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판의 문법』: 다시 권력형 성폭력을 이야기한다는 것

✂ 한태경

조정환, 『까판의 문법』, (갈무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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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질 뿐만 아니라 뚜렷해지기도 한다. 기억이 재구성 되기 위해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언어와 경험이다. 2016년 #OO계_내_성폭력 운동과 201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METOO운동의 흐름 속에서, 10년이 지난 고 장자연 사건의 재수사가 요청되었다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0년간 고 장자연 사건과 관련한 유일한 증언자인 윤지오는 끝없이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증언하고, 책『13번째 증언』을 출간하고, 사건의 해결을 촉구해왔다. 나에게 이번 갈무리에서 출판된 조정환의 『까판의 문법』과 『증언혐오』 또한 위와 같은 맥락에서 공명하고, 참여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보여졌다. 

2. 『까판의 문법』

『까판의 문법』은 『증언혐오』와 짝을 이루는 저서이고, 저자 조정환은 이번 『까판의 문법』에서 2009년 고 장자연 사건을 증언한 윤지오가 어떻게 `사기꾼`으로 매도되었는지의 과정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살핀다. 책 뒷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저자는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전 사회적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을, 권력형 성폭력 가해 권력이 사용하는 권력테크놀로지”로 확장한다.

이때 저자가 사용하는 단어 ‘까판’은 ‘까다’와 ‘판’이 합성되어 SNS상에서 통용되는 단어로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까는 판(조정환 2020, 11)”을 의미한다. 조정환은 까판의 목적이 상대방을 타격하고 해체하는 일에 있으며, 주로 이 까판을 주도하는 까주체와 이를 지지하는 까댓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까주체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자신과 경쟁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고르며 이 상대를 발 아래로 끌어내리는 정서인 ‘혐오’를 동기로 까판을 지속한다(ibid., 11). 윤지오에 대한 사회적 까판이 조직되고 운동하는 방식을 살피며 저자는 1부에서는 까판이 증언의 일관성과 신빙성을 해체한 뒤에 거짓진실을 채워넣는 구도를 제시하며(ibid., 17), 2부에서는 증언자 윤지오를 타락한 여성으로 규정한 뒤 증언을 해체하는 일련의 시도를 제시한다(ibid., 22). 조정환은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간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벌이는 까판이 이제는 윤지오의 증언을 틀어막고 있다고 본다(ibid., 108).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저자의 논리가 전개되는 방식이었다. 저자는 2부, 8개 장에서 윤지오의 증언과 윤지오를 깎아내리는 까계정의 주장을 말 그대로 하나하나 논파한다.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세력으로서 저자가 지목하는 (사회적)까계정은 박준영 변호사, 박훈 변호사, 김용호, 김수민, 기생충 학자 서민, 김대오 기자, 검찰 과거사위원회, 슛맨과 서준혁, 최나리 변호사, 『조선일보』, ‘TV조선’, ‘궁금한 이야기Y’와  ‘SBS’, 오덕식 판사 등이다. 저자는 이들이 윤지오의 증언을 왜곡하고 오독하며,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혹은 증언할 자격이 없는 ‘타락한 여성’으로 몰아가고, 이를 통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막고자하는 가해권력자들의 욕망에 동조하고, 그들과 그 체제를 보호하는 변론-테크놀로지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ibid., 151).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취하는 이 자세는 성실하고, 면밀하고, 끈질기다.

저자가 까판으로 표현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은 진실과 부인주의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맥락을 같이한다. 김명희(2017) 또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분석하며 서술이 단순히 해석학적인 문제가 아니며, 대상에 대한 서술이 달라짐에 따라 책임의식과 책임을 지는 방식 및 의미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ibid., 268).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윤지오와 그의 증언을 오독과 왜곡, 윤지오를 정치세력의 꼭두각시로 바라보는 의심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단순한 서술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까판과 까계정의 서술과 발언이 단순히 개인의 해석이 아닌, 고 장자연 사건의 진실과 이를 은폐하려는 가해권력의 수호와 맞닿아있음(조정환, 255)을 지적한다.

3. 비판과 한계

저자가 까계정의 논거를 논파하는 방식은 직관적이다. 저자는 까계정이 어떤 부분에서 고 장자연 사건과 관련한 이전의 자료와 배치되는지, 까계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떤 비약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며 이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가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이며, 이 결과 사건의 가해권력을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은폐하고 수호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와 학술적 개념들이 사실상 이 까판의 문법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아니라, 까계정의 논리를 추론하고 분석하기 위한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분석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점은 아쉽다. 다시 말해, 까판의 논리를 분석하기 위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ibid., 338),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ibid., 267), 가족중심주의(ibid., 306) 등 여러가지 학술적 도구와 언어를 끌어오고 까계정의 논리 뒤에 숨겨진 전제를 하나하나 반박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좋으나, 이것이 저자가 까판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까판이라고 뭉뚱그려진 자들에 대한 반박에 그치는 것으로 보이는 점은 아쉽다. 

까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반박을 위해 작성된 이 구도에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적대 관계를 구축한다. 증언자 윤지오와 그의 증언을 깎아내리는 까판의 까계정과 이들이 동조하는 권력을 상정한 뒤, 저자는 이들을 자본주의 가부장적(혹은 가부장제 자본주의적)권력이라고 뭉뚱그리지만, 저서 내내 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혐의로 등장할 뿐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밝혀지지는 않는다. J.K.깁슨-그레이엄(J.K.Gibson Graham, 1996; 2006; 2013)은 선험하는 것으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전제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외부를 없앰으로써 비판의 불가능성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점에서 저자는 가해권력이라고 지목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이를 수행하고 이에 동조하는 무리를 까계정과 까판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이들이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저자가 보기에) 일관적인 비난과 비판을 내놓는다는 공통점 하나로 인해, ‘까판’이라는 동질한 성격의 무리로 묶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저자가 까판 내부의 이질성과 차이를 파악하지 않은 채 이들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로 동질한 수행자로 파악함으로써 오히려 실체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무엇보다 문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적대 구조 내에서 저자가 까계정의 대상이 된 윤지오의 증언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다. 저자는 이 대립의 관계 속에서 윤지오의 증언과 까계정의 주장을 병치해놓은 채 검증을 시도(해야만)하는데, 이 대립 구도에서는 윤지오의 증언이 오로지 사실과 거짓의 이분법 위에 놓여질 뿐이다. 여성학자 정희진(2016)은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논쟁을 분석하며, 이렇듯 팩트를 둘러싸고 누가 사실과 증인을 지니고 있는지를 경쟁하는 방식은 논의를 시작하는 생산적인 출발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팩트 싸움의 구도 속에서 저자는 증언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진실은 기록되거나 합리적인 사실을 의미하며, 반대편에 놓인 까계정의 세력과 그의 논리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이자 가해권력이라고 일축하는 저자의 논리는 결국 윤지오의 증언을 사실 아니면 거짓의 구도로 놓는 까계정의 방식을 강화한다. 조정환은 저서에서 까계정이 알지 못하는 것, 까계정이 놓친 것을 자료를 기반으로 하나하나 반박하지만, 이 과정은 결국 팩트싸움이라는 까판의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성폭력과 관련하여 누구의 말이 맞는지에 대한 싸움은 결국 성폭력 범죄를 다루는 것이지, 성폭력 문화를 다루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김현영(2018)은 성범죄와 관련해 문화와 범죄가 점점 구분되지 않음을 지적하며(권김현영 2018, 52) 법중심의 논의로는 성 문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문제제기가 적용되기 어려움을 말한다(ibid., 54). 고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윤지오의 증언을 단순히 까계정의 반대급부에 놓는 조정환의 논리는 그 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4. 나가며

대한민국에서 2009년부터 2020년의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시간으로 경험되지는 않았겠지만, 『까판의 문법』은 그 사이에 있었던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한국의 여성주의 흐름 속에 정박하고 있다고 보인다. 약 235,796명 국민의 청원과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 시작된 사건의 재수사와 윤지오의 증언은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공론장을 다시 열어젖혔고, 『까판의 문법』은 2009년과 2020년 사이를 오가며 윤지오와 그를 둘러싼 한국 사회를 집요하고 성실하게 서술한다. 이와 함께 출간된 『증언혐오』 또한 일독한다면 위의 사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이해가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다만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이 사용하는 권력 테크놀로지를 비판하겠다는 시도가 사실상 단순히 사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 위에 머물러있다는 점은 문제적으로 보인다. 윤지오의 증언을 비판 대상인 까계정과 동일한 구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증언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까판의 문법을 강화시켰다고 보이는 『까판의 문법』이 아쉬운 이유다.


참고문헌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서울: 교양인. 2018.
  • 김명희(2017).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부인(denial)의 정치학: ‘『제국의 위안부』 사태’ 다시 읽기」, 『한국여성학』 33(3). 235-278.
  • 정희진(2016). 「포스트 식민주의와 여성에 대한 폭력」. 『문학동네』 23(1). 1~10.
  • 조정환(2020). 『까판의 문법』. 서울: 도서출판 갈무리.
  • J.K.Gibson Graham,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Blackwell Publish, 1996;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A Feminist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Un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3; 이현재, 엄은희 옮김.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여성주의 정치경제비판』. 서울: 알트. 2013.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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