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SF 함께 읽기] 1회_코니 윌리스,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 & 「여왕마저도」

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아작, 2016) 표지 이미지

[페미니즘 SF 함께 읽기] : 페미니즘 SF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독서모임입니다. Fwd 필진 일부가 비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토론을 정리해 공유합니다. 격월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첫 번째 모임은 코니 윌리스(작가 소개)의 단편소설 두 편을 읽고 모였습니다. 먼저, 1985년 발표된 단편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원제: All My Darling Daughters)」는 지구와는 멀리 떨어진 한 인공 행성의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학교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태슬’이라는 애완동물이 유행합니다. ‘태슬’은 털북숭이에 몸이 길고 자그마한 연약한 생물로, 단지 몸 뒤쪽에 핑크빛 구멍이 있습니다. 남학생들은 이 짐승을 ‘우리 딸’로, 자기 자신은 ‘아빠’로 부르며 사랑하고 귀여워합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어떤 용도로 이 짐승을 쓰는지 눈치를 채고 불편해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태슬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보기 전까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단편은 1994년 하이텔 번역 모임 <멋진 신세계>에서 편집・번역한 『세계 여성 소설 걸작선』에 「섹스 또는 배설」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 소개되었고, 이후 2002년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에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었습니다. 현재 두 선집은 모두 절판된 상태입니다.

1992년 발표된 단편 「여왕마저도(원제: Even the Queen)」는 여성들이 생리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소설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의약 처치를 통해 생리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이클리스트’라고 불리는 자연주의 여성운동에 빠진 소녀가 ‘자연스럽게 생리를 하자’는 주장을 펴자 외할머니와 할머니, 엄마와 언니가 모두 난리가 납니다. 이 소녀는 생리를 실제로 접한 뒤에야 “왜 아무도 피가 날 거라는, 아플 거라는 이야기를 안 해줬느냐”라며 사이클리스트로서의 활동을 그만둡니다. 이 단편은 1993년 휴고상, 네뷸러상을 비롯해 다섯 개의 상을 휩쓸었고, 2016년 번역 출간된 코니 윌리스 걸작선 『여왕마저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 내용 요약은 한국일보 기사를 참조했습니다.)

‼️ 대담 내용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1.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

선녀 : 먼저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페미니즘 SF가 ‘아름다운’ 글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페미니즘 SF는 생각의 지평을 얼마나 넓히느냐, 도전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페미니즘 SF에는 언제나 퀴어하고, 공포를 느끼게 만들고, 전율하게 하는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특히 이 소설은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공격이라는 문제를 정말이지 섬뜩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두 : 저는 ‘태슬’의 존재가 기술적으로 멀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그 공포를 느꼈습니다. 현재 섹스토이가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요.

낑깡 : 태슬이라는 짐승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잖아요. 이빨이 없고, 저항을 하지 못하며, 신음소리가 최대의 의사표시라는 설정이요. 이런 부분에서 남학생들이 태슬의 수동적인 모습에 흥분하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상상 : 딸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완전히 그렇죠.

만두 : 맞아요, 남성들은 딸을 원하니까요. 저는 여성이 성적 욕망이나 섹슈얼리티를 표현할 때 남성의 성욕이 죽는 것처럼 표현된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브라운이 주인공 타비를 대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기능적이라는 점도 흥미로운데요, 태슬의 털이 거칠거칠하니까 촉각적인 부분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는지, 타비한테 와서 타비의 부드러운 피부만 만지다가 섹스를 제대로 끝내지 않고 가버리죠.

선녀 : 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문제시되는 관계인 ‘아빠’와 ‘딸’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모두 ‘아빠’라고 불립니다. 태슬을 가진 남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아빠’라고 지칭할 뿐만 아니라 학교 설립자 역시 여학생들에게서 ‘아버지’라고 불리죠.

찬란 : 설립자의 인터폰 내용에서 아들과 딸을 부르는 수식어가 달랐죠? 남성들에게는 “건장한 내 아들들이여”라고 한 반면에, 여성들에게는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라고 하죠.

선녀 : 저는 설립자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인공 행성에서 ‘아들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딸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립자는 옛 ‘아버지’와 같은 남자들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쁘고 착한 딸이 필요하죠. 딸들을 ‘예쁘고 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장치가 필요한데, 저는 사감실에 들어가기 전의 박스가 그 장치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어머니’가 드러나는 방식도 흥미로웠는데요, ‘사감(mother)’은 딸들을 구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박스를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찬란 : 이 소설에서 제일 섬뜩한 부분은 지벳이 태슬을 동생에게 딸려 보냈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선녀 : 맞아요. 저는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남녀의 권력관계가 이 소설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보았습니다. 딸들에게서 딸들에게로,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고리들이 이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남학생들이 태슬을 이용하는 것에 끔찍함을 느꼈던 지벳이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태슬을 동생 손에 들려 ‘아버지’에게 보낸 것에서 드러나듯이요. 조금 다른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동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동물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하다고 생각하는데, 동물을 먹는 문제를 포함해서 동물을 적합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해본 바 없죠.

미현 : 그런데 저는 이 소설이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성들의 인정욕구에 관한 것으로 느껴졌어요.

만두 :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소설에서 “남성들이 인간 여성보다 왜 태슬에 더 집착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성적 욕구와 권위 등을 총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남학생들이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격’을 필요로 한 것 아닌가 싶어요. 태슬의 기능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태슬을 통해서 ‘아버지’라는 인정을 싸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집착했던 것이 아닐까요?

찬란 : 저는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와 「여왕마저도」 두 소설에서 모권과 부권의 서로 다른 사회상이 드러난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에서는 아버지, 「여왕마저도」에서는 어머니만 등장하죠. 극단적으로 한 쪽이 드러나지 않죠.

오온 :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왕마저도」로 넘어가나요? (웃음)

2. 「여왕마저도」

오온 : 「여왕마저도」에서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들이 생리와 기술에 대해서 어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상상 : 생리를 멈추게 하려고 약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약에 따르는 부작용으로서 생리 멈춤을 우연히 발견한 것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만두 : 비아그라가 발견된 과정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따온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상상 : 그런데 저는 소설에서 생리를 긍정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비하하는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찬란 : 저는 페미니스트들을 비꼬는 방식이 오히려 속 시원했어요. 사실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를 비꼬는 모습을 보기 힘들잖아요. 여성성을 전적으로 내세우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속 시원하게 말해서 저는 좋았습니다.

오온 : 이 소설이 최근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읽히고 있어서 검색해봤더니 대부분 좋은 반응이더라고요. 반면에 저는 썩 좋지만은 않았어요. 나만 이 소설을 잘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서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어요. 꽃을 먹는다든지, 맨발로 다닌다든지 등 사이클리스트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그렇고,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생리를 그리는 방식이 어떤 면에서는 통쾌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만두 : 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싫어하는 편이에요. 신념을 지닌 사람을 사이비처럼 묘사하고 홀린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프고 힘든 것을 모든 여성들이 거부할 것이라는 가정은 여성이든 인간이든 너무 단순화해서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을 폄하할 때 나타나는 효과가 무엇일지도 우려되고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이 소위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해요. “베일을 벗을 수 있다면 베일 안 벗을 사람 없을걸”이라는 말처럼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낑깡 : 저는 이 소설이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미묘하게 느껴졌어요. 작가가 여성 몸과 여성 몸의 경험을 생리, 더 크게 보자면 재생산과 관련된 주제만으로 축약시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재생산을 빼면 여성의 몸의 경험이나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선녀 : 재생산이 여성과 남성 모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을 때, 몸에서 ‘여성성’이라고 여겨지는 특성이 드러날 필요가 있을까요? 재생산이 여성의 것이라는 본질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제거하고 나면 여성성이 몸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낑깡 : 그래도 여성성이 제거된 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은 것이 아쉬워요.

선녀 : 재생산과 관련해서, 이 소설이 발표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의 맥락이 있지 않을까요? 예컨대 1986년 미국에서 일어난 “베이비 M 사건[1]”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엄마와 아빠란 무엇인가? 누구를 엄마라고 할 것인가? 난자의 주인인가, 임신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이를 키운 사람인가? 여기에서 ‘재생산’이란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와 같은 논의들이 페미니즘 안에 있었어요. 이 소설은 재생산 문제에 대해서 해방적인 사회관계를 상상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소설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 소설가가 재생산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이 쓰인 시대상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다 말해줘야 하는, 소설가가 항상 올바른 말을 하는 시대를 초월한 인식자여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글을 읽을 때 텍스트 외적인 컨텍스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1] 베이비 M(1986년 3월 27일~)은 법적인 부모에 대한 재판 (In re Baby M, 537 A.2d 1227, 109 N.J. 396 (N.J. 02/03/1988))에서 대상이 된 아이의 가명이다. 대리모출산의 유효성에 대한 미국의 첫 재판 사례이다. 최종 판결에서 의뢰한 아버지와 대리모를 맡은 어머니가 법적인 부모가 되고, 의뢰한 아버지에게 양육권을 주고 대리모에게는 면접권을 주었다. (원문 보기)

오온 : SF를 읽으면서, 여성과 기술에 관한 수많은 문제들을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소설도 기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어머니와 딸의 생각이 달랐잖아요. 이렇게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게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그런데 「여왕마저도」는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내기보다 논의를 종결하는 느낌이라 아쉬웠어요. 작가 후기에서 드러나는 코니 윌리스의 입장도 그렇고요.

찬란 : 그렇지만 저는 코니 윌리스가 이 소설에서 여성성을 강조한 것이 여성성을 폄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미러링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이 ‘여성성’이나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들을 찬양할 때 의아함을 느껴서요. 에이드리언 리치가 어머니의 우월성을 이야기할 때에도 ‘왜 우월성을 말해야 하지?’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상상 : 생리가 부정적으로 이야기될 때는 ‘몸의 불편함’과 연결되잖아요.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안 아픈 게 무조건 좋지’라고 예전에 생각했었는데, 고통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서는 ‘아픔’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딸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른 결정을 했으면 소설의 페미니즘적 의미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만두 : 사실 딸이라는 존재는 엄마를 엿 먹이기 위해서도 생리를 할 존재라고요! (일동 웃음)

정은 : 그래도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편을 없애고자 하는 것에 해방적인 카타르시스가 있잖아요.

선녀 : 생리를 병이나 여성의 것이 아니라, 몸의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만두 : 몸을 지니고 있으면 몸의 생리적인 부산물들이 인격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생리는 아픔이라는 문제보다도 ‘어떤 인간을 전제하는가’의 문제와 더 연관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리 : 상상, 오온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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