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 페미니즘: ‘여성의 공포’와 스펙터클의 정치

🥟만두

“여성의 공포를 이해하라.” 이 말은 무슨 일을 하는가? 이 말은 여성이 존재함을, 여성이라면 공유하는 공포가 있음을, 그리고 그 공포는 사회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전제한다. 다시, 이 세 가지 전제는 무슨 일을 하는가? 나는 감정이 무엇이냐보다 감정이 무엇을 하는가를 묻자는 사라 아메드의 제안을 받아,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포라는 감정과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지금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여성들은 무엇을 왜 두려워하고 있을까? 공포라는 감정이 왜 이토록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어떤 여성과 정형화된 ‘여성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밤길과 공중화장실이 종종 두렵지만, 그 두려움이 어둠 때문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그곳에서 강간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성이다. 그는 동시에 강간 공포의 해결책 중 하나로 제안되곤 하는 ‘안전한 여성들만의 공동체’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다. 그는 또한 지금 많은 여성의 삶에 위기를 가져오는 공포의 대상인 가족 돌봄을 오히려 종종 원하는 여성이다. 아니, 이렇듯 여성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여성이 맞긴 한가? 이 사람과 함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10년, 공포라는 감정이 무엇을 해 왔는지 되짚어보자.

1. 시작점과 연결점들

‘여성혐오’ 관념을 둘러싼 논쟁의 형태로 페미니즘 논의와 운동을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었다. “여자라서 죽었다”, “너는 나다”라는 인식에 기반한 공분과 연대는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의 폭발적인 동력을 이끌어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의 영향력에서 주로 주목되어 온 부분은 이러한 측면이다. 그러나 강남역 사건의 보도는 번화가 화장실에서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할 수 있다는 극도의 공포, 패닉을 일으키는 전 사회적인 스펙터클로 기능했음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후에도 페미니즘 대중화의 물결을 이룬 대표적인 계기는 대부분 여성의 생명—사회경제적 생명을 포함하여—을 해치는 젠더폭력 사건들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꼽아도 2016년 소라넷 디지털 성폭력과 ‘#○○계_성폭력’ 공론화, 2016년부터 이어진 ‘페미사냥’[1], 2018년 ‘미투’ 운동과 불법촬영 공론화, 2020년 ‘N번방’ 텔레그램 성착취와 2022년 신당역 직장 내 스토킹 살인사건, 2024년 ‘딥페이크’ 성폭력 공론화 등 수십 건에 이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어디서도 안전할 수 없다는 실제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드러나 왔다. 이때마다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익명의 대중으로서 폭발적인 동력으로 모이고 일어났다. 이는 이전의 여성운동이 주로 남녀고용평등법과 성매매특별법 등 젠더 입법과 제도화, 호주제 폐지와 낙태죄 폐지 등 의제 중심으로 일어나고 결집하거나 대학 등 기존 조직에 근거한 문화운동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대적으로 드러나고 확산한 젠더폭력의 이미지, 이에 따라 드리운 공포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이러한 공포에 맞대응하는 표현으로서 쓰이는 ‘용기’라는 단어이다. 대표적으로 ‘#○○계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는 표어가 있다. 이 표어는 이후의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국면마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쓰였다. 불법촬영과 수사기관의 편파적 대응이라는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이에 맞서 여성 대중이 대규모로 결집하고 몇 달에 걸쳐 이어 온 시위의 제목이 ‘불편한 용기’였음 또한 상기해보자. 이제껏 페미니즘 운동에서 용기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내세워진 적이 있었던가? 또한 ‘불편한 용기’에서의 용기는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남성에 의한 불법촬영이라는,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공포의 대상을 상정하고 있던 것이다.

2. 발굴되는 패닉, 페미니스트 모먼트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피해의 심상들은, 한국이라는 여성혐오적 사회에서 한국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이유로서 발굴되고 확산됐다. 가령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참혹한 성폭력 현장 모습, 이를테면 피해자의 나이, 피해자들이 당한 폭력의 정도와 종류를 추정한 글들이 ‘짤’의 형태로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식이었다. 자극적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빠르게 확산하는 디지털 공간에서 강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여성 고통의 경악스러운 심상은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의 메시지를 설득하고 확장하는 데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줄 만한 ‘사실’들을 찾는 데에 골몰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지금 공포스러운 고통과 피해의 이미지는 대중화된 페미니즘 실천에서 가시성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가시성의 경제는 페미니즘 운동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 운동의 목표 그 자체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Banet-Weiser, 2018). 

페미니즘 “스피커” 등으로 불리는 인플루언서의 등장은 이런 경향을 모아 더 큰 영향력을 내게 만들고 대중들이 이런 스피커 활동을 하나의 운동 방식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트위터(현 X)를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 등지에서 활동하는 이들 스피커는 여성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이미지를 발굴하고 전시한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런 활동을 통해 스피커들은 ‘여성운동가’로서 관심자원와 영향력을 획득한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한 지금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더 많이 보이게 만드는 일, 더 많은 여성을 공포로 ‘각성’ 시키는 일이 페미니즘 실천이라고 여긴다. 

가령 2022년 전후로 남성과의 구강성교로 인해 특정 질병에 걸린다는 주장과 함께 해당 질병의 치료를 위해 안면을 절개하고 들어내는 수술 과정을 담은 이미지가 트위터(현X)에 확산했다. 보기만 해도 고통이 전해지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는 많은 여성들에게 패닉과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구강성교를 한 사람과 식사만 같이 해도 병이 옮을 수 있다는 주장이 퍼졌다. 이어서 비슷한 성매개 감염병들의 고통이 발굴되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성교는 공포스러운 병의 근원, 불결한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무언가를 불결하고 역겨운 것으로 인지하는 일은 혐오를 유발한다(Nussbaum,2015). 많은 이들이 병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남성,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어 ‘오염되었다’고 여겨지는 여성과 멀어지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인증하며 안심하고자 했다. 

페미니즘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심상들과 직접 연결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것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 반복적으로 패닉에 노출되는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당연스럽게 심리적 탈진을 일으키는 것, 번아웃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활동’을 그만두는 이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그로 인해 그들이 해온 논쟁 등의 결과가 운동 내부에 쌓이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이 ‘페미니즘 판’을 떠나는 현실을 지켜보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원망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축적되고, 이런 감정은 소진의 직접적 원인인 부정적 이미지뿐 아니라 여기에 충분히 반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다른 여성들에게 향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고 이런 자극에 계속 노출되는 ‘고통’을 자처한다고 여겨지는 ‘스피커’의 존재는 그 자신의 실제 목적과 관계없이, 추종과 물신화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런 무조건적 옹호의 풍조는 운동 내부의 성찰과 논쟁을 어렵게 만들며 운동을 경직시키고 혐오 확산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3. ‘같은 공포’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여성 만들기

이처럼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에서 공포가 중요한 감정으로 다뤄지면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공포’는 여성으로서 연대와 실천의 조건, 더 나아가 여성의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여성으로서 평생에 걸친 공포를 겪어보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여성, 특히 이전까지 ‘남성의 삶’을 살아왔다고 상정되는 트랜스여성은 여성일 수 없다는 차별적 언설이 등장한다. 이는 트랜스여성의 삶에 대한 몰이해를 담은 혐오발언이라는 점에서 문제다.

이러한 언설이 페미니즘 운동에 미치는 더 큰 악영향은 여성을 ‘공포를 느끼는 존재’로 규정할 때 여성이 점점 더 취약해진다는 점이다. ‘여성의 공포’ 담론은 여성의 삶을 제약한다. 예컨대 ‘밤길을 조심하라’, ‘강간당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라’, ‘소셜미디어에 얼굴 사진을 올리지 마라’와 같은 말들은 여성을 물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제약한다. 사라 아메드는 “도망칠 준비를 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공포는 몸의 이동성을 제한(Ahmed, 2023: 157)”하며, 공포는 특정한 몸을 억누르고 이들이 더 적은 공간을 차지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공통의 공포를 느끼는 것’을 여성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는 여성운동의 전략은, 이런 공포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평등한 공간을 쟁취하고자 애써온 이제까지의 여성운동의 노력과 전면 배치되는 역설이 발생하고 만다. 나아가 페미니즘이 여성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주장될 때, 공포는 페미니즘의 구성 요건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공포의 담론에서 밀려나는 것은 무엇보다 여성과 페미니즘을 구성하는 다른 무수한 요소들이다. 여성의 기쁨, 욕망, 의지, 관계와 같은 것들 말이다. 

공포 이미지를 통해 어떤 여성이 남성과 가까워지는 일, 접촉을 두려워할 때, 남성과 가까이 있다고 상정되는 모호한 위치의 여성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공포를 구성하는 것은 그 여성들이 자신을 남성에게로 끌어당겨 자신들과 같은 지위로 추락시키리라는 환상이다. 아메드(2004; 2023)는 “공포는 타자가 주체를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위기의식을 촉발함으로써 타자를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낸다(앞의 글:147)”고 말한다. 그렇게 언제나 남자친구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하며 “너도 남친 사귀어”라고 말하는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끼)’, 남편 욕을 들어주길 바라면서도 결국 남편 편을 드는 ‘기혼’, 아들만을 챙기는 ‘아들맘’과 같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공포의 대상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공포를 느끼는 ‘우리 여성’과는 구분되는 타자이자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대중화된 페미니즘 운동에서 공포는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여성 주체라는 환상을 유지하고 그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4. 다가오는 불결하고 모호한 삶들

지금 젊은 대중 여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심상은 성애적 접촉과 관계, 친밀함, 돌봄의 부산물이다. 남성과 연애의 결과로서의 젠더폭력, 섹스에 뒤따를지 모를 성병과 병에 걸린 이의 모습, 남성에게 감정적·성적으로 복무한다고 여겨지는 ‘남미새’에 대한 감정 돌봄 떠맡기, 끈적이는 친족 관계와 돌봄노동의 의무 등은 온라인상에서 ‘짤’과 ‘썰’의 ‘실감나는’ 형식을 입고 여성에게 다가오거나 스쳐지나간다. 결국 여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남편의 발톱을 깎아주고 똥 묻은 팬티를 빠는 삶’으로 형상화되는 사적인 재생산 영역이며, 거기서 착취당하는 삶이다. 아메드는 흑인 남성과 마주쳐 공포를 호소하며 어머니 품으로 파고드는 백인 아이의 사례를 들며 “공포의 대상에서 멀어지는 일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는 일을 수반(Ahmed, 2023: 155)”한다고 지적한다. 사적 영역을 공포의 대상으로 상정할수록 이와 상대되는 공적 영역에서 임금노동하는 삶은 안정적인 것으로 상정되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라는 이상을 구성한다. 이 환상은 공포에 질린 여성들의 ‘사랑하는 대상’이 된다. 

주목할 점은 이때 여성의 임금노동과 경제활동 현장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차별과 위험은 과소평가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위험조차 공포의 대상을 멀리함으로써 극복해야 하며 극복 가능한 것으로 상정된다. 말하자면, 일자리와 경제력이라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공포의 대상’으로 전치되는 것이다. 가령 여성이 고용단절을 경험하는 이유는 결혼과 출산을 한 탓이므로 모든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면 고용단절은 없을 것이라는 식이다. 즉, 연애와 섹스, 결혼과 출산을 멀리할수록(4B) 여성이 생애에서 겪는 고통과 피해는 완전히 배제될 수 있으며 안전이라는 가치를 쟁취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런 논리 아래 남성 지배권력이 억압을 가하는 문제가 어느새 여성이 남성이라는 위험에 가까이 감으로써 발생한 문제가 되고 만다. 이는 구조적 차별의 원인을 피차별 대상에 전가하는 지배 논리와 일맥상통함에도,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에 근거한 이 같은 논리는 결국 4B의 실천이 여성의 처지를 개선하는 가장 근본적인 실천이라는 주장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 페미니즘 운동의 또 다른 주된 축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제를 펼친다. 여성단체와 여성학계 등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운동에서 2010년대 후반부터 부상하기 시작하여 2020년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계기로 크게 확산한 의제는 ‘돌봄’이다. 이렇듯 돌봄이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상한 데에는 우선 요양, 보육, 의료 현장의 열악함과 일상의 고질적 돌봄 부족을 비롯한 돌봄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전 사회적으로 터져나왔던 맥락이 있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체제 위기가 극에 달했고 그 원인이 생산과 성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진단이 떠올랐으며(김현미, 2020; 백영경, 2020),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탈성장 돌봄 중심 사회라는 대안이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차별적 돌봄으로부터 탈피한 돌봄 중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는 때때로 ‘여성의 공포’가 이끄는 삶과 표면적으로 닮았고, 내면적으로는 거울상처럼 다르다. 가령 비혼 여성끼리 함께 살아가는 공동주택의 모습은 둘 모두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망이다. 그러나 공포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안전과 비혼여성들만의 엄격한 구분이다. 반면 돌봄 사회에서는 친족관계를 벗어난 난잡한 돌봄(The care collective, 2021)의 근거로서 안정적인 지역 공동체에 주목할 것이다. 또한 비슷하게 지금의 성차별적 노동분업에 문제제기 할 때, 임금노동과 경제활동을 통해 독립하기를 추구하는 공포의 삶과 정반대로, 돌봄 사회에서는 돌봄의 차별 분배를 해소하여 덜 일하고 더 돌보는 사회,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정을 촉구한다.

무엇보다 돌봄 가치는 사람들에게 더 맞닿으며 뒤섞이기를, 더 천천히 긴 시간 마주하며 서로 마음과 공력을 쏟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뒤섞이는 존재들은 어쩔 수 없이 엄격히 구분할 수만은 없는 모호한 존재들일 것이다. 또한 돌봄 현장은 필연적으로 끈적거리고 때로는 불결하다. 이렇듯 돌봄은 접촉과 혼종성을 담지한다는 점에서 공포와 가장 거리가 먼 관념이다. 이런 가운데 돌봄 의제가 공포를 핵심축으로 삼는 대중화된 페미니스트 주체와 정치에 가닿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 페미니즘의 두 주요 동력은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는가.

5. 두려운 광장에서 지루한 광장으로

갑작스럽지만 다시 ‘불편한 용기’ 시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실 이 시위에 대한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 제목의 원뜻과는 다른 의미로 강렬한 불편함으로 남아 있다. 아니,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불용’ 시위는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가 가능하다고 내세웠다. 공식 홍보물을 통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이는 여성의 모습을 가장하려 들지만 흉측한 모습이 감춰지지 않는 침입자의 형상으로 그려졌다. 다수의 시위 주체들에게 침입자는 남성이며, 시위 참여자의 신상을 함부로 찍어 유포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이 공포는 실제 사례로, 역사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늘 스스로가 주류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어떤 여성, 내게는 공통의 공포를 공유하며 침입자를 색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익명의 군중이 더 두려웠다. 수상한 사람이 서성대는 것을 발견한 누군가 “찍지 마!”를 선창하면 그것이 거대한 물결이 되고, 언제든 주최 측이 나서서 군중 중 한 명을 잡아내는, 다른 이들에게 든든함과 벅참으로 여겨질지 모를 것들이 내게는 두렵다. 

최근 비슷한 감각을 느낀 것은 12월 7일 ‘응원봉 광장’에서였다. 광장에 모인 주로 젊은 여성일 거대한 인파가 염원과 분노 등의 감정을 일제히 K-팝 음악과 응원봉의 물결로 쏟아낼 때, 많은 이들이 연대와 힘돋우기를 읽어낸 그 현장에서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10년, 내게 응원봉으로 상징되는 익명의 여성 대중은 불매운동과 청원운동 등으로 고무적인 성과를 냄과 동시에, 다른 집단 구성원이나 집단에서 벗어난 한 여성을 괴롭혀 죽음까지 몰고갈 수 있는 존재였다. 

두려움이 잠시나마 걷힌 것은 응원봉 광장을 지나 ‘남태령’과 ‘한남동 키세스 광장’을 지나올 때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의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자신을 논바이너리라고, 트랜스남성이라고 소개하며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발언자를 보는 청중들의 표정이었다. 열렬한 환호, 분위기에 따르는 듯한 환호, 마지못한 듯한 주목, 드물게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 그리고 꽤 다수의 그저 그러냐는 듯 평온하고 약간은 지루한 듯한 무덤덤한 얼굴. 이는 트랜스젠더를 가장하여 침입할 것이라 상정되는 누군가를 경계하는 긴장된 얼굴과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두려움 없는 얼굴. 

내가 비슷한 얼굴을 하게 된 때도 있었다. 학내 민주화를 위한 동덕여자대학교의 투쟁 과정에서, 재학생연합은 2월 12일 시민사회 연대 집회를 열었다. 해당 집회에는 평소 나와 입장이 달라 내가 비판해왔던 단체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집회 참여자로서 나는 그들의 발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약 혐오발언이 나와 문제 제기를 하게 된다 해도 우선은 그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선이니까. 동덕여자대학교 투쟁에 동의했기에 발언 내용에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살이 에이도록 추운 날이었고, 발언은 6시간이 넘는 집회 시간 내내 이어졌다. 나는 찬 도로 위에 은박담요를 감싸고 앉아 조금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발언을 들었다. 발언을 들으며, 공포를 매개로 한 거대한 익명의 결집이 가져온 개개인의 움츠러든 몸, 신체와 공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그들 사이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6. 나가며

지금 한국 사회 페미니즘의 두 주요 동력은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공포라는 감정과 밀접하게 관계 맺으며 페미니스트로서 정체화하고, 그 결과 서로 멀어지기를 삶의 전략으로 삼게 된 대중화된 여성운동 진영. 그리고 상호 침투와 구체성을 담지하는 돌봄 가치를 설득하고자 하는 또 다른 여성운동 진영.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마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같은 의제를 논하는 자리에 이들을 앉혀둘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마주한 자리에서 서로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지루함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적어본다. 지루하겠지만 따라가보자. 그는 ‘강간당할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조롱당하곤 하던,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머리가 짧아 전형적 여성상을 따르지 못한/않은 사람이다. 그는 여성들만의 공동체는 ‘서로 성적 끌림의 대상이 될 염려가 없으니 안전하다’는 통념을 깨는, 그럼에도 이제와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호명되지조차 않는 레즈비언이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사이버괴롭힘과 군중이 두렵다. 그는 좋아하는 상대와 법적으로 가족이 될 수 없기에 내 가족을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돌볼 수 있는 삶을 바란다. 그리고 모두가 돌봄을 기피하며 잔뜩 긴장하며 지내기보단 “수저를 그냥 놓고 싶다”(기사 보기)는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경악하고 압도시키는 거대한 스펙터클 이미지보다는, 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물결에서 ‘연대뽕’을 맞기보다는 페미니스트 한 명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공포를 걷고 사람을 들여다보면 모든 이야기에는 맥락이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분명 한국 사회에 ‘충격과 공포’였다. 하지만 깜짝 놀래킨 다음, 그다음의 이야기를 우리는 계속 써내려 갔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 Ahmed, S. (200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서울: 오월의봄.
  • Banet-Weiser, S. (2018), Empowered: popular feminism and popular misogyny, Duke University Press. 
  • Nussbaum, M. (2004),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Princeton University Press, 조계원 옮김(2015), 『혐오와 수치심』, 서울: 민음사.  
  • The Care Collective (2020), The Care Manifesto: The Politics of Interdependence. Verso, 정소영 옮김(2021), 『돌봄 선언』. 서울: 니케북스
  • 김현미(2020),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 문화』, 13(2), 41-77쪽.
  • 백영경(2020),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창작과비평』, 48(3), 36-48쪽.
  • 이민주(2024). 『페미사냥』, 서울: 민음사.

댓글 1개

  1. ‘페미스피커’와 ‘4B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으로 학술적인 비평을 하신 것에 대하여 응원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의 여성운동도 일정 부분 충격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폭발했던 지점이 있었던 부분을 생각하면 리부트 이전과 이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여성의 공포가 여초 커뮤니티의 에코 챔버로 인하여 어떤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는지, 여성의 공포가 ‘발굴’되는 것과 ‘표면화’되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지가 조금 더 논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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