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이

1. 페미니스트로 존재한다는 것
‘나’와는 너무도 다른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타자를 알아가고 돌보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관계를 맺는 행위들은 종종 내상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들을 기껍게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뭘 잘 모르고, 서투르고, 취약했을 시절에 나를 돌보아준 여자어른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워하는 마음이 차오를때, 그런 마음을 쏟는 일이 에너지 ‘낭비’라는걸 알려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들은 어릴적 나에게 페미니즘이론이라거나 저명한 여성학자들의 논의를 직접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적어도 어떻게 사는게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인지를 몸으로 감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책은 타자와 더불어사는 삶과 공동체를 향한 상상력이야 말로 페미니스트로서 이 세계를 ‘긍정’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존재방식이라고 제안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긍정(affirmation)’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담론에 등장하는 ‘노오력만 하면 뭐 든지 할 수 있어’라는 의미의 ‘무한긍정’이나 ‘정신승리’가 아니다. 들뢰즈의 행동학을 통과해서 여성주체화의 문제를 다루는 ‘긍정의 윤리학’은, 오히려 ‘무한히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성’을 추동하는 통치성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 임파워링으로서 ‘여성-되기’를 제시한다.
2. 근대적 주체를 탈중심화하는 들뢰즈의 행동학
들뢰즈는 칸트 윤리학에 대한 니체와 푸코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행위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행위자로서 근대적주체의 ‘자율성’ 개념을 비판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알고보면 권력의 역사적 산물(‘노예의 도덕(니체)’, ‘규율권력의 생산적인 효과(푸코)’)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한 인간이 ‘나’로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부여받은 이성적인 능력과 ‘선의지’를 발휘해서 외부의 어떠한 강제나 권력의 영향도 받지 않은채 오로지 자기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지킴으로써 비로소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율적’인 ‘나(자기규율적인 입법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의 행동학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는 “주체개념을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복종인 자기입법적 복종을 규정하는 새로운 예속의 형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것(김은주, 2019: 139)”으로 설명된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는 권력관계를 작동시키는 장치를 통한 종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된다. 담론 이전의 ‘나’란 없으며, ‘나’라는 주체 또한 담론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푸코의 문제제기로부터 더 나아가, 주체화를 ‘인본주의적 주체’로부터 벗어남을 가능하게 만드는 ‘타자-되기’의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되기(becoming)’ 개념의 핵심은 부정적인 정동을 긍정적인 정동으로 바꾸어 신체들의 변용능력을 최대화 하는 ‘좋은’ 관계와 결합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좋은관계와의 결합을 통해서 욕망들을 몰적(molar)선분성의 선에 배치하는 ‘다수적인 것’의 권력관계들에 저항하고, 미시정치의 짜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해 진다. 들뢰즈의 신체개념은 스피노자의 ‘정동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근대적인 정신(이성)/육체(경험)라는 이분법적인 의미의 신체가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신체는 정동을 생성하고 변용하는 ‘역량’이다. 신체를 역량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담론의 효과로 환원불가능한 ‘강도’와 ‘흐름’을 만들어내는 ‘힘’(물리적인 실재)으로서 신체를 간주한다는 뜻으로, 신체는 더 이상 ‘이성을 담는 그릇’이나 ‘영혼의 감옥’으로 말해질 수 없다. 들뢰즈는 서양철학사의 오래된 이분법에서 부정적인 것(결핍)으로 정의되어온 신체, 감정, 욕망의 문제를 긍정적인 것(생성하는 힘)으로 재가치화함으로써 근대적주체를 탈중심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관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자의식을 가진 개인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인 주체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행동학의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다. 행동학은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본질과 당위에 관한 질문 대신,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통해서 신체가 얼마나 어디까지 다르게 변이하고 차이를 생성할수 있는지, ‘다른 것-되기’를 실행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갖는다. 이처럼, 들뢰즈는 ‘자발적 복종’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예속화에 저항하려는 ‘탈주체화’의 과정이 바로 ‘타자-되기’, ‘소수적인 것-되기’이며, 모든 ‘-되기’들 중에서도 ‘여성-되기’가 행동학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들뢰즈의 ‘여성-되기’에 관한 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브라이도티의 경우, 들뢰즈의 행동학이 차이의 문제를 다룰때에 상대적으로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성적 차이의 우선성’과 관련한 문제의식을 도입함으로써 ‘여성-되기’가 제기하는 쟁점(근대적주체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을 오히려 페미니즘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으려 했던 사람이다. 예컨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라는 텍스트에서 ‘비남성’이 아닌 방식으로 여성을 정의하고, 여성이라는 기표와 ‘성차화된 신체(sexed body)’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여성주체화의 문제를 논의한다. 여기서 브라이도티는 ‘성적 차이’의 세 가지 층위를 각각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 ‘각각의 여성 내부의 차이’로 개념화한 뒤, 성차화된 신체를 부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재의미화하고자 했다.
3. 차이와 타자를 ‘위치-변경’하는 긍정의 윤리학
정리하자면, 브라이도티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동일률의 원칙(A/~A)이 가정하는 이분법이 아닌 방식으로 새롭게 ‘차이’를 정의하고, 동시에 남성의미화경제를 통과하지 않은 여성/주체를 생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브라이도티의 관심사는 ‘본질의 형이상학’이 아닌 방식으로 대안적인 존재론을 쓸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물론, 브라이도티는 비동일자(~A)로서 차이를 정의해온 이분법을 활용하여 ‘구조적인 한계’의 표현으로서 타자를 강조하는 전략(예컨대, 여성은 ‘제2의 성’임을 주장하는 방식)이 소수자 운동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지 않는다.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타자의 목소리라는, 억압의 서사를 활용한 인정투쟁으로서 집합행동은 차이가 차별의 기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권력관계의 역사를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은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차별 받는다’라는 언설이 가정하는 인과관계 자체를 뒤집음으로써, ‘성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필요로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도티는 차별과 배제를 생산하는 이분법적 정의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차이를 재정의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학을 모색하고자 한다. 즉, 그 동안 배제되고 차별받아온 피억압자로서 타자들을 점점 더 많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범주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존재조건 자체가 “대안적인 역량을 창출하는 힘(김은주, 2019: 191)”으로서 차이들의 접속을 얼마나 활성화 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타자는 ‘나’가 생존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는 것으로(대표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상호인정을 위해 살려두는 것으로 존재한다기 보단, 타자를 살리는 것은 나를 살리는 것이고, 타자를 죽이면 곧 나도 죽는 그러한 상호적인 관계망으로 존재한다. 상호적인 관계망에 대한 인식은 “타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타자가 살아야 모두가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때, 대안적인 역량으로서 차이를 생성하는 타자들은 인간행위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간행위자와 상호작용하는 기술, 매체, 바이러스, 동물, 자연 등을 모두 포함하는 타자(“earth others”)이다. 다시 말해, 브라이도티의 타자성은 더 이상 기존 도덕철학의 인본주의(도덕의 실행자로서 자기의식을 가진 개인이자, 선험적으로 선의지를 부여받은 자율적인 인간주체개념)에 호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브라이도티의 문제의식은 ‘윤리적 전회(ethical turn)’라는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을 사유하려는 정치적인 입장(Braidotti, 2008; 8)을 보여준다. 권리, 도덕, 인간성, 평등, 자유 등과 같은 기존의 가치나 규범들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글로벌화된 현대사회의 ‘포스트-휴먼’,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담론과의 관계 속에서 소멸 혹은 삭제된다기 보단, 오히려 윤리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자는 정치적 요청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브라이도티에게 있어서 ‘윤리적 전회’를 통과한 주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긍정함으로써 상호의존이 존재조건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부정적인 정동을 긍정적인 정동으로 바꾸어 신체의 변용능력을 극대화하는 관계맺음을 생성한다. 이것이 바로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긍정의 윤리학(affirmative ethics)’이다. 긍정의 윤리학에 따르면, “타자에게 내가 해를 가하면 힘, 긍정성의 손실, 관계의 능력 즉 자유의 손실이라는 점에서 즉시 나 자신에 해를 미치는 것으로서 되돌아 온다(김은주, 2019: Braidotti, 2008 재인용).” 이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명령(성서의 황금률)을 확장 및 재의미화 한 것으로, 타자와 나는 언제나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되고 영향을 주고 받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삶을 지속해왔다는 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지구상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 중, 타자와의 관계를 맺지 않고 독립된 원자적인 실체로서 오로지 홀로 자족적인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는 없다. 따라서, 타자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타자와 나를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모두의 존재조건(신체의 능동적인 변용능력을 극대화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맺음의 역량)을 파괴하는 행위이기에 정당화 될 수 없다(윤리적으로 나쁘다). 한 마디로, 브라이도티에게 타자에 대한 존중은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자기배려’의 문제)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미래세대에게도 넘겨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 ‘책임’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윤리적 가치로서 지속가능성’이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관계망을 창출하는 것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삼아 생명을 위계적으로 재단하는 것과 무관한, 살아 있는 생명의 무위계적 평등주의에 기반하는 되기를 실행하는 것이다(김은주, 2019: 197).”
4. 상호의존성을 긍정하는 보살핌과 임파워링
긍정의 윤리학은 주디스 버틀러와 마찬가지로 취약성과 타자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를 연결지어 논의하지만, 버틀러와 달리 인식불가능한 타자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슬픔의 공동체(애도의 정치학)를 넘어서고자 한다. 분명히 브라이도티에게 “윤리적 정치적 변용능력”으로서 ‘공감’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민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연민으로서 공감은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정서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김은주, 2019: 201)”이기 때문이다. 긍정의 윤리학은 슬픔을 비롯하여 신체의 변용능력을 하강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정동에 급진성을 부여하기보단, 부정적인 정동들로부터 고통을 건져올려(“delinks pain from suffering (Braidotti, 2008)”) 다른 정동으로 트랜스포지션(위치-변경)할 수 있는 관계맺음에 관심을 갖고, 이와 같은 관계맺음을 생성하는 실천이 곧 윤리적으로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임파워링에 다름 아니라고 제시한다. 이로써, 긍정의 윤리학의 관점에 따르면 (1) 윤리적인 ‘좋음’과 (2) 페미니스트 임파워링으로서 여성주체화의 문제는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긍정의 윤리학을 통과해서 캐롤 길리건의 ‘보살핌’ 개념을 다시 읽어내려가는 시도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나에게 캐롤 길리건은 언제나 낸시 초도로우와 동시에 언급되면서 제3물결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여성적인 것’, ‘여성성’을 본질화-자연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사람으로, (길리건의 1차문헌을 직접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근대적주체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논의와는 거리가 먼 이론가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길리건을 초도로우가 아니라 브라이도티와 옆에 두고 생각했을 때에 새롭게 생각해볼만한 쟁점들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차이’를 부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브라이도티의 긍정의 윤리학과 함께 길리건의 문제의식을 재해석-재의미화 할 경우, 단순히 ‘권리의 도덕(A)’의 반대항(~A)이 아닌 것으로서 ‘보살핌’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즉, 보살핌은 타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횡단적 연결이다. 브라이도티의 말로 하자면, 힘 기르기로서의 보살핌은 정황적이고 책임성 있는 실천이자 자아와 타자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활동적인 시민권과 같은 입장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보살핌은 이분법적 규정에서 남성의 반대항에서 설정된 여성적인 것이나 여성적 덕목으로 표상된 의미에의 감정노동으로만 오인될 수 있는 여지를 넘어서 새로운 의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김은주,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185쪽
나는 이와 같은 재의미화를 통해서 페미니즘의 정치적인 과제가 ‘돌봄/감정노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넘어서서 ‘상호의존적으로 보살핌을 하고 보살핌을 받을 자유’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운동의 입장에서 볼때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정치학이 갖는 해방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그 동안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어온 돌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돌보지 않는 가부장적 국가에게 강력하게 책임을 요구하는 실천들은 분명히 의의가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온라인을 중심으로 ‘비혼-비출산’을 선언하면서 ‘거부’를 통한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흐름들 또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정치학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실천들이 계속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돌봄제공자로서 여성들이 더 이상 돌보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것에 머물기 보단, 돌봄 자체의 의미를 급진적으로 재구성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작년 9월에 내가 속한 트위터의 타임라인에서 한 차례 돌봄노동과 관련한 논쟁이 지나간 적 있다. 누군가는 여성들이 돌봄노동을 거부하는 일이 여성인권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여전히 여성들의 삶과 돌봄을 관련지어 말해야 한다고 했다. ‘돌봄노동을 경시하지 말자, 돌봄은 중요한 일이다’는 말은 ‘여자들에게 또다시 옛날처럼 애를 낳고 기르란 거냐’라는 반문으로 돌아오기도 하였고, 극단적으로는 ‘돌봄은 여성이 아닌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는 문제인데 그것이 페미니즘 의제인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나는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돌봄의 의미 자체를 바꾸지 않을 경우에, 돌봄이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공적담론의 형태로 논의되기 보단 ‘누구나 하기 싫어하기에 누군가 알아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로 여성주의 논의 안에서 조차 주변화 되고, 정치적인 개입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않음’이라는 거부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자유가 ‘허용’하는 삶이 과연 어떠한 삶인지, 왜 그러한 삶을 자유롭다고 욕망하는 것일지에 대한 물음이 페미니스트들 모두에게 절실하다고 느꼈다. 긍정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정황적이고 책임성 있는 실천이자 자아와 타자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활동적인 시민권”(김은주, 2019: 185)으로서 보살핌을 ‘위치-변경’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장애여성의 입장(standpoint)에서 여성주의적 지식을 생산하는데에 관심이 있는 수전 웬델의 경우에도, “돌봄을 받는 사람을 계속해서 의존하게 만들거나 거기에 종속된 사회적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 돌봄의 윤리학이 가능하다고 본다(웬델, 2013: 270)”고 주장한다. 웬델은 돌봄윤리학에 관한 여성주의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그들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은 돌봄이 필요 없다거나 돌봄을 받는 사람은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전제(웬델, 2013: 268)”라고 설명[1]하며, “이런 전제 때문에 돌봄을 제공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현실적인 욕구와 실제 보살핌의 상황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본질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웬델, 2013: 268)”고 밝힌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타자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취약성은 모두가 공유하는 존재조건이며, 그러한 취약성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역량을 이끌어내는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실천이야말로, 취약성을 파괴하거나 위계화하는 권력관계에 저항하는 정치라고 생각한다. 절망을 말하고, 사회를 저주하고, 인간을 혐오하는 것이 ‘쉬운’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럴수록 페미니스트로서 산다는 것은 거꾸로 타자와 더불어사는 삶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믿고 싶다.
[1] “모리스가 돌봄을 받는 사람들의 관점을 강조하고 힐리어가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은 돌봄이 필요 없다거나 돌봄을 받는 사람은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전제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전제 때문에 돌봄을 제공하는 많은 사람이 가진 현실적인 욕구와 실제 보살핌의 상황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본질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힐리어는 장애여성과 장애여성을 돌보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성reciprocity이 모든 사람에게 상호성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장애여성들과 그들을 보조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을 심사숙고하여 듣고,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다.”(수전 웬델, 2013, p. 268)”
참고 문헌
- 김은주(2019).『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에디투스.
- 로지 브라이도티, 박미선 역(2004).『유목적 주체; 우리 시대 페미니즘 이론에서의 체현과 성차의 문제』. 서울: 여이연.
- 수전 웬델, 황지성 역(2013).『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서울: 그린비.
- Braidotti, R. (2008). Affirmation, Pain and Empowerment. Asian Journal of Women’s Studies, 14(3), pp. 7-36. DOI: 10.1080/12259276.2008.11666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