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

# 페미니즘 리부트와 상호돌봄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라고 말하면 너무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 그 시간들은 끔찍할 때가 더 많았다. 돌봄이라는 것은 단순히 응원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다. 접촉해야 하고 감정을 끌어 안아야 하며, 타자와 같은 시공간에 머물러야 하고, 돌발적이고 우발적이며, 때론 예측 불가능하다. 돌봄은 서로의 밑바닥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자 그 밑바닥을 쓸고 닦아줘야 하는 일인 것이다. 타자의 타액을 받아내고, 배설물을 치워주는 일이 바로 돌봄이다. 세상에 우아한 돌봄은 없다. 취약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안그래도 번거로운 돌봄이 한층 더 심란해지고 끔찍해진다. 내가 겪은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 그러했다. 우리는 자주 소진되고, 서로에게 화가 났으며, 서로가 미워졌고,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이 인정해주는 능력을 가지지 못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래야 우리의 존재도, 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투명가방끈 연혜원)
페미니즘 리부트에서 페미니즘은 폭력과 억압에 대한 언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 서로의 해결될 수 없는 구렁텅이들을 끌어안을 어떤 것이 되었다. 발견한 언어와 그로 인해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언어를 붙일 수 있게 된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시위, 독서모임, 활동, 온라인 공간 등) 서로를 찾았다. 서로의 몸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들은 끈적였다. 페미니스트들이 모인 공간들은 필연적이게도 서로를 돌보는 공간이 되었다. 언어를 갖게 된 경험들과 목소리들은 해방감만을 주지는 않았다. 고통을 언어화하고 드러내는 일은 서로를 취약하게 만들었고, 취약한 몸들은 서로의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메드(2023)가 “어떤 감각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일은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과 몸이 맺는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의미에서 신체적 공간의 재구성을 수반”(66)한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고통은 신체 표면을 계속 상기시켰다. 서로의 이야기는 ‘우리 (공동체)의 상실이나 슬픔’이 되기도 했고, 어떤 발화는 이야기될 수 없이 지워졌다.
동시에 그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시도들은 결국은 누군가의 소진으로, 다툼으로, 취약함으로, 그리고 이 공간에서 벗어나는 결과로 이어지고는 했다.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으면서도 사회에 낼 목소리를 함께 만들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약속들은 종국에는 서로를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 데려다놓고는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흩어진 많은 모임들, 지속되는 활동들과 그 어딘가에서 남아있는 돌봄의 흔적들은 각자의 몸에 남아 움직이고 있다. 그 흔적은 실패로, 고민으로, 활동의 또 다른 질문으로, 고통의 발자국들으로 엉기고 설켜 여전히 지금 여기에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해석하는 데 우리가 돌봄을 그 중심에 둔다면, 그 이후의 10년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특히 전사회적인 돌봄의 위기를 경유하며 우리는 어떤 돌봄의 자장 안에서 리부트 (이후)를 살아가고 있을까?
# 돌봄을 이해하는 갈래들
페미니스트들이 돌봄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제도로서의 돌봄, 정동으로서의 돌봄)을 살펴보자. 먼저, 정치와 제도로서 ‘돌봄’을 우리 삶에 중심에 놓자는 선언들은 민주주의의 패러다임을 돌봄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논의해왔다 (더케어컬렉티브의 『돌봄선언』, 조안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 체제전환운동포럼 등). 이러한 돌봄으로의 재편은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던 돌봄을 정치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게 했다. 즉 돌봄의 책임을 분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의제가 부정의, 불평등, 차별, 배제를 시정할 가능성으로 제시되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돌봄의 위기’에 직면함과 함께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성역할로 정의되어왔던 돌봄을 사회적, 정치적 패러다임의 중심으로 두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돌봄은 정치적인 의제일 뿐 아니라 정동이기도 하다. 서로의 몸이 부대낄 수밖에 없는 돌봄의 현장들에서 상호호혜성, 사랑, 보람과 같은 ‘좋은’ 감정들 뿐만 아니라 우울감, 무기력감과 소진감 등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얽혀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피할 수록 ‘좋은’ 것이 되거나, 반대로 “좋은 돌봄 사례들이 작은 영웅들의 서사로 소비”(기사 보기)되어왔다. 이때, 돌봄을 받는 존재들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나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들이 경험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서 사라 아메드(2021)는 돌봄에서의 ‘불행’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행복이 부정적인 감정들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관한 아메드의 설명은 부정적인 정동이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돌봄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왔다. 한편, 벌랜트(2024)는 돌봄을 낭만화된 정치 의제로만 위치지을 때, ‘잔인한 낙관’이 작동함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낙관적 애착의 정동 구조가 특정한 환상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려는 지속적인 경향을 포함”(10)하며, 그 변화의 환상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 때 낙관이 잔인한 것이 된다고 설명한다. 즉 돌봄을 수행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과 세상이 좋게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 낭만적인 환상은 실패를 경유하며 잔인한 것이 된다. 벌랜트는 돌봄의 수사학은 제도적일 뿐만 아니라 잔인한 낙관을 만들어내는 정동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돌봄이 모든 존재들에게 충분한 자원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낭만화된 돌봄의 수사학이 돌봄 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또, 잔인한 낙관은 도리어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야 가능한, 돌봄을 통해 연대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 일인지를 감추었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돌봄의 관계는 치밀하게 여러 가지 층위를 다툰다. 사회전환 의제로서의 돌봄, 활동 내에서의 돌봄, 스스로에 대한 돌봄 등 ‘돌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망을 가지고 페미니즘과 함께 이곳에 있어왔다. 이를테면, 돌봄을 사회화하고 돌봄의 관계로 사회를 재조직하자는 전환의 화두는 페미니스트로서의 고민 혹은 삶과 동떨어져있지 않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돌봄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며, 돌봄의 다양한 측면의 실행에 개입할 것을 질문해왔다(백영경, 2020). 또한, 어떤 개인의 돌봄 희생만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대안적인 공동체를 시도해보려는 노력들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어 돌봄의 문제는 빠질 수 없는 화두였다.
나는 이 글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제로서의 ‘돌봄’과 끈적하게 얽히고설킨 정동으로서의 ‘돌봄’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히나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퀴어페미니즘, 장애여성운동, 청소년페미니즘, 예순 이후 페미니즘 등 교차적인 페미니즘을 고민해왔던 운동들은 단체의 운영과 중심 의제에 있어 돌봄을 중심에 두어왔다. 취약하고 주변화되는 존재들이 함께 활동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곧 장애인, 이주민, 퀴어, 청소년, 노인 등의 삶에서 시작하는 변화를 꿈꾸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환으로 여기에서는 내가 활동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1]에서 상상해왔던 돌봄의 양상이 어떤 방식으로 청소년 페미니즘 의제와 떨어질 수 없었는지, 그 속에서 불행한 돌봄 사례들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운동 내 단체 안팎의 의제로서의 돌봄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그 돌봄이 추상적인 낙관에 그치지 않고 부정적인 정동을 추동할 때 그 정동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1] 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2019년부터 활동을 시작하며, 활동가-연구자 사이 어디에선가 활동을 함께했다(글 보기). 비청소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청소년 페미니즘은 미뤄두고 유예해왔던 어린이·청소년기를 다시 살고 돌아보게 했다. 활동을 함께하면서야 나는 학교가 얼마나 서로를 돌보기 어렵게 하는지,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현재’를 사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고 감내해야 하는 일들로 여겨지는지를 고민했다.
김영옥과 류은숙은 책 『돌봄의 상상력』(202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돌봄은 “구체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10)으며, 돌봄의 경험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정동들의 “소용돌이가 점차 돌봄의 동심원을 형성”(11)한다. 이 글은 짧게나마 그동안 들리기 어려웠던 페미니즘 리부트 속 복잡하고 어려운 소용돌이의 일부를 함께 다룸으로써 페미니즘 리부트 안에서 돌봄의 구체성을 살피고자 한다. 이정연(2023)은 페미니스트들의 고통을 삭제하지 않고, 페미니즘 간의 관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에서 돌봄의 실패를 들여다보고 드러낼 것을 제안한다. 낭만적이지 않고 난잡한 돌봄의 형식들, 실패를 만드는 조건들, 그럼에도 돌봄의 다양한 형태를 실험해왔던 역사들을 들여다볼 것을 말이다.
# 청소년 페미니즘이 상상하는 돌봄과 그 곤경
“우리는 기준 자체를 바꾸고자 한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처럼’ 대우받을 권리가 아니라 성평등의 가치로 재구성된 사회를, ‘청소년’이 ‘비청소년처럼’ 대우받을 권리가 아니라 청소년이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한다. 여성 청소년이라는 우리의 복합적인 위치는 그 자체로 교차하고 변화하는 정체성을 증명한다. 여성의 삶도, 청소년의 삶도 단일하지 않다. 우리는 같은 ‘여성’으로도, 같은 청소년으로도 묶일 수 없는 교차하고 변화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렇듯 다양하고 복합적인 여성 청소년의 삶과 욕망을 드러내는 정치를 여기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2019년 위티 창립선언문 “우리의 말하기가 계속되도록”)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는 페미니즘 담론과 운동들 속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의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어리고 미숙하더라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위티는 청소년이 함께 잘 활동하기 위해서 어떤 요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지를 중요한 의제로 논의했다. 학교나 집 밖으로 나와 활동한다는 것은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있어 삶에서 많은 갈등을 마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기숙사 통금, 부모의 통제, 휴대폰 압수, 정치기본권의 제약 등 청소년이 활동에 함께하기 위해서는 단체와 청소년 활동가의 노력이 필요했다.
돌봄이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돌보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함께하는 활동가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어떻게 같이 개입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것, 그 문제들로 인해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더는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해하는 것, 그럼에도 책임을 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그 조건을 함께 만드는 것, 청소년 활동가가 쉽게 당사자로 재현되기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을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곁을 내는 것. 청소년 활동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호자(주로 부모 혹은 교사)와 싸우면서도 이 공간에 오는 것, 특히 수도권 중심의 활동 공간에 오는 것, 당사자로 소환되는 소진감 속에서도 그 균열을 낼 기획을 만드는 것. 취약한 이들이 취약하더라도 서로에게 곁을 내는,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유의한 의제를 만드는 활동을 고민하는 것은 어려웠다. 우리는 각자 다른 전략들을 만들고 실천해야 했다. 활동이 서로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서로를 친구가 아니라 동료로 만나고 싶다는 욕망,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동료와 친구의 모호한 경계들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 그럼에도 취약성을 공유할 친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이 모든 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활동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불분명했다.
# 돌봄의 실패
그런데 사실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이 모든 돌봄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실천이 난잡하고 종종 끔찍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2030 여성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이 중심에 설 때, 중심 바깥에서 청소년으로서의 말하기는 ‘어린데도 기특한’, 혹은 ‘발랑까진’ 발화로 재현되었고, 단체 내에서는 늘 어디까지 우리가 서로를 돌볼 수 있을 것인가 해결될 수 없는 논의를 반복했다. 또, 운동이 제아무리 ‘대안’으로 존재한들, ‘대안’ 또한 이 사회와 분리될 수는 없었다. 능력주의 바깥에서 서로의 책임을 나누고 청소년도 함께 활동할 구조를 만들자는 목표는 많은 면에서 불가능했다. 우리가 했던 많은 프로젝트들은 결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요컨대 글쓰기, 회계, 말하기 등—과 맞닿아있었으며, 사실상 빠르고 정확하게 잘 일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들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그 책임을 분담하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약속은 누군가의 소진, 누군가의 어려움, 누군가의 현실적인 제약들이라는 벽을 계속해서 맞닥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리고 이 실패들은 수많은 미움으로 연결되었다. 위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취약성에서 시작한 운동은 결국은 서로의 몸에 달라붙는 취약성으로 인해 미움으로 이어졌다. 페미니스트들은 서로를 덕지덕지 미워했다. 가끔은 서로가 너무나 원망스러워서,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원망할 수는 없어서 스스로를 미워했다. 서로에 대한 미움은 뿌리깊은 자신에 대한 미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정치적 의제로서의 돌봄과 끈적이는 돌봄으로서의 돌봄은 종종 모순적이이었기에, 그 균열은 운동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도 고통을 계속해서 형성해냈다.
돌봄의 실패는 논의되기 어려웠다. 돌봄이 실패했음을, ‘대안적인’ 돌봄이 불가능함을 인정해버리면 운동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혐오와 낙인(백래시)들 속에서 실패는 더 발화될 수 없었다. 페미니스트들의 고통은 반페미니즘과 백래시 등의 결합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해석되지 못했다(이정연, 2023). 이렇게 정서적 고통을 초래하는 사회적인 조건들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은 페미니즘과 연결된 고통을 결국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또, 상호돌봄의 실패들은 모순적이게도 자기돌봄에 대한 논의들을 다시 수면 위로 올렸다. 2030대 여성의 우울을 본격적으로 다룬 글, 보도와 책들이 대다수 등장했던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이들은 우울을 형성하는 성차별적인 구조를 다루는 동시에 자기계발 혹은 자기관리로 귀결되는 자기 돌봄의 서사를 비판했다.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으로 남겨진 ‘자기 돌봄’은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의 자장 속에 있었고, 이에 따라 ‘자기돌봄’을 다루는 페미니즘은 비판받았다: 과하게 부드럽고(too soft), 과하게 안전하며(too safe), 개인의 고통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too focused on individual suffering)는 이유에서였다(Ahmed, 2014).
한편으로 나는 팬데믹과 함께 돌봄을 난잡하게 만들자(promiscuous caring)는 다양한 선언들[2]에 동의하면서도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잡한 돌봄에서 자꾸만 내가, 주변의 친구들이, 운동들이 미끄러지는 것을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끄러짐 속에서 우리는 결국 상대를, 그리고 돌이켜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아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난잡한 돌봄’의 면면을 상상해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를 지켜보며, 나는 어른이 되면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고”(기사 보기) 다짐했던 연혜원의 설명처럼, 돌봄이 시장과 가족의 희생만으로 설명되는 사회 속에서 돌봄에 대한 상상력은 시장과 가족 밖에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누적되어 있지 않았다. 돌봄사회에 대한 한정된 상상력과 내 삶 주변에서의 실패한 돌봄들은 엉기고설켜 결국 ‘난잡하다’는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돌봄에 대한 단어만을 남겨놓고 말았다.
[2]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더케어콜렉티브, 2021)에서 주장하듯 난잡한 돌봄은 실험적이고 확장적으로 차별 없이 돌봄을 배가하는 것이자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가는 윤리 원칙”을 의미한다.
# 난잡한 돌봄: 실패할 권리
“물론 이 시간들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말을 우리가 배신하는 시간들 역시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가장 아름답고 튼튼하게 건설했다고 생각한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기도 했다. 나도 청소년이었지만, 청소년과 함께 활동하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위티 내에서 기존에 청소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는, 이들이 일상 속에서 권한과 책임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현실 속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은 ‘부여’라는 일방적 관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같이 단체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청소년을 어디까지 존중하며 함께 활동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미성숙함이 싫었고, 그걸 존중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유경)
돌봄에 대한 실패는 결국 자신에 대한 혐오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것과도 뗄 수 없다. “상대의 미성숙함이 싫었고, 그걸 존중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던 유경의 이야기는 결국 상호돌봄이 어려웠던 구조에서 유경이 어떤 영향을 받아왔는지를,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곁을 살피게 되는 돌봄의 끈적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내 보인다. 페미니스트 정동이론가 아메드는 개인을 파편적으로 나눌 수 없음을 밝히며, 다른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몸을 지탱할 팔, 발, 손, 수족이 된다”(2014)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돌봄의 실패는 어떤 순간으로서의 실패라기보다는 그 이후의 상호의존적인 돌봄을 추동하는,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자기돌봄이 퀴어-페미니스트와 반인종주의 활동에서 정치적 전투이며, 매일매일의 고통스러운 자기돌봄과 상호돌봄을 통해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해온 이유다. 아메드(2014)는 도리어 페미니스트, 퀴어-페미니스트와 반인종주의 활동이 다루는 감정, 상처와 애도를 신자유주의적 해석만으로 단편화한 것을 비판하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들리지 않는 실패의 이야기를 조립해나가는 것은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말하기가 구조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단편적인 해석을 부숴온 궤적과도 맞닿아있다. 단순하게도, 변화가 필요한 구조에 맞서 싸우는 투쟁 속에서도 우리는 일상을, 삶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you have to manage; to cope)(Ahmed, 2014).
이 글에서는 위티를 예시로 돌봄의 난잡함, 자기돌봄에 가까워질 수 없는 상호돌봄의 시도들, 상호돌봄 속에서 소진되어가는 고통들, 그럼에도 서로를 곁에 두고자 했던 페미니즘 리부트에서의 돌봄 역사를 다루고자 했다. 서로가 존재함에 기대어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돌봄들의 작고 큰 실패들은 단순히 문화페미니즘에 의한 잠식(에콜스, 2017), 신자유주의적인 자기돌봄서사의 실현, 백래시에 의한 운동의 지속불가능성과 같은 한 가지 요소만으로 설명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서로의 몸에 얽히고설킨 사랑, 끔찍함, 우정, 소진, 기대, 혐오 등의 정동의 자장 속에 있었던 돌봄의 풀리지 않는 이야기들에 가깝다. 즉 정치적 의제로서의 돌봄과 돌봄 속에서의 끈적한 정동이 분리될 수 없을 때 그 속에서 오는 균열과 고통의 문제다. 몸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맞서 돌봄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만드는 것을 장애여성운동에서는 ‘실패할 수 있는 권리’로 일컬어왔다(기사 보기). 독립적인 삶은 결국 의존과 돌봄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며, 어떤 시기에 도달하거나 완성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돌봄이 서로를 구원하게 하는 활동의 방식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돌봄을 ‘실패할 권리’ 속에서 정의할 수 있다면 어떨까? 돌봄의 성공이라는 도달 지점이 없다면, 실패의 기록들이야말로 결국 분리될 수 없는 고통과 돌봄을 복잡한 그대로, 과정으로서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 그냥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달려와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참 고맙고 기적같은 일이다. 😇 그런데 사실 사랑하면서도 이 돌봄공동체의 기억을 좋았다라고 이야기… 못할 것 같아 🐊🐊 힘들었고 우리 각자가 진짜 최선을 다해서 버티고 살아남아서 서로를 구한 것 같아.🐊🐊🐊” (페미당당 아카이브 워크샵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역사> 6. 돌봄 공동체)
또, 실패한 돌봄의 고통들 속에서도 많은 활동들이 서로를 끝까지 부여잡는 돌봄의 방식들을 시도해왔던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페미당당 아카이브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 역사>(글 보기)에서는 자살시도, 정신병원 방문, 탈가정 등의 상황에서 서로의 곁에 있었던 활동가들을 호명한다. 취약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주변에게 용기를 내어 구조요청을 했던 것, 응석 부리기에 너그러워진 것, 단절되지 않고 상처를 주고 받는 데 용기를 낸 것과 같이 일상과 활동의 전반을 함께했던 돌봄 공동체의 따뜻함-불가능성-모순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중한 서로의 존재로 인해 삶과 활동을 다시 상상할 수 있지만, 동시에 지치고, 낭만화할 수 없고, 상처받았음이 분명한 돌봄의 기록들은 취약한 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이 필연적으로 서로의 몸과 끈끈하게 맞붙어있었을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이연숙(2022)이 쓴 “「퀴어-페미니스트의 ‘돌봄’ 실천 가이드」를 위한 예비적 연구”에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살아 있는 우리는 남아서 침대에 누워 그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들을 우리의 소중한 유산으로 삼을 것이다. 그들이 아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겨우 이런 것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겨우 이런 것들만이 가능”했던 돌봄의 기록들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그 돌봄의 기억들이 남기는 소중한 유산들이 있다. 산산조각난, 취약한 돌봄의 기억들이 실패할 권리들이 된다면, 그 속에서도 상상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돌봄의 면면이 있다면, 우리의 실패는 우리가 우리에게 남기는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게 누굴 미워하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많이 미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미움들에 매몰되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내가 배운 페미니즘은 미움을 확장했지만, 동시에 사랑과 돌봄 역시 확장했다. 내 곁에 있는 가난하고 어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특히 청소년 운동을 하며 내가 운 좋게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청소년 친구들(사전적 의미의 진짜 ‘친구’다)을 만났는지 알면, 어떤 사람이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상대조차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청소년 혐오자들은 배가 좀 아플 거다.” (유경)
참고 문헌
- 김영옥, 류은숙(2024). 『돌봄의 상상력』. 코난북스.
- 백영경(2020).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창작과비평』48(3), 36-48쪽.
- 이연숙(2022). “[퀴어-페미니스트의 ‘돌봄’실천 가이드]를 위한 예비적 연구.” 『문학동네』 29(2), 200-217쪽.
- 이정연 (2023). “‘안전’한 페미니즘이라는 기대의 역설: 페미니스트 ‘번아웃’.” 『한국여성학』 39(4), 1-30쪽.
- Ahmed, S. (200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시우 옮김(2023), 『감정의 문화정치』, 서울: 오월의봄.
- Ahmed, S. (2020). The promise of happiness.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 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서울: 후마니타스.
- Ahmed, S. (August 25, 2014). “Selfcare as Warfare.” Feministkilljoys blog. https://feministkilljoys.com/2014/08/25/selfcare-as-warfare/
- Berlant, L. (2011). “Cruel optimism.” In Cruel optimism. Duke University Press, 박미선, 윤조원 옮김(2024), 『잔인한 낙관』, 서울: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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