니스트 유권자의 말하기는 이들의 목소리가 주류 정치권에 가닿지 않고 무시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 시국토론회에서 사회자 김현미는 토론회를 두고 “저희가 지금 지향하는 방식에 대해서 학술대회인지 아니면 성토대회인지 잘 모르실텐데 둘 다 입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 행동과 시국토론회의 이어 말하기는 성토대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젠더권력의 문제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억압구조와 함께 얽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대선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과 각자의 자리에서 보았던 문제들을 말했다. 성폭력,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돌봄노동, 비거니즘, 반성매매, 기후위기 등 다양한 의제들이 등장했다. 발언자들도 여성학 연구자, 활동가, 성폭력 생존자, 학교 안 청소년 페미니스트, 비건 페미니스트, 입법 보좌 노동자 등 저마다 다른 위치성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대남’과 ‘이대녀’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얽히고 설킨 권력과 억압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편, 선거를 앞두고 관심은 2030 여성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관건은 이들이 투표장에서 결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서 2030여성들의 투표에 대해 “각종 조사에서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는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예측했다(기사 보기). 하지만 선거 막바지에 있었던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선언과 민주당에서의 추적단 불꽃 박지현 활동가의 영입 등의 변수는 이 예측을 크게 엇나가게 했다. 0.73%포인트라는 역대 최소 득표율 차이와 20·30대 여성의 표가 이재명 후보에게로 결집된 현상은 세대와 성별을 갈라친 전략이 실상 유의미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투표 결과가 나온 후 ‘이대녀’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2030여성이 초박빙 대선의 주역으로 평가되면서 ‘이대녀’ 결집 현상에 대한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대녀’의 결집 현상은 ‘이대남’ 정치에 ‘뿔난’ 여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서사로 읽혀지기도 하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갑작스레 등장한 현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기사 보기).  ‘이대녀’의 결집 현상을 급작스럽거나 예외적인 현상으로 바라보는 해석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한 것은 기성 권력이 지금까지 젊은 여성들의 활발한 정치 참여에 무관심했음을 증명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대선 전후로 유권자들이 왜 특정 후보자를 찍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재명을 찍었다는 ‘크라잉재명’부터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쏘리재명’, 양당 대결 구도 때문에 심상정을 찍지 못한 사람들이 후원을 하며 남긴 메시지인 ‘지못미 심상정’까지 후보자의 이름 앞에 붙은 표현들은 특정 후보자를 찍거나/찍지 않은 다양한 이유들을 보여준다. 더불어, 선거 직후에 심상정 후보에게 하룻밤 사이에 7억원의 후원금이 보내진 것과 대선 이후 한 달 동안 2030여성 4만명이 더불어민주당에 신규 당원으로 가입한 현상은 투표 결과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이재명을 지지하는 2030여성들을 부르는(스스로 부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개딸’[3]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면서 2030여성들의 새로운 정치방식에 대한 분석들이 등장하고 있다.

[3] ‘개딸’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극중 ‘성격이 드센 딸’을 부르는 애칭으로 대선 패배 이후 이재명의 2030 여성 지지자들을 호칭하는 명칭 중 하나이다.

‘이대녀’의 결집 현상이나 특정 정당의 젊은 여성 지지자들의 정치를 분석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간혹 이러한 분석은 ‘20·30대의 여성’, ‘페미니스트’, ‘OO지지자’이라는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집단을 끌어당겨 붙여모으고 이를 매끄럽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같은 분석방식은 집단 간, 집단 내부의 정치적 의견 차이를 삭제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일군의 사람들을 ‘이대녀’라는 집단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효과를 내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다양한 이름들을 연결시키고 이어붙이는 이 ‘짜깁기’는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페미니스트 짜깁기’ 전략은 무엇을 남기는가?

모든 ‘페미니스트’는 ‘이대녀’가 아니고 모든 ‘이대녀’가 ‘페미니스트’도 아니며 같은 방식으로 이들은 모두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지지자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필자는 이재명 후보를 찍었다는 2030대 여성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이들이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묻고자 하는 바는 이 집단을 일련의 타래로 연결하여 구체적인 맥락을 지우고 ‘이대녀’라는 특정한 인구통계학적 조건으로 경계지어진 집단으로 호명하는 방식이 가지는 효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이대남’이라는 수사에도 동일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페미니스트’, ‘2030여성’을 ‘이대녀’로 위치짓는 방식은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첫 번째, 이러한 수사는 페미니스트 주권자들이 제기했던 다양하고 폭넓은 권력에 대한 문제를 그저 특정 연령대의 특정 성별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달린 문제로 축소시켜버린다.20·30대’, ‘여성’이라는 인구통계학적 조건의 바깥에서 페미니즘을 외치거나 여기에 연대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20·30대가 아닌, 여성이 아닌 존재들을 페미니스트 정치의 바깥으로 밀어버렸을 때, 페미니스트 정치는 그만큼 축소될 수 밖에 없다. 둘째, ‘이대남’ 정치에 대항하는 ‘이대녀’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대남’ 대 ‘이대녀’의 이분법적 구도는 정책 기획이 이 구도를 기반으로 해서 논의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된다. 3월 30일 여성단체들과의 면담에서 인수위는 ’20대 남자들이 일자리도 없고, 이중잣대로 여자들이 편의대로 자기 살기 위한 편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 대해서 젊은 남성들이 분노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정치권에서 청년 정책과 여성정책이 ‘이대남’과 ‘이대녀’의 구도 안에서 고려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기사 보기). 마지막으로 이는 청년 세대의 의제를 남성과 여성 간의 ‘젠더’문제로 환원시키고 다른 문제를 삭제할 위험이 크다. 젠더의 문제는 계급, 섹슈얼리티, 장애, 인종 등의 문제와 분리되어 선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젠더라는 의제만을 놓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노동, 거주, 돌봄, 장애 등의 문제들이 어떻게 젠더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교차적으로 살피고 정책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집단이 놓여 있는 세부적인 맥락을 보아야 한다. 

나가며

대선이 지나고 새로운 정부의 인수위원회가 들어왔고 6월 지방선거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간 대선을 이기기 위해 구체적인 대안 없이 던져 놓기만 한 공약들은 당선인의 당 내외부에서 문제시되고 있으며 새로운 정부는 ‘여가부 폐지’ 공약 이행을 번복중이다. 또한 ‘갈라치기’의 정치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대남’, ‘이대녀’라는 범주 역시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혐오를 정치적 자원으로 삼는 정치인은 ‘장애’를 또다른 혐오의 구심점으로 삼아 떠났고 이번에는 ‘볼모’와 ‘인질’이라는 말로 ‘일반시민’ 대 ‘장애인’이라는 허황된 이분법적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혐오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같은 정치는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

우리는 앞으로도 여러 짜깁기와 마주칠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기획된 작업일 수도 있고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조우하게 된 이름일 수도 있다. 이름을 붙이고 떼고 연결하는 작업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름 붙이기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해주거나 주권자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어떤 짜깁기는 사람들을 이분법적 틀 안에 가두고 오히려 기존의 차별을 강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만난 그 이름을 ‘누가 부르고 어떠한 논리 위에서 연결짓는가’라는 질문은 이분법적인 혐오의 정치를 떠나기 위해서 첫 번째로 물어야 할 필수적인 질문이다. 


참고문헌

  • Sara Ahmed(2010). The Promise of Happiness,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서울: 후마니타스.
  • 김보명(2021). “‘젠더 갈등’, 무슨 문제?”, 젠더어펙트 연구소: 백래시 대응 긴급토론회.
  • 권명아(2022). “이대남에서 정권 교체 담론까지, ‘민심’의 되먹힘과 정동정치”, 한국여성학회·동아대젠더어펙트연구소·한국성폭력상담소: 세대와 젠더분열을 넘는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포럼.
  • 신경아(2016). ”여성정책에서 성평등정책으로?”, 『한국여성학』, 32(4), 1-36쪽.
  • 유정미(2019). “반격의 “양성평등”에서 “(양)성평등”의 재정립으로”, 『한국여성학』, 35(2), 1-35쪽.
  • 조소담(2022). “‘반페미’에 대한 정치권의 응답, 어뷰징에 반응하는 정치가 혐오를 키운다”, 한국여성학회·동아대젠더어펙트연구소·한국성폭력상담소: 세대와 젠더분열을 넘는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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