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의미를 다시 질문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하영

* 이 글은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여성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관한 문화기술지 연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를 중심으로”(2021)의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이 글의 연구 참여자의 이름은 모두 익명화되었음을 밝힌다. 

1. 들어가며

학내 성폭력 고발과 공론화를 거친 비청소년 페미니스트였던 나에게 스쿨미투 운동은 한 마디로 “대단한” 움직임이었다. 청소년기, 십 대의 내가 학교, 가정, 사회 등 다양한 공간에서 느꼈던 불편함, 차별, 억압을 더이상 견디지 않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운동은 정말 빛나 보였다. 이들은 차별을 고발하고, 공론화하는 당사자를 넘어 변화를 요구하고, 그 변화를 만들어 가는 주체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를 만났다.

스쿨미투 운동 이후에 공식 단체로 출범한 ‘위티’는 2016년부터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으로 형성해온 자원을 모으고, 스쿨미투 이후를 상상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성 청소년들이 ‘청소년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현상은 새로운 관심으로 다가왔다. 나는 여성 청소년들이 어떤 방식과 양상으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위티’에 예비 연구자이자 내부자-활동가로 현지 조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페미니즘’, ‘정치 참여’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현장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나는 예상치 못하게 내 안의 청소년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마주했다. 물론 청소년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자원은 보장되지 못하지만,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변화를 만드는 이들을 쉽게 “기특하고 대단”하다고 정의한 것은 청소년을 쉽게 타자화하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청소년들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1].

[1] 이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뒤에 올 여성”, “다음에 오는 여성”으로 호명되는 것, 즉 청소년이 동료 시민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었다.

 2020년 4월 20일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출처: 하영

학생 인권에 대한 무지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4월, 집행위원회에서 진행했던 청소년 인권 세미나가 그중 하나다. ‘학교 가기 싫은 이유’를 포스트잇에 적어서 붙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는 도화지에 그 이유가 빼곡하게 적혀 나왔다. “대자보를 붙이면 화를 내는 선생님”, “남학생들이 메갈이라고 불러서”, “다양한 가족을 배제하는 가정 교과서”, 성적에 따른 차별, 재미없는 수업, 강요된 예배, 몸에 맞지 않고 불편한 교복, 교사-학생 관계, 학생 간 관계, 학교 문화, 수업에 관한 의견 등이 다양하게 나왔다. 활동가들은 ‘학교’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정치화하고 있었고, 학교 일상에서의 젠더화된 측면 이외에도 학생 인권 침해적인 면들을 하나하나 짚어냈다. 이 시간은 내가 학교 공간을 청소년 페미니즘적으로 되돌아보지 못했음을 깨닫는 계기이자 동시에 ‘학생 인권’에 대한 언어가 스스로 충분히 형성되지 않음을 느끼게 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즉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음에도 청소년 페미니즘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연구 현장에서 활동하며 연구하던 시간은 나의 경험을 청소년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읽어내는 시간이자,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권력, 편견과 차별적인 관점을 찾아가는 궤적이었다. 또한, 나의 연구 주제였던 청소년 페미니스트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청소년 페미니즘과 ‘정치’

2015~2016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속에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의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졌다. 특히 다양한 독서 모임, 세미나 등 오프라인 모임과 트위터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은 십 대 여성 청소년들에게도 페미니즘을 일상 속에서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많은 여성 청소년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일상과 삶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과정은 스스로 고립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청소년 미성숙 담론, ‘메갈’이라는 낙인,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라고 여겨지는 교실에서 여성 청소년을 소위 ‘정치적’인 존재로 여기는 등의 상황 등이 그 이유였다. 또한, 2018년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많은 청소년이 참여했던 ‘스쿨미투 운동’은 학내 성폭력적인 문화를 비판하며 여성 청소년들을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존재로 드러내게 되었다. 이처럼 페미니즘 대중화와 함께 여성 청소년들에게 페미니즘이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등장하고, 일상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주제가 되었지만, 청소년 정치 참여에 대한 기존의 비청소년 남성 중심의 관점들은 여성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를 설명하지 못했다.

여성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만으로 또는 페미니즘 정치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영역이다. 나이에 따른 ‘청소년’의 구분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참여가 아닌 “기특한 청소년”으로 표상하며 청소년을 보호나 칭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청소년 중에서도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여성혐오, 성 보호주의 등의 억압을 학교, 가정, 거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경험한다. 더불어 학력, 나이, 말하기 방식 등 여성 청소년 내부의 차이는 여성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가 ‘여성’ 혹은 ‘청소년’만으로 분리되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3. 예비적인 존재로서 청소년

연구 참여자들은 학교, 가정 밖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실천하는 등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페미니즘 독서 모임, 영화모임 등에 가고는 한다. 그러나 청소년의 참여가 익숙하지 않은 비청소년 중심의 공간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대견하고 기특한” 청소년으로 여겨진다. 즉 청소년이 학교와 가정 밖에서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학교와 가정 밖에서 생활하는 청소년들은 더 예외적이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연구 참여자 유채는 “페미니즘 관련된 책모임이나 영화모임에 가면 늘. 그런 반응들, ‘어머, 어린 친구가 대단하고 기특하고~’” 이런 반응이 늘 따라왔다고 설명한다. 다른 연구 참여자 도올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여성주의 책을 읽고 함께 감상을 나누는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저 또한 참여자로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가 끝나자 그 모임의 참여자였던 한 중년 남성은 제게 ‘솔직히 당신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듣지 않았지만, 내게도 저렇게 열심히 책을 읽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할 수 있었다’고 답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다른 참여자들 역시 하하호호 웃으며 자기도 그랬다고 화답했습니다. 그 순간,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습니다. 열심히 하려는 현재의 제 모습이 그저 ‘젊은 날의 열정’으로, ‘당신의 과거’로 여겨지는 듯했고, 그건 마치 제 최선의 노력이 어른들 앞 한낱 재롱처럼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공간 속에서는 저는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랬던 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어딜 가든 애써 나이를 숨겨야 했던, 청소년임을 밝히는 게 부끄러웠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페미니즘만으로는 대변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1기 대표단 출마의 변- 도올 (2019년 6월) 

책모임에서 도올의 발화는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중년 남성의 발언은 도올이 “청소년임을 밝히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페미니즘만으로는 대변”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강력한 나이 위계와 ‘예비’의 것으로 취급되고 있음이 부각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회의 시각은 청소년이기에 활동가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한다. 청소년의 말하기가 비전문적인 것, 즉 “어린 애가 멋모르고 떠드는 소리”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발화, 활동 등은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져 평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숙’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려워지는 상황은 연구 참여자들에게 ‘딜레마’로 남는다.

4. 거리로 나온 청소년 페미니스트

“학교에서 여학생으로 산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아시나요? 매일같이 성, 소수자 혐오를 기반으로 한 욕설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양성평등’, ‘이성애 중심적’ 교육을 받고, 정숙하고 순수해야 하지만 동시에 교복을 비롯한 여학생의 일상을 섹슈얼적 메타포로 사용하며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요구받습니다. 자칭 ‘늑대’라는 남학생들은 공공연히 교실에서 어제 본 국산 야동에 대한 농담을 나누고, 같은 반 여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곤 합니다. 학교뿐만일까요? 사회에서의 여성 청소년은 더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지하철의 취객들은 꼭 옆에 앉은 성인 남성이 아닌 내게 시비를 걸고, 정당한 것을 요구하는 집회에 나가도 어른들은 내게 학생이 기특하다거나, 시간이 늦었으니 빨리 들어가라며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인 듯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모두 이런 일들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할 여학생들일 것입니다.”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도올 발언문 (2018년 11월)

도올이 경험했던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는 욕설,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양성’평등 중심의 교육, 불법 촬영물, 일상적인 외모 평가 등에서 온다. 도올에게 이러한 혐오를 마주하는 일은 일상적이다. 이처럼 도올이 여학생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차별과 억압은 일상적이고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학교라는 공간의 특수성,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 남성 중심적 섹슈얼리티, 청소년 보호주의가 작동하는 환경에서 느낀 차별과 억압을 집단으로 상연(enact)하고 그에 맞서 변화를 요구한 움직임 중 하나가 스쿨미투 운동이었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인 의제들에 연대하는 주체로 거리와 집회에 나서며, 관련된 의제로 직접 시위의 장을 만들어간다[2]. 대표적으로 스쿨미투 운동은 용화여고의 #METOO #WITHYOU 포스트잇으로 시작되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스쿨미투는 성차별적인 학교 문화와 더불어 성별의 권력과 위계에 따라 은폐되어온 학교 내 성폭력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일상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정치적 의제로 확장했다. 당사자를 넘어 변화를 만들어가며, 비청소년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정치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2] 한편, 거리에 존재하는 청소년에 대한 이중적 시각은 늘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2008년 등장했던 ‘촛불소녀’라는 마스코트는 거리에 나온 청소년들에 대한 ‘기특함과 안쓰러움’의 감정을 강화했다. ‘촛불소녀’라는 이미지는 거리에 나온 청소년들을 어리고 약한 보호의 대상으로 치환하며, ‘지켜주고 싶’은 존재로 바꾼다. ‘촛불소녀’는 대규모 촛불집회의 시작이 되었지만, 성인(비청소년)들의 집회를 활성화하는 이미지 아이콘으로서 소비되었다(뽕브라, 2018)(원문 보기).

(그림) 단의 ‘나의 페미니즘 연대기’(2020년 8월)

연구 참여자 단은 스쿨미투 집회에서 스태프 역할을 하며 스쿨미투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촛불집회 같은 곳에 갔지만 “진짜 마음이 동해서 간 집회는 스쿨미투 집회가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학교 다니면서는 하고 싶은 말을 많이 못 하고 살았던 것”, “화나는 게 있어도 참아야 하는 것”들을 거리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들은 집회라는 시공간에서 중요한 이야기, 정치적인 의제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촛불소녀’ 등의 기표와 같이 능동성보다 수동성이 강조되는 이미지를 탈피해 스쿨미투 운동은 여성 청소년들이 거리에 등장하게 했다. 아동‧청소년 관련 다른 집회들이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처럼 아동‧청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표상할 때와 다르게, 스쿨미투 집회는 그 자체로 “들러리”가 아닌 주체로서 청소년의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거리에의 출현은 명목상으로만 아동‧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는 관점(tokenism)에서 벗어나 “아동‧청소년의 목소리가 영향력과 비중을 차지하게” (Lundy, 2007) 했다.

5. ‘정치’의 의미 질문하기

사회에서 ‘정치’라고 여겨지는 것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사는 현재, 삶을 바꿀 이야기가 아니다. 이처럼 현재의 정치적인 관심을 미래에 유예할 것이 당연시되는 현실은 청소년이 “나에게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라고 생각하게 한다. ‘위티’의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현재의 정치 구조에 대한 성찰과 청소년의 삶에 대한 돌아봄 없이는 정치에 관한 이미지가 어렵고 거대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비청소년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청소년이 ‘무정치적’일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정치는 청소년의 일상과 떨어져 있어 보인다. 그러나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예컨대 갈등이나 토론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학교, 착한 딸로 살아야 하는 가정, 순결하면서도 섹시한 소녀상을 강요받는 삶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언어화하고 정치화하는 과정은 여성 청소년들이 느끼는 차별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제임을 인식하게 한다. 이처럼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비청소년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정치’의 개념에 질문하고, ‘청소년의 정치’를 페미니즘적으로 확장한다.

여성 청소년이 피해자, 모범생, 변화의 주체가 아닌 당사자, 순결하면서도 섹시한 소녀[3]로 요구받는 현실에서 이들의 변화를 위한 목소리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성 청소년이 부여받는 역할과 소녀상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정치적인 문제이며, 여성 청소년이 존재하고 출현하는 공간들은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이다. 이미 여성 청소년들이 ‘미래의 시민’ 혹은 ‘예비 시민’이 아닌 현재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으로서 세계 속에서 지식을 만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여성 청소년이 재현되는 방식의 한계와 이로 인한 역할의 고착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논문 5장의 1절 일독을 권유한다.


참고문헌

  • 호야 외(2018). 『걸페미니즘: 청소년 인권 X 여성주의』. 서울: 교육공동체벗.
  • Lundy, L. (2007). “‘Voice’ is not enough: conceptualising Article 12 of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British educational research journal, 33(6), pp.92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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