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지
* 소제목은 이소호 시인 <캣콜링>을 참고했습니다.
* 등장인물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돈스피크잉글리쉬
2012년 런던에 있는 상업 갤러리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그 갤러리는 이탈리아계 영국인 토니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의 아버지가 런던 한복판에서 수십 년간 일군 갤러리의 지하 한구석을 빌려 차린 곳이었다. 고상한 취향의 아버지 갤러리와는 달리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선보인다는 컨셉이었다.
당시 나는 전공인 경영학에 영 마음을 주지 못하고 긴 휴학을 이어가고 있었다. 토니는 내가 국내 아트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만났다. 그는 한국의 소도시에서 열린 아트페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외 갤러리 참여자였다. 런던으로 돌아간 토니가 일을 제안했을 때 행운이라고 느꼈다. 일본 여행 말고는 해외에 가본 적 없는 나에게 런던에서 일을 하며 산다는 건 분명 좋은 기회였다.
다만, 나는 예술 전공자가 아니었고, 관련 경력은 아트 컨설팅 회사 3개월 인턴직이 다였다. 결정적으로 영어를 잘 못했다. 나의 영어는 수능에는 최적화되어 있었지만, 듣고 말하는 데는 도통 쓰일 줄 몰랐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토니가 내게 일을 제안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매년 한국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여했고, 한국 작가와도 거래하고 있었기에 ‘뭐든 역할이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갤러리에서 내 역할은 ‘동양인’이었다. 아트페어나 전시장에서 내가 하는 일은 작품 옆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고객 응대와 관련된 일은 모두 토니가 도맡았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는 나의 존재는 갤러리 부스를 더 신비하고 예술적으로 만들어주었던 듯하다. 그런데 내가 고객에게 다가가 작품 가격표를 건네거나 배송 주소지를 묻는 순간 그 효과는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나의 영어가 발설되는 순간 작품과 함께 구경되던 나는 사라지고 아시아 노동자를 마주하는 불편이 생겨난다는 것을 고객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똑같은 나인데 입을 다물면 아우라가 생기고, 입을 열면 불편함을 만든다.
두유스피크잉글리쉬
다행히도 전시장 밖에서는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있었다. 토니는 업무 외에도 나를 이곳저곳에 초대하거나 데리고 가 주었다. 그의 여자친구를 포함해 친구들과 만나는 일은 늘 즐거웠다. 다들 내 부족한 영어를 듣기 위해 몸을 기울여주었고, 나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러블리’하다고 말해주었다. 토니의 여자친구는 나에게 항상 ‘스위트리틀걸’이라고 말하며 포옹을 해주었는데 그때 내 나이는 24살, 여자친구는 26살이었다.
그는 전시 오프닝이나, 졸업 전시 등 갤러리와 관련된 각종 모임에 항상 나를 데리고 다녔고, 그곳에서 나는 환영받는다고 느꼈다. 나를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나에게 작가냐고 물어봤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는 중’이라고 얼버무려 대답하면 다들 부러운 눈빛을 보내며 ‘좋을 때야, 많이 경험해 봐’ 등의 조언 따위를 해주었다. 종종 자기가 시도한 것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서 아시아인, 정확히 한국인 여성을 만나면 곤란해지곤 했다. 처음엔 어색하고 당황스러웠고, 경험이 쌓이면서는 짜증이 났다. 제일 처음 어떤 모임에서 한국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에게 ‘두유스피크잉글리쉬?’라고 대답했다. 그 후에도 누군가 참석자 중 한국인이 있다며 데려오면 마지못해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간단히 인사한 후 헤어지는 일들이 이어졌다.
“이 아시아인들을 다 누가 들여보낸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다.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26쪽)
우리는 서로의 옷차림, 행동, 제스처를 살피며 각자가 누구를 통해 어떤 연유로 여기에 와 있는지, 서로가 얼마만큼 한국인이며 누가누가 더 한국에서 멀어져 있는지, 그리고 누가 더 런던에 있어야 하는지를 재보았던 것이다. 마치 이 무리에, 아니 이 씬에, 런던이라는 이곳에, 녹아들 수 있는 한국인의 쿼터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시합을 우리끼리 벌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스터, 정
원활한 적응을 위해 첫 주거지는 한국인 남성 교포 정씨가 운영하는 한인 플랏(flat; 영국, 호주 등의 국가에서 단독주택이 아닌 공동주택이나 아파트 형태의 주거 공간)으로 잡았다. 정씨는 영국에서 나고 자란 영국인임에도 한국 정서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교포 2세로, 한인 여성 유학생 위주로 세를 놓았다. 이 집에는 단기로 머물고 간 애들이 없다며 본인이 몇 명을 졸업시켰는지 읊었는데, 실제로 오빠 노릇을 톡톡히 했다. 비가 오면 같이 부침개를 부쳐 먹고, 주말 저녁이면 함께 모여 유학 생활의 서러움을 들어주며 가족처럼 지냈다. 정씨 오빠는 특유의 유쾌하고 ‘정’ 많은 성격으로 런던 한복판에 작은 한국을 꿋꿋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2개월쯤 지나자 이왕 나온 거 외국인과 함께 살면서 영어도 더 배우고 현지 문화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빠르게 실행에 옮겨 나와 동갑인 아일랜드인 ‘이안’의 플랏을 찾아냈다. 굳이 이사를 도와주겠다던 정씨와 건넛방 언니는 이삿날 이안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언니는 차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정씨 오빠는 문자로 남자친구냐고 물어봤다. 대답을 듣더니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냐’며 나무랐다.
얼마 후 런던에서 열린 아트페어 초청장을 정씨 오빠에게 보냈다. 아트페어에 와서는 잘 지내고 있는지, 그 남자애와는 별일 없는지 물었다. 친구로 잘 살고 있다니 의심스러운 눈길로 흘겨보며 ‘어쨋든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건넌방 언니는 나에게 배신감을 느껴 서운해했다고 전했다. 이사 가는 걸 뻔히 알았는데 왜 배신감을 느끼냐고 물었더니, “외국인 플랏으로 간다고 했지, 백인 남자랑 같이 산다고는 안 했잖아!”라고 외쳤다고.
마이너-플러스마이너스-필링스
이안은 아일랜드의 명문대에서 경제학과 수학을 전공한 유수의 인재로 세계적인 투자은행에 취업해 영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였다. 이안과 나는 환상의 짝꿍이었다. 비슷한 교육 수준과 나이, 인디 음악과 영화 따위의 문화적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둘 다 외국인 신분으로 런던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부심과 굴욕감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입한 세계 내에서 각자가 가지는 ‘마이너’한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체구가 작고 볼품없어 투자은행으로 들어가는 명품 양복 행렬 속에서 M&S(식품부터 잡화, 의류까지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영국의 할인마트) 키즈 양복으로 출근했다. 더블린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오로지 공부로 대학에 갔는데, 그해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본인 한 명뿐이라고 했다. 이안이 가진 것이라고는 명석한 머리 밖에는 없었고 그래서 그 머리를 굴려서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비틀고 비웃었다. (M&S 키즈 양복 역시 그런 유머 코드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우리 둘은 전형적으로 혼자서는 쭈구리지만 뭉치면 용감해지는 유형이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했지만 혼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온갖 것들을 함께 해나갔다. 그때 했던 것들이란 전형적으로 인디 문화 혹은 힙스터 문화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투모로랜드 페스티벌(매년 봄 벨기에에서 열리는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 갈 계획 세우기(티켓팅에 실패했다), 폐성당, 폐공장 등 온갖 폐허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팝업 전시나 카페 같은 것들 찾아다니기, 의상 테마와 시간, 장소만 알려주고 상영작은 알려주지 않는 시크릿 시네마 체험하기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저 ‘찐따’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각자가 가진 무기가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며 용기를 북돋았다. 우리가 향유하고자 한 문화가 ‘마이너 문화’이기에 우리가 가진 ‘마이너’성이 결합해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우리는 용감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아시아-여성, 예술계를 담당했고, 이안은 지성과 덕력, 자기비하적 재치(주로 신체, 액센트에 관한)를 담당했다.
재미있는 건 우리의 이 마이너성은 참여자에 메이저가 많을수록 힘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마이너는 정말 수적으로 희소해야 의미가 있기에 어떤 장소에 나와 동일한 특성이 많아지면 나의 무기는 무뎌지고야 말았다. 이것은 나만의 현상은 아니어서 우리는 각자와 같은 무기를 지닌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 날카로움이 부드러워지다 못해 흐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안과 나는 곧잘 서로의 수치심이나 민망함을 감지했고 그럴 때일수록 더 허세를 부리며 각자의 못난 점을 부풀리고 비웃었다. 한 쌍의 복어처럼.
그러니까 내가 나를 때리는 것은 아프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나를 비웃는 것, 내가 먼저 나를 내리치는 것, 내가 먼저 나를 꺾는 것이 덜 아픈 길이고,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이 경험은 꿈으로, 혼잣말로 예고 없이 툭툭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몸서리치곤 했다.
헤이뷰티풀
우리가 사는 곳은 ‘카나리워프’라는 런던 금융 중심지로 런던에서 유일하게 고층 빌딩을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오피스텔 유형의 건물이 존재하고 삼성동 코엑스처럼 모든 건물의 지하가 쇼핑몰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거주자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금융권 종사자와 그들을 서포트하는 산업의 종사자. 정장을 입은 자와 정장을 입지 않은 자.
처음, 나는 나에게 말을 거는 모든 이에게 호의적이었다. 현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는 모두 나의 영어 교육자였으며, 현지 문화 전도사라고 믿었으니까. 말을 거는 사람은 다양한 인종의 남자였는데, 다짜고짜 가격을 묻는 질문을 듣고 나서야 이 사람들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나는 종종 이안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그의 회사 앞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 먹거나 장을 보거나 했다. 어느 날은 이안의 대학 동창이자 회사 동료인 제이슨이 집에 놀러 왔는데, 회사에 “이안이 아시아 창녀랑 동거한다”라는 소문이 났다고 웃으며 얘기했다. 당시 나는 크고 작은 불안과 짜증이 쌓여가고 있었다. 다음 날 이안이 퇴근하며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큰 소리로 외쳤다. “I’M NOT A FUCKING ASIAN HOOKER!!”
이 일을 계기로 유명세를 치른 나는 이안 동료의 승진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나 사실 창녀 맞아”라고 말하며 농담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행동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후회된다…) 그때 내가 나 스스로를 창녀라고 말할수록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모두가 나를 창녀로 생각했으면서.
파티에서 돌아온 후 이안이 투덜거렸다. “그 멍청이가 하는 일은 휴고 보스 양복 입고 멍청한 잉글랜드 액센트를 쓰면서 위스키 마시는 게 다야.” 승진한 동료는 잉글랜드 남부의 상류층 출신으로 세일즈팀에서 일한다고 했다. 이안은 리서치 팀에서 일했다. 이안은 리서치팀을 똑똑한 사람만 갈 수 있는 팀으로 해석했지만 그것은 책상에 앉아 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안은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저녁 7-8시에 퇴근했다. 매일 12시간 이상 7개의 모니터에 떠 있는 숫자를 바라보며 일했다. 그리고 이안은 잉글랜드 액센트 대신 아일랜드 액센트를 쓴다.
이안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창밖을 보는데 노란 가로등 불빛과 함께 푸른색, 보라색, 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바뀌는 오피스텔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 정장을 입지 않은 아시아 여성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백인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때마다 그들이 나에게 하던 말. “야 봐봐 또 아시아 여자들이 너 쳐다본다. 봐봐. 또 너 쳐다보잖아.”
웨얼아유고잉?
런던을 영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 넓게 유럽이라고 할 수 있을까? 런던은 이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도시이다. 더 많은 것이 얽혀 있고 더 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 백인 비행청소년 차브족[1], 저임금 일자리를 대체한 폴란드인처럼 ‘백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한 덩이의 백인이 아니라는 것, 흰 얼굴 사이에도 촘촘한 우열과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 폴란드인의 영어와 인도계 영국인의 영어 중 무엇이 더 우월한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럼 백인 저임금 노동자와 나를 저울의 양쪽에 둔다면 저울은 어디로 기우는 걸까?
[1] 차브(Chav)는 영국에서 교육받지 못한 하층계급 문제아를 뜻한다. 차브는 주로 백인 노동계급을 의미하는데, 그 특징으로는 어눌한 발음, 청소년 임신, 공격성, 약물남용 등이 주로 꼽힌다. 차브의 반사회성이 주목되며 영국 사회에서 차브족은 공공연한 혐오 대상이 되었다. 한편, 차브족은 과한 악세서리와 가짜 명품 의류 등을 즐겨 입는데, 패션계에 차브족 모티브가 유행하면서 현재 ‘차브’는 특정 패션 스타일을 일컫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참고: 오언 존스, 『차브』; 오욱석, “집단의 드레스코드: 차브”)
그러니까 이 대도시에 얽혀 있는 서열이 대충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게 되면서 계속 계산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안은 아일랜드 액센트가 강하니까 -1, 명문대 출신이니까 +2, 투자은행인데 리서치 부서니까 +2, 키가 작고 못생겼다는 건 -1, 가난한 노동자 집안이라는 건 -2쯤 되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계층도 눈에 보일 수 있다는 걸 런던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인종, 출신, 직업, 교육수준과 취향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가운데 서서 눈알을 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상상한 ‘유럽’은 상상 속에 있는 건가?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제이슨의 여자친구 제이미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큰 키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이베이비”라고 불렀다. 거기에 나는 속도 없이 “마미”라며 어리광을 피웠다. (제이미는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이안의 회사 동료 모임에 종종 초대되었다. 그 엘리트 그룹에서 나는 못생긴 영어를 구사하는 ‘펀&러블리‘한 특별 출연자였다. 종종 만나는 한국인 여성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곳에 뿌리내리려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며 규칙을 흐리는 철없는 여자애였다. 돌이켜보면 맞는 말이다.
갤러리에서 하는 일은 나아지지 않았다. 라벨링, 인쇄 작업, 배송 예약, 소품 픽업 등의 백오피스 업무를 했고, 현장에서는 천천히 장내를 걸어 다니며 입꼬리에 힘을 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점점 나는 내가 하는 일의 효용과 토니가 내야 하는 비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왜 이곳까지 부른 것일까. 그러니까 이 돈 많고 할 일 없는 40대 백인 남성은 왜 24살 아시아 여자애를 할 일 없는 갤러리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고백투마이컨트리
마네킹처럼 일하면서 느껴지는 나의 존재감, 서로를 위할수록 드러나는 자기 결핍, 도무지 진지하거나 어두워질 수 없는 나의 영어 실력에 점점 염증이 났다. 이안에게는, 유일하게 이안에게는 짜증을 낼 수 있었다. 그만큼 이안도 나에게 짜증을 냈다.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짜증을 서로에게 쏟고 함께 울곤 했다. 런던에서 이안은 멍청할 수 없었고, 나는 똑똑할 수 없었다. 그것이 런던에서 우리의 역할이었다.
원래 약속된 일정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왔다. 토니는 왜 일찍 돌아가는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3개월 후, 그는 한국에 있는 아트페어에 참석했고 나는 현장 일을 도와주기 위해 삼성역에서 만나 스태프 출입증을 받아왔다. 그러고는 그 페어 현장에 가지 않았다.
몇 년 뒤 토니에게 연락이 왔다. 삼성역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에게 그때 왜 페어에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당시 런던에서의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아 대충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날 토니는 나보다 두 살 많던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갑자기 내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나이 많은 백인 남자가 소고기를 앞에 두고 엉엉 우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말하는 ‘나’를 내보일 수 있었다. “고기 타는데 뭐 하는 짓이야.” 집게를 뺏어들고 고기를 하나씩 뒤집었다.
당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한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이민이나 워홀을 입에 올렸다. 그 동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런던에 다녀온 후의 나는 ‘해외’라는 출구전략에 흔쾌히 동감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간 곳이 다른 나라였다면 달랐을까? 글쎄. 그곳엔 그곳만의 규칙으로 직조된 계층이 존재하겠지. 그 규칙을 익히고, 적응이라는 이름의 현지화를 시도하고, 대상화되고,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문득 깨닫고, 짜증을 내고, 울고, 그럼에도 주어진 우정과 친절을 쓰다듬어보겠지.
오,디어!
이안과 나는 그 이후로도 우정을 이어갔다. 각자의 고향 집에 방문하고, 한국에서 열린 내 결혼식에 와주고, 유럽 여행 중인 우리 부부를 만나러 독일로 날아와주었다. 이안은 여자친구와 함께 독일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영국 명문대에 재학 중인 동아시아 유학생이었다. 나는 어떤 당혹감을 숨긴 채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여행 후 고민에 빠졌다. 이안은 아시아 여성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백인 남성인 것일까?
내가 알아채지 못한 그의 시선이 있었는지 함께 지낸 시간을 돌이켜봤다. 책장에 꽂혀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문판 소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내 마음은 ‘설마’와 ‘아니야’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여기에 더해 런던에서 내가 친하게 지냈던 외국인이 모두 백인이라는 사실까지 떠올랐다. 이제 이안은 물론 나 자신까지 가로지르며 온갖 생각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해야 할지 혼란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옐로 피버(yellow fever; 비아시아 남성이 아시아 여성에게 느끼는 통제 불가능한 이끌림을 가리키는 속어)가 순종적인 아시아 여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기대 있고 이들에 대한 성적 페티쉬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를 ‘옐로 피버’로 요약하기엔 또 다른 맥락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 맥락은 본능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것, 어쩌면 사회화된 본능일 수도 있겠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구조 속에 있고, 우리의 욕구는 이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왜 그가 계속 높은 교육 수준의 아시아 여성과 교제하는지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뻐근해진다. 이안에게도, 그녀에게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도) 어떤 선택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안과 나는 런던의 규칙 안에서 잡은 줄과 놓친 줄을 헤아리다 만났다. 그 규칙은 우리에게 내림표(♭)와도 같아서 우리의 목소리는 줄곧 반음씩 깎여 마이너 코드로만 들렸다. 나의 날카로움과 이안의 연약함이 안전하게 드러나던 카나리워프의 플랏을 생각하면, 우리의 플랏이 제자리표(♮)가 찍힌 악보로 느껴진다. 우리는 그 안에서만큼은 제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 어떤 구조가 있고, 규칙이 있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제자리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참고 문헌
- 캐시 박 홍 (2021). 『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노시내 옮김. 서울: 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