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은 언제 어디서나 백래시인가? (2)

🐹 젊은쥐

1. 베일을 묘사하는 강력하고 단선적인 목소리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여성들은 혁명의 주체로 참여했고, 베일을 착용하여 반외세·반독재와 같은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다시금 여성들은 민족 정치 담론의 활발한 생산자가 아니라, 그저 협력자 혹은 보조자의 역할로 위치 지어졌다. 이란 혁명 후 세워진 이슬람 정권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젠더 위계를 강조하며, 규율 위반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통해 현재까지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혁명 당시 국민들이 가졌던 반서구에 대한 열망은 여성의 ‘전통적’ 의복을 강조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그리하여 1979년 이래로 이란의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베일을 벗는 행위는 이슬람 정권에 대한 모욕, 더 나아가 정교일치 국가에 대한 반발로 간주된다.

이슬람 혁명을 통해 설립된 이란의 정권은 서구와의 끊임없는 대비를 통해 그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에서 ‘베일 벗기’는 이슬람 정부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마찬가지로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의미화되어 왔다.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Ayatollah Ali Khamenei)는 이란 여성활동가들의 베일 벗기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히잡(베일)은 여성들이 일탈적인 생활 양식으로 가는 길을 잘 막아준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지키면서도 세상을 향해 독립심을 주장할 수 있다.” 이란의 지도자에게 히잡은 서구 여성의 ‘정숙하지 않음’과 대비되는 이슬람 여성의 ‘정숙함(modesty)’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민족주의와 결합된 가부장적 남성성은 히잡을 통해 반외세를 외쳤던 여성들의 실천적 맥락을 일방적으로 왜곡해 버렸고, 혁명 이후 히잡은 정권 강화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사진 1 –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 中

한편 혁명 이후 이란을 떠나온 많은 여성들이 이란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어렸을 때 근대 교육을 받았고, 혁명 이후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유럽과 미국 등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중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Shirin Ebadi)는 이란 정부의 인권 탄압을 오랫동안 비판해 왔다. 예술가 시린 네샤트(Shirin Neshat)는 차도르를 쓴 여성의 모습을 통해 굉장히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 속 이란 여성의 몸에 새겨진 쿠란 구절과 손에 쥐어진 총은 종교와 폭력, 종교와 권력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는 이란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맞이해야 했던 한 소녀의 고뇌를 담은 작품으로, 이란혁명 이후 시민들의 달라진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 호평을 받았다.

그 밖에 학계의 이란 출신 페미니스트 학자들 역시 눈에 띈다. 캐나다에서 활동중인 하이다 모기시(Haideh Moghissi)는 이슬람 정권 하에서 ‘양성평등’은 절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슬람과 페미니즘’의 공생 가능성을 부정했다(모기시, 1999). 이렇게 이란에서 서구로 이동한 페미니스트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란 정권의 문제점을 짚었다. 서구에서 활동하는 이란 출신 페미니스트들이 유독 ‘세속주의적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란 정권이 엄격한 성별분리와 여성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정당화하는 데 (세속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종교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사진 2 – “Women of Allah” (photo by. Shirin Neshat)

앞서 언급한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의 책은 한국에서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2007)』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는 Iran awakening: a memoir of revolution and hope(깨어나는 이란: 혁명과 희망의 기억)으로, 한국에서 번역된 제목과는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에바디는 미약하게나마 이슬람 혁명 당시 시민들과 함께 독재 정권을 비판했던 지식인이었지만, 새로 생겨난 이란 정부는 판사였던 그녀를 법정에서 내쳤다. 그녀가 여성에게 불리한 가족법을 개정하려 했고, 여성인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 지식인을 탄압하는 정부에게 대항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바디의 책이 번역되면서, 지식인이자 여성활동가로서 살았던 그녀의 일생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단어는 바로 ‘히잡’이었다. 이란 혁명이라는 맥락에서 복잡한 의미를 갖던 히잡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반평화와 반여성주의의 상징으로 전락해버렸다. 이와 같은 번역 과정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에서 ‘히잡’이라는 단어가 여성인권과 평화에 반하는 상징으로서 불특정 다수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란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와 이에 대항하는 여성들’이라는 구도가 이란에 대한 주요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시린 네샤트의 작품과 영화 <페르세폴리스>에서 베일은 중심적인 메타포로 작동한다. 네샤트의 미술 작품에서 히잡은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는 종교의 상징으로 재현되며, <페르세폴리스>에서 히잡은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와 동일시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주인공이 머리카락을 보이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저항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네샤트를 비롯한 이란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잘 알려진 편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형성된 베일의 이미지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2. 서구를 경유하여 전달되는 베일 담론

베일을 억압자-피억압자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것, 그러한 베일을 벗겨야만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상상은 서구에서 ‘제3세계 여성’에 관한 담론을 구성해왔다. 이란 여성들의 실천이 ‘베일 벗기’ 너머로 상상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슬림 여성이 역사적으로 정체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일은 ‘무슬림 여성’이라는 어떤 단일한 범주를 설정할 때 하나의 판타지로 작동한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 베일에 대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무슬림 국가와 오랫동안 식민-피식민 관계를 맺으며 지속되어 온 관념 중 하나였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특정 이슬람 단체들이 가시화되고, 서구 국가에서 벌어진 일련의 테러 사건으로 인해 ‘무슬림’들은 더이상 저 먼 곳의 타자가 아닌 ‘서구 문명을 위협하는 실체’로 등장했다. 서구인들에게 베일은 무슬림 ‘형제’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매’들에게 강제하는 억압에 다름 아니었다. 이로써 18세기 제국주의 담론에서 큰 정당성을 부여했던 문명 담론, 즉 문명화되지 않은 무슬림 남성들이 무슬림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담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베일을 향한 이러한 시각은 자국에 거주하는 무슬림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2004년, 프랑스에서 제정된 일명 ‘히잡금지법’이 대표적이다. ‘히잡금지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특유의 강력한 세속주의의 가치와 역사가 언급되었고,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 가치가 지켜지기 위해 종교실천에 있어서도 엄격한 공-사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은밀하게’,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대중을 설득한 것은 ‘젠더 평등’ 담론이었다. ‘소녀’들의 히잡을 벗김으로서 무슬림 소녀들이 (프랑스 소녀들처럼) 성평등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이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했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일련의 히잡 사건[2]은 프랑스 공화국의 존립 위기를 논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2] 1989년 프랑스에서 첫 히잡사건이 발생했다. 세 명의 여학생이 베일 벗기를 거부했고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리오넬 죠스팽이 직접 나서 사건을 주재하였다. 죠스팽은 종교적 상징물(베일)이 프랑스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고 보아 베일을 쓰고자 하는 학생은 교사와의 타협을 통해 쓸 수 있음을 명시했다. 그러나 1990년, 1994년 동일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정학 또는 퇴학당하는 비율이 늘어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994년부터 2004년 히잡금지법  전까지 약 100여명의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정학 또는 퇴학을 명시받았다. 2004년 제정된 ‘공립학교 내 종교적 상징물 착용 금지법’은 법 대상을 ‘눈에띄는’ 종교적 상징물에 한정하긴 했지만, 실제로 이 법에 영향을 받는 학생들은 무슬림이라는 점과 ‘눈에띄는’ 종교적 상징물이 암묵적으로 히잡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이 법은 ‘히잡금지법’으로도 불린다.

트럼프 정권 하에서 미국의 무슬림들 역시 또다른 생존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으니 너는 미국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는 최대한 자신의 ‘무슬림성(muslimness)’을 감추려는 현상이 타나기 시작했다. 이슬람 혐오자에게 베일은 가장 쉽게 포착되는 무슬림의 상징이기 때문에, 무슬림 여성들은 집밖에선 베일을 아예 쓰지 않거나 밝은 색으로 바꿔 쓰고 있다. 위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는 무슬림들의 위태로운 성원권을 보여준다. 타인과 국가의 인정으로 작동되는 도덕적 공동체에서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은 공동체 안과 밖을 경계짓는 상징 중 하나로 작동한다. 서구에서 보편적 시민권/성원권은 오직 무슬림성을 드러내지 않는 한에서만 부여된다.

사진 3 – ”베일을 금지하는 것인가, 이슬람을 금지하는 것인가”, 프랑스는 2004년에 공립학교 내 종교적 상징물 착용 금지법(히잡금지법)을, 2010년에는 전신베일금지법을 제정했다. (사진출처)

그러나 베일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며, 오로지 베일을 쓰지 않는 여성과의 대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기 ‘백인 남성’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을 따라 도덕성과 ‘여성성’을 갖춘 백인 여성을 찬양하면서도, 백인 여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이국성(foreignness)’을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에서 찾고자 했다. 백인남성에게 베일은 금지된 섹슈얼리티이자 ‘이슬람 세계의 후진성’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는 백인남성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였다.

“문명화되지 않은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 베일은 그러한 억압의 상징이다.”, “베일을 벗겨야 피식민지인이 문화적 정체성을 빨리 버리고 식민모국에 동화될 수 있다.”라는 식민 담론은 많은 이들에게 공유된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식민 담론은 서구 페미니즘 내에서 세속주의의 이름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듯하다. 무슬림 여성은 (종교,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는’ 서구 여성의 타자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 여성은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며, 무슬림 여성 한 명 한 명의 개별성과 특수성, 역사는 쉽게 무시된다.

베일을 쓰는 행위 자체를 백래시로 규정하는 것은 여성인권을 단지 진보/후퇴 이분법으로 단정짓는 것이다. 이는 팔루디의 백래시 개념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계이기도 하다. 팔루디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보수화된 미국 사회가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해 여성들에게 가정의 영역과 고정된 성역할을 강조하는 모습을 두고 이를 백래시라 칭했다. 하지만 팔루디의 연구 역시 특정 시기 미국의 상황을 연구한 것으로서, 여기서 도출된 백래시의 공식을 다른 모든 경우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정 시기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모든 시대와 사회에 적용한다면, 이는 왜곡된 해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헤게모니로 자리잡은 자유와 해방의 개념을 비서구 세계의 모든 여성들에게 적용한다면, 백래시 역시 단편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79년 이란 혁명 때 여성들은 베일을 씀으로써 자본의 힘으로 작동하는 신식민화와 제국화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2019년 현재,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거주하는 무슬림 이민자 3세대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평등한 성원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에 대항해 베일을 씀으로써 서구가 주장하는 세속주의적 보편성을 거부하고 무슬림 여성으로서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의 여성운동가들은 이란 정부의 여성억압적인 정책에 대항하여 ‘히잡 밟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9년도라는 동일한 시간의 좌표 위에 한쪽에선 베일을 벗는 저항을, 한쪽에선 베일을 쓰는 저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일 쓰기에 연루된 다양한 실천을 구체적인 결을 따라 읽어내야만 한다.

3. 보편주의와 ‘관용’을 넘어서

한국에서 베일이 여성억압과 등치되고 여성의 긴 머리가 ‘단백질 히잡’이라는 기표를 획득한 과정에는 ‘긴 머리’와 ‘히잡’이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요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해방서사의 탈을 쓴 ‘베일 벗기기’는 서구 여성이 보편이라는 기준에 무슬림 여성을 끼워맞추는 ‘보편주의’의 함정을 드러낸다. 또한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 사회 계급이나 민족정체성으로 생겨나는 차이 자체를 무력화해버린다.

반면, 전술한 권력의 메커니즘과 풍부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베일 쓰기를 지지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하이다 모기시는 서구의 몇몇 지식인들이 서구의 이슬람포비아와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를 지나치게 인식한 나머지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거나 베일 착용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슬람 사회의 베일을 둘러싼 각종 문제들에 대해 해당 문화권 바깥의 비당사자들이 함부로 판단하거나 의견을 낼 수 없으며, 그저 그것을 문화적 독특성으로 간주하고 차이를 관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베일이 여성혐오와 납작하게 등치되어 하나의 기표로 사용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과연 그러한 관용의 자세가 최선일까? 페미니스트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관용’이 그것을 베푸는 자의 안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발휘되는 제한적인 개념이라 비판한 바 있고, 하이다 모기시는 모든 문화가 인정되고 관용되어야 한다는 극단화된 문화 상대주의 때문에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의 상태를 영속시킨다고 주장했다.

결국 ‘관용’은 다른 문화권에서 일어나는 ‘성가신 문제’에 대해 눈감을 수 있는 편리한 개념적 도구일 수는 있어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이는 베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작동하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다. 실천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비판의 화살을 곤두세우되, ‘관용’이라는 태도에 내재한 권력, 즉 관용의 주체인 ‘문명’과 관용의 대상이 되는 ‘야만’을 설정하는 문제 또한 담론화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무슬림 정체성을 고정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이란과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사례를 넘어, 어떤 권력에 대해서든 전 세계의 페미니스트들 모두가 함께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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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cott, Joan(2010). The Politics of the Veil,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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