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과 이분화된 몸의 서사: 더 많은 몸들에 대한 상상을 위하여

🎶송유진

1.

바야흐로 탈코르셋 하는 몸의 시간들이다. ‘당신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면 ‘탈코르셋’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대학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여성운동계와 학술장 내에서 알음알음 논의되어 오던 ‘탈코’라는 키워드는 이수역 사건(사건 개요 페이지 보기)을 거쳐 점차 뉴스 기사와 칼럼 등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2018년 10월에는 BBC에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 관련 기사가 실리면서 더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기사 보기). 그러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여러 오프라인 발언 등을 통해 탈코르셋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는 한편,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운동의 방향성 등을 학술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글은 탈코르셋 운동을 둘러싼 운동계 내/외의 논쟁들의 일부를 짚어내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논의의 납작함을 문제 삼고자 한다. 탈코르셋과 꾸밈 노동이라는 이슈를 ‘진정한 페미니즘적 실천’과 ‘여성인권 후퇴시키는 반동적 백래시’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은 매우 간단하고 또 편리하지만, 실제 운동의 복잡한 지형들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운동의 서사다. 운동의 서사는 그 운동을 지켜보고 간접적으로 이에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의 생각을 구성할 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주체 스스로의 인식과 방향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2.

탈코르셋에 대한 다수의 기사와 칼럼이 이미 인지하고 있듯이(기사 보기, 기사 보기), 탈코르셋 운동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벗어던진 후 이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 공간에 소위 ‘전시’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주된 통로가 되는데, 이는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과 비교해 사진 중심적인, 그러니까 시각적 성격이 강한 플랫폼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인스타그램에 탈코르셋 관련 게시물을 검색했을 때 ‘#탈코르셋’ 해시태그는 1만 4천개, ‘#탈코르셋인증’ 해시태그는 약 400개, ‘#탈코르셋전시’ 해시태그는 260여개 게시글에 이른다(2019년 3월 20일 기준). 이 중 대부분의 게시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탈코 이후 자신의 모습을 질적인 ‘변신’을 거친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게시글 속 공들인 긴 머리에 풀메이크업, ‘여성적인’ 옷차림과 하이힐 등으로 대표되는 탈코 이전의 모습은 투블럭한 머리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넉넉한 옷, 화장기 없는 얼굴의 탈코 이후의 모습과 선명히 대비된다. 이는 다분히 운동 주체들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탈코 이전 하루 몇 시간씩 화장과 옷 고르기에 시간을 투자하며 “코르셋 조이던” 모습에서 탈코 이후 비로소 “사람” 모습으로의 변화는, 운동 주체가 “인형에서 사람으로” 이행한 결정적이고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는 주된 장은 다름 아닌 여성의 몸이다. 운동의 주체들은 몸을 운동의 최전선이자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는 여성의 몸을 종속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예컨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의 몸을 본질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즉 자궁의 소유로 인한 임신가능성을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 하에서 억압적인 지위에 처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설명했다(보부아르, 1994). 보부아르에게 있어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으로 믿어졌던 몸)은 결코 현실 속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 있어 몸은 운동의 긍정적인 시작점이기보다는 굴레이자 종속에 가까웠던 것 같다. <성의 변증법>의 시작을 “참고 견디었던 보부아르를 위하여”라는 글귀로 열었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역시 재생산 가능성으로 인하여 여성이 가정 내 종속적 위치에 처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재생산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의 몸을 기술 혁명을 통해 해방시킴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파이어스톤, 2016).

반면 탈코르셋 운동의 주체들이 스스로의 몸을 주목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고, 또 새롭다. 이들은 몸을 운동의 시작점이자 수단으로서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여성의 몸이 다양한 시선과 억압이 덧씌워져 형성된 사회구조적 결과물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 하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객체화(objectification)가 여성의 주체성을 해치고 그를 한낱 ‘몸’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과정이었다면, 탈코르셋 운동의 주체들은 이 객체화의 메커니즘을 전면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또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운동과 억압에 대한 관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압을 국가나 정부, 다수자 집단에 의해 물리적, 제도적으로 가해지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탈코르셋 운동의 주체들은 사회 문화와 관습, 시각적으로 주로 재현되는 이미지들(잘 꾸민 여성들의 이미지) 속에 깃들어있는 권력의 결을 예민하게 읽어낸다[1]. 따라서 이들에게 운동이란 광장으로 뛰어나와 시위하는 것뿐 아니라, 일상적인 실천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성립 가능한 것이 된다. 매일 자신의 탈코 착장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운동’이 되고, 운동의 ‘전시’가 되는 것이다.

[1] 전술했듯 이들이 몸을 읽어내는 방식은 파이어스톤 등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지만, 이는 명백히 제 2 물결 페미니즘의 유산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짚은 필요가 있다.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가 남성의 욕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왔다는 것(Mackinnon, 1989)은 탈코르셋 운동을 추동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이다.

이처럼 탈코르셋 운동에는 분명한 의의가 존재하며, 운동이 자리한 맥락에 근거하여 이를 정리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SNS를 통해 반복되고 있는 운동의 서사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 지점들이 있는데, 아래에서 이를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3.

이 글에서 무엇보다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운동이 전제하는 선형적인 서사다. 탈코 이전 자신의 모습은 여성성을 ‘버리지 못하고’ 허상에 불과한 ‘외모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탈코르셋 이후의 자신은 중요한 분기점을 이미 지나 온,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이는 탈코 이전과 이후의 몸들이 경험하는 일상을 인위적인 이분법에 따라 나누고, 탈코를 마치 직선적인 변화의 과정인 것처럼 그려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운동의 서사가 갖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먼저, 선형적인 서사는 운동 내에서 정통성을 따지는 논쟁으로 이어지기 쉽다. 선형성을 전제한다는 것은 운동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고방식에 기반해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방향성에서 벗어나는 운동을 ‘가짜’ 운동으로 치부하는 결과로 쉽사리 흘러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정통성에 대한 의미 없는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된 이후 무엇이 ‘진정한’ 탈코인가, A가 진정한 탈코라면 B는 탈코가 아닌가 등등의 논쟁이 진행되어 왔고, 이는 긴 머리와 화장, 하이힐, 치마 등 여성이 몸에 걸치는 모든 물건 혹은 스타일을 하나하나 따져 가면서 ‘탈코룩’과 ‘코르셋룩’을 나누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결국 탈코룩이 아닌 것은 코르셋이자 ‘백래시’로 규정되었고, 진정한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의 동력을 상실시키는 이들이자 가부장제 사회의 조력자라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2]. 이는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적수 삼아 시작된 운동이 그 내부에서 또다시 피아를 구분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운동’의 위계를 세우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여성의 외모와 꾸밈에 대한 단일한 기준을 폐지하고, 성애적 대상에 한정되지 않는 몸들의 재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탈코르셋 운동 초기의 궁극적 목표와, 현재 반복되고 있는 논쟁의 양상에는 분명 상호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이와 같이 유사한 논쟁을 지속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2] 여성혐오를 주제로 만화를 그리는 민서영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는 최근 꾸밈노동과 탈코르셋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의 논리는, 나의 그런 행동들은 나 개인의 편의를 위해 하는 일일 뿐, 탈코르셋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대체 뭐가 탈코르셋인데? 대체 뭐 얼마나 비장해야 탈코르셋이라는 이름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야?” (2019.03.19. 민서영 작가 인스타그램 게시글 중/ 접속일: 2019.03.20.)

또한 탈코르셋을 전진과 후퇴가 정해진 운동으로 상상한다면, 전진 이후, 즉 탈코르셋 이후의 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단백질 히잡’으로부터의 해방과 노메이크업을 선언한 이후, 치마와 하이힐을 모두 내다 버리고 다시는 옷에 나를 구속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의 몸은 어떤 시간대에 놓이게 되는가? SNS를 통해 재현되는 탈코르셋의 서사는 변치 않는 시간으로 박제된 ‘선언의 순간’에 집중한다. 또 선언이 끝난 뒤의 운동 주체들은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일이 없는 이들이자, 또 탈코 이후라는 단일한 시간대에 놓인 이들인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주디스 핼버스탬은 많은 사람들이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안정적인’ 젠더 정체성을 ‘고정된 땅’으로 상상하고, 트랜스섹슈얼의 과정을 이 땅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행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 속 트랜스섹슈얼들의 삶은 짧은 여행의 이미지로는 다 담아낼 수 없으며, 그 안에서 이들의 몸은 하루하루 변화하는 일상들을 경험하게 된다(핼버스탬, 2015). 이 비유는 여성의 몸에 대한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을 고정시키는 안정된 토대는 없고, 선언 이후의 일상들은 사실 단일한 시간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좋든 나쁘든 멈춰 있는 순간 혹은 시간대에 머무를 수 없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강요와 실천들 속에서 새로운 위치를 획득해 나간다. 그리고 탈코르셋 운동의 선형적인 서사는 이 다양하고 또 다층적인 몸들의 위치를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 예컨대 탈코르셋 실천을 했지만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시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시작한 여성의 경우, 그의 몸은 선형적 서사 위의 어디에 배치되어야 하는가? 또 오히려 긴 머리, 짧은 옷 등 특정한 여성성의 표식을 삭제할 것을 요청받는 중년 여성의 경우, 그의 경험은 어떤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가? 이는 여성에게 일괄적 외모 기준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억압에 의한 결과물이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기록되어야 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는 운동의 서사는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의 재현 가능성을 제한하고, 그러한 이야기 자체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바깥이란 단순히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여성들의 몸을 의미할 뿐 아니라, 탈코르셋 이후에도 매일매일 변화하는 맥락 위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입체적인 여성의 몸들 역시 의미한다. 결국 이 서사에서 최종까지 살아남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선형적 서사를 통해 미처 설명될 수 없는 몸들의 경험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거나, ‘진정한’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반동적 백래시’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탈코르셋이 약속하는 해방의 서사가 획일적인 것임을 존재 그 자체로 증명하는 경험들일 뿐이다. 납작한 서사를 통해서는 항시 변화하는 맥락 위의 우리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20대 초중반을 넘어 30대에도, 40대에도, 노년에도 계속되어야 하고 또 계속되고 있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노년의 몸이 자리하는 위치는 20대 초중반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탈코르셋 논의가 어째서 10대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즉 노화와 질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몸들에 대한 상상에만 기반해 있는가를 물으면서, 마땅히 그 모든 경험들을 포괄할 수 있는 언어와 이야기들을 개발해나가야 할 것이다.

4.

운동을 둘러싼 빈약한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나로 예단할 수 없겠지만, 이 글은 탈코셋을 불가역적인 변화로 묘사하는 이미지의 배치가 지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서사가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했다. 탈코르셋 운동을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운동의 실천이기도 하지만, 운동을 둘러싼 이미지와 서사들을 구성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의 성과와 가시적인 한계를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운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언어와 상상력에 주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여성의 몸에 부과된 단일한 기준에서 탈피하려던 노력들 중의 일부는 또다시 몸들을 두 분류로 나누는 작업으로 회귀하고 있다. 외모 억압을 거부하는 흐름들 중 한 축만이 진정한 탈코르셋이자 페미니즘적 실천으로 규정되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몸의 실천들은 그 맥락과 의의를 탈각당한다. 또 이러한 서사가 ‘비장함’의 정서를 추동한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운동을 둘러싼 긴장감은 우리의 운동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놓여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단단하게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는 비장한 요청으로 이어진다. 이는 운동 주체들이 이분법과 같이 단순하고 명확한 기준에 매달리도록 만드는 동시에, 기준 바깥의 경험들을 배제하고 밀어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탈코르셋의 서사에서 벗어나는 몸들의 실천을 그 의도와 상관없이 억압에 의한 결과물이자 백래시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이분법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분법의 언어는 강력하다. 그러나 이는 변화를 가속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동시에 다양한 몸들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결국 요청되는 것은 이분법을 넘어선 다양한 기준들과 실천들에 대한 상상일 것이다.


참고 문헌

  • De Beauvoir, Simone(1949). Le Deuxième Sexe, Paris: Gallimard, 조홍식 옮김(1994), 『제2의 성』, 서울: 을유문화사.
  • Firestone, Shulamith(1970). 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 N.Y.: William Morrow and Company, 김민예숙 · 유숙열 옮김(2016), 『성의 변증법』, 서울: 꾸리에.
  • Halberstam, Judith(1998). Female masculinit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유강은 옮김(2015), 『여성의 남성성』, 서울: 이매진.
  • MacKinnon, Catherine A.(1989). “Sexuality, pornography, and method: Pleasure under Patriarchy”, Ethics, 99(2), pp. 314-346.

댓글 9개

  1. 탈코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을 기대하며 읽었는데 탈코의 한계와 지적이 대부분인거 같아 아쉽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탈코를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는데 일부 SNS에 드러난 탈코에만 집중한 건 아닐지… 많은 탈코인들이 탈코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고민과 도전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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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탈코 지적이 아니라 실천전략 지적입니다. 운동의 취지와 의의, 운동의 실천전략방식은 별개입니다. 이 글은 탈코 한계 지적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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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어휘력이 부족해 이해를 잘 못 하신 듯 합니다. 제가 사용한 한계라는 단어는 실천전략지적에 가깝습니다. 제목을 보고 실천전략방식 글을 상상했는데 실천전략지적 글이라 아쉬웠다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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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녕하세요:-) 본 글을 쓴 사람은 아니지만 fwd의 필진 중 한명인 미현입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첫 댓글이라 더욱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글이 탈코에 대해서 한계 이후 새로운 고민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다양한 탈코르셋의 실천들이 있을 수 있는데, 소셜미디어 상의 논의들은 왜 단선적일까? 라는 고민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자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쇼쇼님께서 더욱 다양한 장면들을 보고 있으시다면 본 글이 부분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것 같은데요. 탈코르셋에 고민을 지닌 분들의 다양성과 기분좋은 상상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이 되면 좋겠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부기고도 환영이고, 글에 대한 서평글도 보내주신다면 저희가 감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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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탈코관련 웹진이 한 편으로 끝나는 줄 알고 아쉬워했는데, 새로운 글을 보니 제가 성급했습니다. 좋았다, 아쉬웠다 등의 표현이 대부분이라 서평을 쓸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좋은 글 잘 읽고 있고, 응원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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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단선적인 운동과 실천행위, 페미니즘에 대한 이분법적 가치관에 대한 매우 사려깊고 친절한 지적이자 통찰이라고 생각해요. 안 그래도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특정한 ‘행위’를 소재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괴로웠는데, 상징성을 담는 특정한 ‘행위’와 ‘문구’에 모든 의미와 비장함을 담아 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하는 강박, 그를 기준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편협함이 결국 확장적 운동과 지속가능한 실천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는… 분열을 거듭하는 진보정치나, 노동운동 등의 영역에서도 참조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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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 글을 쓴 송유진입니다. 우선 저희 웹진 기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씀해주신 표현들은 아시다시피 제 글의 핵심이 되는 것들인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의문이 남았는지 말씀해주시면 다음 기사 작성 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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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닉네임부터 딱봐도 남초커뮤에서 오셨네용 ㅎㅎ 맥락없이 꼬투리 잡지 않으면 비판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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