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 돌려보기’는 당연하지 않다: 일상의 폭력이 n번방 사건이 되기까지

🍀싱두

첫 고등학교 체육대회 날, 각 반은 개성 넘치는 단체 티를 주문했다. 우리 반은 담임선생님이 ‘대장’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주문했고, 반 친구들은 색깔과 모양이 같고 ‘따까리’라고 적힌 티셔츠를 맞췄다. 나이키 로고를 패러디한 단체 티를 맞춘 반도 있었고, 하여튼 가지각색이었다. 그중 한 반은 각자 별명을 넣을 수 있는 티셔츠를 주문했는데, 내 눈에 남자애 세 명의 별명이 들어왔다. 각 한 글자씩을 맡아 셋이 모이면 하나의 단어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는 ‘그’ 단어. 자기들끼리 모여서 낄낄대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길래 무슨 단어인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성인인증을 하란다. 알고 보니 유명 음란물 사이트 이름이었다.

최근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한, 실시간 검색어를 뒤덮었던 ‘텔레그램 n번방’을 봤을 때 문득 떠오른 과거의 장면이었다. 관련 기사에 적힌 내용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게 정말 현실인지,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참혹했다. 어리고, 취약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는 여성들을 철저히 자신들의 성욕 해소 도구로 착취하고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준 강력범죄였다. 갓갓, 박사로 불린 텔레그램 상의 성착취 영상 공유방 운영자들은 프리미엄을 붙여 그 방에 입장할 수 있는 입장권을 팔았다. 그 방들에서 수십 만 명의 성폭력 범죄 가해자들이 여성들의 고통과 피해를 방조하고, 적극적으로 재생산했다.

n번방 사건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자 함께 뜬 이슈는 ‘텔레그램 탈퇴’였다. “실수로 텔레그램 n번방에 들어갔다 금방 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그냥 들어가 가만히 있었다.” 등 갖가지 사연을 들먹이며 자신이 가해 대상자, 혹은 처벌 대상자에 포함되는지를 물었다. 기이했다. 그 방들에서 오가는 대화, 공유되는 영상물 어느 하나 범죄가 아닌 것이 없을 텐데. 기사에 나온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는 명징한 사실인데.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처음엔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점 아, 어쩌면 정말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 그런 상황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국의 남성 동성 사회에서 ‘야동을 돌려보는 문화’는 흔하다. 언젠가 TV 뉴스에서 남자 초등학생들이 음란물을 공유하는 게 문제다, 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보고 충격받았던 적이 있다(기사 보기). ‘야동을 공유하는 일’은 옛날과 비교해 훨씬 쉬워졌다. 영상을 무료로 전송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 발명됐고, 영상 촬영이 용이해졌고, 이번 사건처럼 온라인에서 영상을 사고팔 때 비트코인을 사용해 흔적을 남기는 걸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인간을 편리하게 해준 여러 기술이, 성착취 영상물을 공유하는 것에 어떤 죄악감이나 죄책감을 쉽게 느끼지 못하게 한 끔찍한 문화와 만나 이번 사건이 벌어졌다. 그 끔찍한 문화란 앞서 언급한 ‘야동 돌려보는 문화’다.

‘야동’을 돌려보는 것은 한국 남성 커뮤니티에서 일종의 성인식, 통과의례와 같다. 학창 시절 많은 남성 청소년들은 야동을 돌려보며 우정을 다진다. 남성의 시선에서 과도하게 물화되고 성애화된 여성 신체와 폭력적인 성행위는 이 커뮤니티에 진입하기 위해 한 번은 접해야 하는 관문이다. 커뮤니티 일원과 영상물에 대한 음담패설을 나누고, 서로 더 좋은 영상물을 발견하면 공유하고, ‘본좌’, ‘박사’, ‘갓갓’ 등으로 불리며 질 좋은 영상을 많이 퍼다 나르는 이는 칭송받는다. 이 또래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승인받지 못하고 주류에서 겉돈다.

이 문화가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착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동한다. 교육, 미디어, 사법 등 사회 곳곳에서 범죄에 가까운 폭력적인 남성의 섹슈얼리티 실천을 끊임없이 ‘정상화’해왔다. 그 치밀한 과정은 생애 과정 전반을 아우를 정도로 광범위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받았던 성교육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남성의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당연시하는 것에서부터 크게 변한 게 없다(기사 보기). 유명무실한 성교육을 받고, 혹은 이를 경시하며 자란 이들은 삶의 공간 곳곳에서 비뚤어진 형태로 이를 실천한다. TV 프로그램에 야동을 보거나 돌려본 경험을 당당하게 말하는 남성들이 등장하고, 사회는 이를 묵인한다. 성매매 혐의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던 가수의 음원은 발매되자마자 음원 차트 정상을 쉽게 차지한다. 빈번하게 성매매가 벌어졌던 거대한 클럽을 운영하던 남성 가수는 개츠비에 비유되며 수완 좋은 사업가로 그려졌다. 우리는 늘 이 거대한 강간문화를 방조하는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성범죄를 다루는 사법체계의 안일함도 한몫 거든다. 강간문화를 내면화한 법의식은 관련 범죄 처벌에 관대할 수밖에 없다. n번방 사건 이전 소라넷 운영자 검거부터 각종 불법 촬영물 성범죄 사건까지 법은 일관성 있게 가벼운 처벌만을 내렸다. 이번 n번방 사건과 유사한 성폭력 범죄 사건들을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이해하고 수용했던 수많은 판결과 해석들, ‘야동’과 포르노를 공유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지도록 만들어낸 수많은 우리 사회의 면면들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기사 보기).

이로부터 구성된 거대한 강간문화의 초석을 이제는 거두어내야 한다. 아니, 하나씩 완전하게 깨부숴야 한다. 당연시되어서는 안 될 폭력적인 행위가 “자연스러운 성욕의 결과물”로 더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N번방 사건이 처음 공론화되었을 때, 많은 여성이 충격을 받은 한편 “그럴 줄 알았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 일상처럼 존재했고, 처벌은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럴 줄 알았다”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를 말하기 시작한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건 잘못됐다고, 성폭력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라고, 남성의 성욕은 단 한 번도 생물학적 본능이었던 적이 없다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미투 운동이 그랬듯, 이 연대의 흐름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분명 바꿔놓을 것이다. 음란물 사이트 이름을 등 뒤에 적어놓고 낄낄대는 건 더는 장난이 아니라 명백한 폭력으로 인식될 것이고, 그러는 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다. 수많은 ‘박사’ 중 한 명인 조주빈이 포토라인에 선 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번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모든 가해자가 강력하게 처벌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와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피해 당사자 여성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참고문헌

  • 윤정혜(2020년 4월 1일). “남성의 성욕은 당연?…’범죄’ 정당화하는 성교육”. MBC뉴스.
  • 전선하(2010년 11월 15일). “‘2580’ 초등학생 음란물 중독 심각, “엄마 주민번호 외워요””. TV리포트.
  • 조국현(2020년 4월1일). “호기심에 참여한 n번방?…황교안 발언 ‘논란’”. MBC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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