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페미니스트의 ‘가족’ 상상하기

✂나루

1. 가족, 남성 그리고 페미니즘

병원은 아내에게 ‘자연분만이 힘든 케이스’라 했지만 난 콧방귀를 뀌었다. 아내에게는 ‘그게 다 제왕절개 수술을 유도해서 돈 벌려는 수작이지”라면서 무안을 줬다. … 나는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세상 비판한다는 사회학 공부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어찌 한 사람의 고통을 모른 체했을꼬. 나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아내를 힘들게 하면서 그것을 ‘의사라는 권력’에 저항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오찬호, 2016: 31-33)

여성주의에서 정상가족은 가부장제를 실현하는 수단이고 여성에 대한 남성[1]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주의와 만날 때 가족에 대한 질문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모 배우[2]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자칭하며 가족 내 (남성으로서)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컸다고 밝힌 것처럼, 어머니와 오누이, 소중한 아내와 딸과 같이 주변 여성들의 서사로 시작되는 남성의 고민은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죄책감은 남성의 행동 변화를 촉구한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남성의 모습은 아빠와 페미니즘을 합성한 ‘빠미니즘’의 실천자로 등장하기도 하고, 아내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협상하고 가족 내에 적용된 가부장제의 잔습들을 개선하는 남편의 모습으로도 등장했다. 최근 한국에선 가족 내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한 남성들의 개인적 서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딸이 아버지에 대해 쓴 『아빠의 페미니즘』(유진, 2018), 남성이 아내와의 만남에서부터 가족의 구성까지 다루는 『두 번째 페미니스트』(서한영교, 2019), 그리고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오찬호, 2016),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최승범, 2018)와 같이 남성이 여성주의적 자기인식에 기반하여 쓴 저서에서 남성은 여성주의적 실천과 고민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로 가족을 사용한다.

[1] 본 글에서 남성은 성별이분법을 따라 분할된 법적 성별로서의 남성을 지칭한다. 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남성으로 여겨지고 남성성을 수행해 온 주체이자 가부장제의 성별위계 속에서 특권층을 차지하는 남성이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느끼는 모순, 갈등, 타협을 본 글이 주된 관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 지칭하는 남성이란 한정적인 대상임을 밝힌다. 이러한 조작적 정의는 남성을 본질화한다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성별이분법 내에서 수행되는 남성의 특권적 지점과 여성주의적 실천의 한계를 명확히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2]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곽상아, “유아인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며 올린 글(기사 보기)” 최종접속일: 20190805

코넬(2013)이 지적하듯, 남성의 ‘깨달음’은 무지와 ‘외면’에 대한 죄책감을 남성들에게 부여한다. 앞서 인용한 글의 저자 또한 자신이 여성주의로 ‘전향’한 이유를 아내에게 자연분만을 강요하다가 의사의 꾸지람을 들은 후 느낀 죄책감에서 찾고 있는데, 이렇듯 특히 가족과 같이 가까이 있었음에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새삼스러움과 그에 따른 죄책감은 남성들의 내면에서 여성주의에 입각한 인식의 재구성을 추동한다. 그 결과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결혼 의례를 따르지 않고 아내와 새로운 결혼식을 구성하거나, 아내와 가사를 적극적으로 분담하고,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육아휴직을 사용하거나, 가족 내 호칭과 행동에 있어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서한영교, 2019; 오찬호, 2016; 유진, 2018). 한국 사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이 남성들은 새로운 남성으로서, 여성주의에 있어 남성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가능성으로 포착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변화를 남성의 변화로 낙관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변화한 것은 새로운 남성이 아닌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이며, 이 이미지 또한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란 존 베이넌(John Beynon)의 용례를 따른다. 베이넌(2011)은 1980년대 제2기 여성주의 물결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한 새로운 남성이 하나의 이상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이미지’라는 단어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베이넌 2011: 171). 따라서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란 규범적 효과를 가진 남성됨의 새로운 이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제2기 여성주의 물결에서 나타난 남성에 대한 논의는 현재 한국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주의 언어와 실천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980년대에 전통적 남성의 이미지는 강간, 전쟁, 근친강간, 오염 여타의 많은 것과 동일시 되었다(베이넌, 2011: 171). 이제 더 이상 긍정적인 가치가 아니게 된 남성의 이미지는 남성에게 감정적으로 소통하고 가족에게 헌신하는, 남성됨의 새로운 이미지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베이넌은 그것이 실제로 남성들의 행동을 변화하도록 추동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미지의 등장에 비해 남성들의 거의 대다수는 여전히 전통적 남성으로 남아있고 단지 소수의 남성들만이 이 새로운 이미지를 체득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더해 실천이란 것 또한 가부장제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양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를 접하고 좋은 아들, 남편, 아버지가 되었다” 같은 단일한 테마를 갖는다. 이 ‘새로운 남성’이 얼마나 ‘새로운지’에 대한 질문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베이넌, 2011: 170).

정상가족과 여성주의 간의 고민에 있어서, 남성들의 여성주의적 실천은 정상가족의 해체나 비혼과 같은 급진적인 상상보다 정상가족 내에서 개인이 권리(남성됨)를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2. 1980년대: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

2-1. 낡은 남성과 익숙한 이미지

‘새로운 남성’을 보고 들으면 우리는 그 변화들이 얼마나 부분적으로 일어나는지 즉각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상주의자’가 되기는 너무나 쉽다. 왜냐하면 현실에서처럼 이미지에서도 많은 전통적 남성성 코드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Chapman, 1988: 222; 존 베이넌, 2011: 197에서 재인용).

제2기 페미니즘의 물결은 남성이 여성주의 진영 내에 등장하도록 영향을 끼쳤다. 남성해방운동(Men’s Liberation Movement)과 같은 운동이 등장했고 기존의 전통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해방’이라는 묘사어가 보여주듯 “가부장제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차별적이다.”라는 인식은 남성들을 페미니즘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성이 ‘감정적 억압’, ‘강함의 추구’, ‘여성에 대한 지배’ 라는 전통적 남성성의 구성요소를 강요받았고 이러한 차별과 억압의 주범인 가부장제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남성들에게 가부장제를 공모자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미국의 1980년대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전통적 남성 이미지는 더 이상 긍정적인 요소로 부각되지 않았기에 여성주의에 대한 응답을 위해서건, 남성 그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서건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베이넌은 그 때의 이미지가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고 설명한다(베이넌, 2011: 205).

집안일에 능숙하고 아이 양육과 보육을 포함해 집안일에 전면적으로 참여한다.
감정을 읽고 표현할 줄 알며 세심하고 자신의 더 부드럽고 ‘여성적인 측면’과 접촉한다.
여성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관계를 잘 맺으며 배려하고 나눈다.
폭력에 반대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다른 사람과 사려 깊고 민주적으로 관계맺는다.
성적인 문제에 개방적이고 게이와 레즈비언 사안에 대해 자유주의적이고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다.
생태학과 평화정치학에 관여하고 근본적이고 미래를 생각하는 진보적 사유를 한다.

문제는 새롭게 등장한 이미지에 비해 현실 속 남성들은 여전히 낡아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남성의 규범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 및 양육의 참여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가 남성에 의한 가정폭력, 친족 성폭력 등의 문제를 곧장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도 명백했다(베이넌, 2011: 174).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는 남성이 가족 내 다른 구성원과 맺는 관계에서 태도의 변화를 이야기했을 뿐, 가부장제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내포하는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새롭게 등장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가부장제와 정상가족을 유지시켰다는 점에서 전혀 새롭지 않았다.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란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통해 구성된 정상가족의 형태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정상가족을 통하지 않는 이상 달성될 수 없는 것으로 아주 약간만 새로운, 혹은 굉장히 익숙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는 정상가족을 질문하기보다는, 정상가족에 기대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이미지는 남성의 낡은 실상과 유리되어 있었고, 또한 여성주의 운동에 있어 그다지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전통적 남성성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여성주의적 비판으로 인해 쉽게 폐기되지는 못했다. 1980년대 이후는 베이넌의 지적처럼 남성성이 대대적으로 재구조화된 시기이며(베이넌, 2011: 169), 이때 재구조화의 한 갈래로 양육자로서의 남성 이미지가 등장했다[3].

[3] 베이넌은 1980년대를 남성성이 재구성된 시기로 파악한다. 제2기 페미니즘 물결과 소비 중심의 상업화가 만들어낸 남성성은 전통적 남성에서 분리되어 양육자로서의 ‘새로운 남성’, 소비와 쾌락을 탐닉하는 ‘새로운 사나이’ 등으로 분화되었다.

2-2. 정상가족 안에 갇힌 맨박스(Man Box)

그렇다면 남성들이 실천하는 가족 내 새로운 남성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선 이들은 앞서 언급한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인물들로, 가사에 헌신하고, 여성과 관계를 상호성과 호혜성을 바탕으로 재정립하며, 퀴어, 장애, 인종, 생태계 등 다양한 소수자 이슈와 자신을 연결한다. 이러한 면은 “내 안의 소수자성을 발견하였다”와 같은 언급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전통적  남성성이라는 단일하고 본질적인 정체성으로만 자신을 서술하던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 자신 내부에 소수자성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방향으로 이어진다[4].

[4] 나는 이러한 인식이 남성으로 하여금 퀴어됨을 상상할 수 있게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적어도 남성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만 자신을 구성하지는 않게 될 것이며 다양한 실천들을 상상하고 수행해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채프먼은 “1980년대에 여성주의가 생물학에 매였던 젠더를 풀고 남성성과 여성성이 양성 모두에게 이용 가능한 공간들이 되었을 때, 남성들은 자기 내면의 여성성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베이넌, 2011: 196-197). 남성들이 여성주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서 취약함, 사랑 등의 감정을 발견하는데, 성별이분법의 도식 위에서 이를 ‘남성성’과 ‘여성성’[5]의 혼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서한영교, 2019). 이러한 인식은 현대의 맨박스(토니 포터, 2016)와 같은 시각으로 이어진다. 남성들에게 여성주의는 남성이기 이전의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방법이 되며, 남성은 이제 전통적 아들, 남편, 아버지 역할에서 벗어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5] 이때 남성 저자가 인식하는 여성성이란 가족 내의 성별역할 차이에 따른 여성성을 의미하며, 모성, 호혜성, 친밀성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남성 저자는 이러한 성별분업 개념 자체에는 의문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시 말해 소수자성을 인식을 하지만 그 소수자성을 동시에 본질화한다는 혐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 주체 위에 성별이라는 위계가 씌워졌다는 이 맨박스와 같은 인식은 가족 내의 성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부장제의 해체가 아닌 오로지 남성의 실천에 국한시킨다. 맨박스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이 가족에게 ‘죄’를 저지르고 있다면 이를 해결할 방법이란 맨박스를 벗고 개인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 내에서 남성의 여성주의적 상상력이란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을 개선함으로써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상상(“내가 새로운 아들, 남편, 아버지가 된다면 집 안의 가부장제는 사라질 것이다.”)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198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남성의 이미지는 전통적 남성 이미지인 맨박스를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남성에게 속죄와 면죄부를 동시에 부여했다. 이들에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연결, 돌봄과 돌봄을 전담하는 여성의 문제, ‘아내구타’와 가정폭력, 친족성폭력과 같은 문제는 ‘남성 자신이 잘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환원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역사성은 은폐되며, 남성은 책임을 자신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가부장제의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눈을 돌린다. 

정상가족은 여전히 가부장제를 실현하는 집합적인 수단이고 영역이며, 이성애규범에 따라 구성된 정상가족은 그 안에 이미 가부장제와 그에 따른 차별과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맨박스의 개념에 입각한 소수의 남성들은 정상가족을 질문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정상가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맨박스가 질문하는 것은 남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인식이지, 남성이 성별 권력과 위계에서 갖는 특권에 대한 인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남성성을 벗어나는 일 하나에 전력을 소비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정상가족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요원해보인다.

3. 부재한 고민과 또 다른 상상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국의 이 새로운 남성들을 바라봄에 있어 베이넌이 1980년대 미국의 남성들을 바라보며 가졌던 문제의식을 다시금 가져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베이넌은 제2기 여성주의의 물결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은 새로운 남성이 아니라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 혹은 규범이었다고 본다. 이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는 코넬(2013)의 말처럼 결국 남성성의 재구성과 같은 개인적 영역에 관심을 가질 뿐 성별위계와 가부장제와 같은 정치적 영역에는 관심이 없었다. 맨박스와 같은 인식에서 남성은 여성주의적 실천을 남성성의 변화로 받아들이지, 성차별의 종식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국 남성들의 빈약한 여성주의적 상상력 또한 위와 같은 맥락과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재한 질문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와 맨박스가 자연스레 상정하고 있는 남성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가정을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맨박스와 가부장제가 예상과 달리 개인이 벗어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관성이라면, 남성은 가부장제의 수단으로서 결혼과 정상가족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운동을 집단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여성주의의 오래된 경구는 남성 개인의 실천이 과연 정말 가부장제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여성주의를 접하고 실천하면서 남성은 분명 가족 내의 역할 변화에서 나아가 가부장제와 이성애규범이 만들어내는 성별이분법의 허구성, 자신에게 내재한 단일하지 않은 성별 정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몰아넣는 가부장제와 이성애규범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비단 가족 내에서의 변화 뿐만 아니라 남성의 비규범적 젠더 실천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상상력은 분명 급진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남성들의 이러한 주체성에 대한 상상은 태도의 변화만을 촉구한 결과, 정작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을 놓치고 말았다. 남성들은 맨박스를 열고 나가 새로운 남성의 이미지를 실천으로 옮겼으나, 이미지의 토대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여성주의를 접하는 남성의 첫 질문이 되었던 가족에 대한 고민은 지금과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남성은 안된다는 비관주의도, 남성은 할 수 있다는 아닌 영웅주의도 아닌 어느 지점에서 말이다.


참고 문헌

  • 서한영교(2019), 『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울: arte.
  • 오찬호(2016),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서울: 동양북스.
  • 유진(2018), 『아빠의 페미니즘』, 파주: 책구경.
  • 최승범(2018),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파주: 생각의 힘.
  • Beynon, John. (2002). Masculinities and culture, Phildelphia, Pa: Open University, 임인숙 옮김(2011), 『남성성과 문화』,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 Connell, R. W. (1995). Masculinities, Cambridge: Polity Press, 안상욱. 현민 옮김(2013), 『남성성/들』, 서울: 이매진.
  • Porter, Tony. (2015). Breaking out of the man box : the next generation of manhood, New York: Skyhorse Publishing, 김영진 옮김(2016), 『맨박스』, 서울: 한빛비즈.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One thought on “남성 페미니스트의 ‘가족’ 상상하기”

  1. 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남성으로서 최근 정상가족의 해체나 비혼, 탈연애 등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서 제가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저와같이 지방에 살면서 계급적으로도 소외당하고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중앙의 진보적이고 다양한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전된 논의를 접할 수 있게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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