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은 언제 어디서나 백래시인가? (1)

🐹 젊은쥐

TV 드라마는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는 직장 여성보다는 직장에서 지쳐 돌아와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어머니를 그린다. 디자이너들은 직장 여성들이 즐겨 입던 정장 대신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을 본뜬 드레스를 선보인다. 언론은 직장에서의 힘겨움을 성토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달한다. 이는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더 많이 진출하고, 성평등, 성해방 담론이 확산되는 것에 위기를 느낀 주류언론과 문화산업은 여러 전략을 동원해 교묘하게 페미니즘의 성과들을 깎아내렸다. 여기에는 여성이 가정에 충실하길 바라는 남성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었다.

팔루디의 『백래시』는 1980년대 미국이라는 시공간적 무대를 분석한 글이지만, 한국에서 또한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요 몇 년 사이 일어난 페미니즘 붐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격렬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 몇몇은 백래시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백래시에 대한 담론은 책이 의도한 질문들, 즉 ‘백래시가 형성되는 맥락은 무엇인가, 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권력들이 작동하는가’보다, ‘무엇을 백래시의 징후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백래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즉, 많은 사람들이 백래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관찰하기보다 개인의 차원에서 ‘백래셔’를 색출하는 데 힘쓰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백래시 담론 중에서 ‘단백질 히잡’이라는 용어가 눈에 띈다. 이 용어는 여성성의 주요한 문화적 기표로 해석되는 긴 머리를 지칭하기 위해 탈코르셋 운동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담론에서 히잡은 여성에게 종교적 사회적 억압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히잡-긴 머리의 대구(對句)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히잡, 긴 머리 모두 하나의 강력한 젠더규범으로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경우 사회의 비난이 따라오며, 두번째로 이 억압기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페미니즘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더욱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다가 히잡을 착용한 여성의 모습은 실패한 페미니즘, 과거로 회귀한 페미니즘으로 비춰졌다.

사실 한국에서 베일에 대한 시각은 서구의 베일 담론을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서구는 무슬림 국가가 많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와의 오랜 식민-피식민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에 특히 큰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던 중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 이후, 베일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렸다. ‘자유롭게’ 화장을 하고 노출을 하던 여성들이 혁명 직후 온 몸을 가리는 베일을 쓰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혁명의 구체적인 맥락은 삭제된 채 유통되었고, 오늘날 베일은 ‘자유로운’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단순하게 의미화되어버렸다. 그리고 한국에서 통용되는 베일의 이미지는 서구가 만든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 1 – 이란혁명 전후 이란 여성의 모습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사진/ (사진출처)

이처럼 베일은 극단적인 이미지 속에 갇혀버렸고, 우리는 이슬람 혁명 당시 여성들이 베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민족적 차원의 다양한 욕망과 실천의 맥락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은 그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베일 쓰기의 실천적 층위다. 베일 쓰기의 저변에는 무슬림 남성이 만들어낸 종교적 질서와 가부장적 욕망만이 존재하진 않는다. 무슬림 여성들은 그 질서와 욕망에 순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정치적·민족적 의사를 드러내기 위해서 베일을 써 왔다.

두 번째는 베일 쓰기의 역사적 층위다. 특정한 측면에서 볼 때, 베일은 여성 신체의 통제를 통해 여성의 권리를 강력하게 제한하고자 하는 권력이 개입된 백래시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베일 쓰기를 백래시로 만드는 것은 베일을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역사적인 조건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맥락을 건너뛰고 베일을 백래시의 상징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베일에 대한 몰역사적인 오독과 다름없다. 이러한 틀 안에서 베일을 벗고 쓰는 행동은 단순히 여권의 진보/퇴보를 가르는 단순한 기준으로 환원될 뿐이다. 그러나 본 글은 이란 혁명 시기에 집중해 반외세, 반자본을 주창한 민족주의자 여성들이 베일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고, 베일을 도구로 차용한 그들의 행위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1. 1979년, 베일이 백래시의 상징이 되다

‘이슬람 혁명’으로도 불리는 1979년 이란혁명은 하루아침에 찾아온 쿠데타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이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당시 정권이었던 팔레비 왕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25년부터 통치를 시작한 팔레비 왕조는 이웃나라 터키가 그러했듯 이란을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레자 팔레비 왕은 이란의 근대화를 위한 6개 조항을 발표했고, 이를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이라 명명했다. 이 혁명은 토지개혁, 노동개혁 등을 아우르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가족법을 개정하는 등 여성의 시민적 권리에 주목한 부분이다. 특히 정부는 이란 여성들로 하여금 베일을 벗고 ‘세속적 복장’을 착용하도록 강조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의 뒤편에는 중동의 공산주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이란을 적극 지원했던 미국과 영국이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팔레비 왕조는 중동에서 ‘미국의 헌병’으로 불리며 충실히 근대화 정책을 수행해갔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은 팔레비 왕조의 개혁이 정말로 국민들을 위한 것인지 의심했다. 특히 이란과 합작한 영국의 원유 회사가 전세계를 무대로 이란의 원유를 독점판매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국자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시위에 참가한 수백만명의 시민들은 강압적인 탑다운(top-down) 식의 근대화에 반대하며 이슬람혁명을 외쳤다.

팔레비 왕조의 일방적인 근대화는 반외세 여론을 야기했고, 이 여론은 서구가 점차 이란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울 정신적 지주로 당시 성직자였던 호메이니를 호명했다. 그리고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의 멸망을 목표로 두는 동시에 ‘손상’과 ‘회복’에 집중했다. “이란의 이슬람 전통은 서구의 세속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혁명을 통해 다시 이슬람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호메이니가 외세의 자본과 세속화의 검은 유혹을 뿌리치고 이란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방식이었다. 이란의 국민들은 호메이니의 사상에 많은 환호를 보냈다.

종교는 이란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비 왕조는 무리하게 서구를 따라하는 근대화 전략의 일종으로 세속화를 진행했다. 서구화가 곧 세속화로 등치되면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전근대의 상징이 되었다. 90%가 넘는 국민이 무슬림이었음에도 말이다. 더욱이 무리한 근대화는 점점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를 낳았고, 도시로 건너온 이들은 일을 구하지 못해 빈민가를 이루며 살았다. 정부는 이슬람을 탄압했지만, 국민들은 종교를 믿으며 위안을 얻었다. 이는 왜 종교지도자들 외에도 수많은 이란의 시민들이 이슬람 혁명과 반(反)근대화 운동을 지지했는지 설명해준다.

사진 2 – 이란혁명 당시 시위 맨 앞에서 베일을 쓴 여성들의 모습/ (사진출처)

특히 이란 내 반정부 운동의 주체 세력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층이었다. 그리고 시위의 맨 앞에는 베일을 쓴 여성이 있었다. 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자주적인 이란을 외치기 위해 팔레비 왕조가 금지했던 ‘야만’의 상징인 베일을 착용했다. <사진1>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란 여성들 사이의 차이이다. 팔레비 왕조의 세속화 정책에 따라 많은 여성들이 베일을 벗고 ‘근대적’ 복장을 착용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정부는 이 보여주기식 정책을 위해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을 강제로 벗겨야 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세속적’ 패션은 근대적인 것으로, 히잡과 차도르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낙후된 이슬람’ 대 ‘진보된 서구’라는 이분법은 서구의 혜택을 받은 부유한 소수의 국민과 그 자본에 닿을 수 없었던 대다수의 대중이라는 또다른 이분법 위에서 가능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란의 중산층 여성들은 베일을 쓴 노동계급 자매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베일을 쓰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직후 이라크 전쟁과 미국과의 악화된 관계 속에서 사회적 분위기는 점점 경직되어갔고, 경건한 이슬람 사회를 꿈꾼 이들의 열망은 여성 통제로 이어졌다. 가족보호법이 재등장했고,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길은 막혔으며, 베일을 쓰지 않고는 공공장소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혼이 가능한 나이가 무려 9살로 낮춰졌으며(이는 이후 상향조정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학교를 갈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 역시 어마어마했다.

사진 3 – 히잡강제착용에 반대하는 이란 여성들/ (사진출처)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1979년, 국제여성의 날을 맞아 십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 모여 정부의 강압적인 히잡 통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들 사이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복장’의 형태에 대해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1979년 당시 어떤 여성에게 베일은 정치적 목소리의 통로였지만, 어떤 여성에게는 억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 베일 쓰기/벗기의 정치성

혁명으로부터 40년이 흐른 2019년 현재, 이란 여성들의 베일 벗기 캠페인은 강력한 여성주의적 함의를 갖고 진행되고 있다. 이란 당국은 베일 벗기를 곧 정부에 대한 반동으로 여겨 2018년에만 구속한 여성이 29명에 이른다. 히잡 반대 시위에 참가한 여성을 변호한 인권변호사는 징역 38년형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이란의 폐쇄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신성한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해 왜 여성을 통제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혁명 당시 자발적으로 베일을 쓰며 반외세 반독재를 외쳤던 여성들의 주체성을 동시에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강압적인 현 이란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동원되는 ‘베일’은 그 말을 둘러싼 수많은 역사적 맥락이 삭제된 채 남용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무엇에 대항하여 베일을 쓰거나 벗고 있는지이다. 이란 여성은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에 강력한 자본의 힘으로 본국을 식민화하고자 하는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 베일을 썼으며, 상상된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상적인 여성상을 강요하는 국가에 반기를 들기 위해 베일을 벗었다.

서구에서 무슬림 ‘여성’은 단일하게 상정되어 왔고, 그렇기에 서구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베일을 벗고자 하는 여성들과 쉽게 공명할 수 있었다. 이란 여성들이 베일을 쓰고/벗고자 하는 의지에는 서구권에서 상상하기 힘든 복잡한 종교적 역사적 맥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복잡함은 아주 손쉽게 ‘문명의 충돌’ 구도 안에 밀어넣어지며, 베일은 서구문명의 가치들이 좋음/선(善)을 획득할 수 있도록 이용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베일 자체가 여성의 인권 향상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로 사용된다면, 혁명 이전 이란 여성들의 베일을 벗김으로써 근대화를 이루려했던 이란 정부의 의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모한티(Chandra T. Mohanty)가 이란혁명에 대해 밝히듯, 베일을 쓰는 것에 접합된 구체적 의미는 역사적 맥락 하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혁명 시기 무슬림 여성이 팔레비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저항과 시위의 상징으로 ‘쓴’ 베일과 현대 이란에서 강제적인 이슬람법에 의해 ‘씌워진’ 베일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비단 한국에서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베일을 벗는 것만이 완전한 해방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베일에 대한 탈역사화된 해석은 베일을 벗고 쓰는 것에 의미를 다르게 부여하는 현대 무슬림 여성들 사이의 불연속성과 갈등과 차이를 은폐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베일벗기가 해방 서사에 이용되는 방식을 분석하고, 서구의 일명 ‘보편주의적 가치’가 시민으로서 성원권을 가질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전세계적인 상황 속에서 베일이 저항과 전복의 의미를 담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문헌

  • 유달승(2016). “이란의 사회변동에서 종교의 역할”, 『한국중동학회논총』, 제36권 제 3호, 1-15쪽.
  • 유흥태(2008). 『이란의 역사: 이슬람의 유입에서 이슬람 혁명까지』, 서울: 살림.
  • Mohanty, Chandra T.(2003). Feminism without borders, Duke University Press, 문현아 옮김(2005), 『경계없는 페미니즘』, 서울: 여이연.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One thought on “베일은 언제 어디서나 백래시인가? (1)”

  1. 근대현대 한국 여성들의 단발에 관한 서적에 대한 블로그 리뷰에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전통문화가 금지당한 맥락을 지우고 남자들은 단발 맛보고 편하게 다니면서 여자들한텐 못하게 했다는, 남성의 이기심만을 강조한 문장을 읽고 불쾌했었습니다. 그 이유와도 통하는 글인 것 같아 남겨보아요.

    좋아요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