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두

1. 어쩌면 평생 좋아할 수밖에 없을, 너무 다른 너와 나
책의 제목인 『붕대 감기』는 과거의 한 장면에서 포착된다. 아직 교련이 정규 수업 과목이던 시절, 고등학생 세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친구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한 바퀴 더 감아버린다. 세연이 붕대를 세게 잡아당기기까지 해 진경은 저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진경은 그 순간 “이 바보 같은 아이를 어쩌면 평생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169쪽) 생각했다.
주인공 진경은 예쁘장한 얼굴과 활발한 성격 덕분에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에 있었다. 세연은 학창 시절 얼굴에 난 화농성 여드름을 가리려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다녔지만,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런 세연이 교련 시간에 부반장 진경의 짝이 되어 그를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됐다. 세연의 고등학생 시절은 여러 결점과 트라우마 때문에 대부분 어두운 터널과 같았다. 그 속에서 진경의 존재는 드문드문 켜져 있던 작은 등불이었다(133쪽). 세연은 그 빛을 사랑하고 동경했지만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했다. 계속 캄캄한 곳에만 있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만났을 때 쉽게 눈을 뜨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경과 세연의 삶의 방식과 태도는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다. 진경이 한 여자아이의 엄마로서 소소한 일상을 SNS에 올릴 때, 세연은 그 모습을 보고 불편함, 또는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됐다. 왜 너는 그렇게 말하는 거야, 많은 여성들이 화장품을 버리고 머리를 짧게 자를 때 너는 왜 남자를 사귀고 그들과 함께 웃고 있는 거야. 반면 진경은 다양한 어휘로 자기만의 감성을 써 내려가던 세연이 어느 순간 건조한 문장으로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너의 정의로운 글을 응원하지만, 예전의 빛나던 고유한 네 모습은 어디 갔을까.
이렇게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가 되어버린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모습을 한 여성들이 얽히고설키며 이야기 속에서 서로에게 사랑, 비판, 우정, 연대를 표한다. 주인공인 두 사람과 그들 주변의 여성들은 미묘한 긴장 관계 속에서 때로는 서로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말미 세연은 진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면서 그립고, 기분이 좋으면서 두려워. 내가 너한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는데.”(164쪽)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모두는 서로에 의해 상처받으면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모순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2. 진짜/가짜 구분을 뛰어넘는 페미니즘‘들’을 바라보기
소설 『붕대 감기』는 단순히 여성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같음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에 언제든 붕대를 감아줄 준비와, 기꺼이 다름으로부터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들 간의 관계 맺기에 관한 섬세한 묘사에 가깝다. 이들의 서사 속에는 여러 페미니즘 의제가 등장한다. 불법 촬영의 피해자인 친구를 제대로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불법 촬영 규탄시위에 나가게 된 지현, 시크릿쥬쥬보다는 터닝메카드를 더 좋아하는 진경의 딸 율아, 남편과 이혼 후 여러 남자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에 휩싸여 건강을 잃은 진경의 선배 윤슬,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고 선배 명옥에게 ‘가족구성권’을 이야기하며 함께 살자고 제안한 효령, 바람피운 아버지를 보고 자라 비혼을 선언한 명옥의 딸 형은까지.
이 페미니즘‘들’은 그러나 완전히 같지 않다. 『붕대 감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다르게 경험한 삶의 굴절을 해석해낼 수 있는 페미니즘은 모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살아왔다는 하나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페미니즘으로 가지를 뻗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기 분열을 겪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지현은 불법 촬영 규탄시위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곳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의제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미용사인 자신은 남을 꾸미고 가꿔주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는데, 그런 자신이 탈코르셋 운동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괴로움을 느낀다. 형은은 친했던 선배 채이가 성범죄를 고발했을 때 제대로 그의 편에 서주지 않는 여성주의 운동 선배인 선생님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며 채이와도 작은 다툼을 벌인다. 이처럼 페미니즘의 언어가 어느 순간 소중한 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가 될 때, 『붕대 감기』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페미니즘인가?”를 독자들이 스스로 묻게끔 한다.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페미니즘은 답이 정해진 문제가 된다. 정답으로 설정된 틀 안에서 페미니즘의 언어는 제한적이다. 다른 모습을 포용하기 어려워지고, ‘우리’와 ‘그들’을 구별 지어 서로 간의 연결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는 『붕대 감기』 안에서도, 현재를 사는 여성들의 관계 맺기 속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하나의 진짜 페미니즘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페미니즘‘들’이 경합하고 만나는 과정을 자주 어그러트리기 때문이다. 진짜/가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날이 선 말들은 나를, 너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을 아프게 공격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상처와 분열은 역설적으로 다시 페미니즘에 수렴된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다름과 간극을 마주하고, 아플 것이 두렵지만 기꺼이 그를 감수하며 또 다른 페미니즘‘들’에 조우하려 하는 과정 자체가 용기 있게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넘어선, 복수의 다른 목소리로 이루어진 페미니즘‘들’의 합집합은 궁극적으로 여성연대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붕대 감기』는 보여주려 한다.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154~155쪽)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156쪽)
주인공 진경과 세연은 상상 속에서 서로에게 이렇게 전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두 사람은 이따금 의지하고 싶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되자고 말하며 앞으로 둘의 느슨한 연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 느슨한 연대는 서로에 대한 따뜻한 시선, 애정, 연민과 존경을 바탕에 두고 있다. 둘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 붕대를 감아주던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어쩌면 이 바보 같은 아이를 평생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던 어린 진경의 속마음은 20년의 세월을 지나, 서로 다른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인 채 말이다.
3. 새로운 여성들의 세계 속 결국은 이어질 우리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나의 피해와 고통이 나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니며, 나만의 경험도 아님을, 함께 싸울 때 삶이 나아질 수 있음을 실험하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말하고 싸우고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시공간과 세계를 만들어낸다(김보명 2020: 13).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구성된 세계가 균일한 언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격렬하게 부딪히며 공존하는 다른 페미니즘‘들’이 함께 구축한 이 세계는 가부장제, 여성혐오, 젠더폭력 등과 같은 더 크고 견고한 사회 문제에 저항하면서 자신만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러나 때로 여성들은 이 흐름 속에서 기존의 거대 담론을 쉽게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차마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 다른 입장을 이 세계 내부에서 마주쳤을 때 (당연하게도) 지치고, 분열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럴 때 『붕대 감기』는 여성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위로가 된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불안, 불확실성에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든 서로의 용기이자 기댈 구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198쪽)는 저자 윤이형의 자기 고백은 이 소설이 왜 이다지도 복잡한 주제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 꿈 덕분에, 나를 포함한 이 책의 독자들은 붕대처럼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다시 새로운 여성들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울림을 내게 전하고자 했던 오랜 친구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우리 사이의 다름’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해보지 않겠느냐는 아주 애정 어린 권유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 요청에 이 글로 잘 대답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이 상냥한 아이를 어쩌면 평생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 문헌
- 윤이형(2020). 『붕대 감기』. 파주: 작가정신.
- 김보명(2020). “페미니즘, ‘사회적인 것’의 위기를 향한 응답”, 『문학과 사회』, 제33권 1호, 5-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