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기꺼이 모순(paradox)을 택하기

지윤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제이 옮김,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현실문화, 2020)
표지 이미지

페미니스트 객관성과 모순들

흔히 ‘모순’이라는 말은 어떤 사실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두 사실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모순적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으로서 신빙성을 잃고 쉽게 기각된다. 그런데 모순을 뜻하는 영어 ‘paradox’의 어원을 살펴보면 ‘para-’는 옆의, 나란히, 이웃이라는 의미를, ‘doxa’는 의견, 믿음을 의미한다. ‘의견과 믿음들의 병렬’이라고 해석한다면 모순(paradox)이라는 말은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페미니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해러웨이(2002)는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과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학설들을 비판하며, ‘상황적 지식들(situated knowledges)’을 제안한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체현적인(embodied) 앎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동시에 바라보며 총체적이고도 투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관점, 그럼으로써 절대적인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견이 동등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상대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상대주의는 객관성의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각”(해러웨이, 2002: 343)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소재 파악이 불가능한 장소에서 동등하게, 완전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해러웨이, 2002: 343)이다. “오직 부분적인 시각만이 객관적 시력을 약속”(해러웨이, 2002: 341)하므로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지식들은 곧 체현적 객관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문자 지식을 통해 하나의 초월적인 진리를 획득하겠다는 것은 이미 낡아버린 다짐이다. 상황적 지식들은 패러독스를, 그리고 복수(plurality)의 진리들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모순으로 쓰이고, 모순으로 완성되는 글

그런 점에서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은 온통 모순들로 점철되어 있다. 비단 그가 ‘시골’로 일컬어지는 오리건주에서 나고 자라 도시로 떠나온, 노동계급과 중산층 사이 어딘가에 있는 ‘혼합계급(mixed-class)’ 출신의, 백인 퀴어/장애인/페미니스트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적극적인 ‘패러-독스(para-dox)’를 통해 글을 풀어나간다. 다시 말해 하나의 사건과 경험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펼쳐 보이며 쉽게 내려지지 않는 답을 찾아 나선다.

가령 그는 개벌 벌목은 범죄라고 생각하면서도 개벌이 진행 중이던 국유림에서 나무를 베고 목재를 다듬는 게 행복했던 어린아이 시절을 동시에 떠올린다.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오리건주의 개벌 문제를 두고, 이에 항의하는 환경 보호주의자들과 벌목을 통해 생계를 겨우 꾸려나갈 수 있는 벌목노동자들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개벌 벌목을 단순히 환경단체와 벌목노동자들 간의 싸움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익을 앞세워 환경 파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그것 아래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뒤쫓을 것을 요청한다.

도시의 중산층 퀴어 활동가들이 ‘레드넥(redneck)’[1]이라는 말로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이며 동성애자를 폭행하는 자를 일컬을 때, 또는 계급차별주의를 제외한 모든 유형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신념과 동의어로 쓸 때, 클레어는 레드넥이라고 불릴 법한 그의 가족공동체, 이웃공동체의 맥락들을 떠올린다. 클레어의 고향은 어디에 누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훤히 알 만큼 익명성이 결여된 공간이었다. 레즈비언 커플이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일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웃공동체에는 서로 지켜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이 선을 지킴으로써 클레어의 암묵적인 퀴어함과 이웃공동체의 묵시적인 받아들임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졌다. 도시의 중산층 퀴어 활동가들은 이를 두고 그저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2]의 일환으로만 생각해버릴 테지만, 클레어에게는 이것이 진보적인 중산층 이성애자들의 퀴어 비가시화보다 나은 선택지다. 뿐만 아니라 클레어는 “여름날 바깥에서 나무를 베고, 어망을 잡아끌고, 건초를 묶으며 긴 시간 일을 하느라 벌게진”(클레어, 2020: 57) 시골 하층계급 남성들의 목덜미(‘레드넥’)가 자신의 부치 성향(butchness)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1] 시골 하층계급 백인 남성을 낮잡아 부르는 말 
[2] 미국 국방부 지침으로 시행된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ADT)’ 정책은 동성애가 군의 사기와 기강을 떨어뜨린다는 핑계로 군 복무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소수자인 것을 밝히거나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정책은 스스로 밝히지 않는 성소수자는 차별하거나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여 명목상 성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인 양 포장되었지만, 사실상 성소수자 군인이 부당한 차별을 겪었을 때 그것을 당사자 탓으로 돌리는 악명 높은 성소수자 대상 정책이다. (클레어, 2020: 88)

‘프릭(freak)’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클레어는 프릭 쇼가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기대어 ‘정상’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구성했지만, 프릭으로 일했던 사람들을 단순하게 착취당한 입장만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공연자들과 사업가는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편 프릭 쇼의 관객인 ‘시골뜨기’들은 공연자와 사업가들에 의해 속고 터무니없는 티켓값을 내면서 착취당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프릭 쇼를 통해 자신들의 비장애인성/백인성, 결국에는 ‘정상성’을 확인하며 다시금 주체화되는 과정에서 행복해하는 것은, 과연 누가 누구의 무엇을 착취한 결과인가를 묻게 한다. “착취에 관한 문제들은 복잡하게 얽혀있다.”(클레어, 2020: 166)

모순으로서의 망명과 자긍심, 그리고 “‘세계’-여행”

클레어는 이 모든 것을 통해 ‘망명하여 사는 것’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학대, 비장애 중심주의, 트랜스 혐오, 동성애 혐오가 그의 몸을 도둑질한 이후, 그는 골절된 뼈가 다시 붙고 도둑맞은 몸을 되찾는 망명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 망명은 “상실의 의미뿐만 아니라, 뒤에 남겨두고 온 장소에 대한 애정 어린 소속감과 연결감의 의미도 품고 있다─그것이 아무리 양가적인 것이라 해도 말이다.”(클레어, 2020: 92)

되찾은 자신의 몸에 관해 쓰는 클레어는 이렇게 복합적으로 뒤얽힌 망명을 자긍심과 기쁨으로 쉽게 끝내버리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프릭과 같이 특정한 방식으로 소수자들을 범주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소수자들 스스로의 삶을 정의하기 위해 자긍심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수자 자긍심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자신의 내면화된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섬으로써 가능하다. 자긍심은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자긍심이 되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쓰라림이 된다. 망명과 자긍심은 어디까지나 단순하지 않은, 복수의 의미를 갖는 모순(paradox)으로서만 존재한다.

나는 망명자로서의 클레어에게서, “‘세계’-여행자”(Lugones, 1990)로서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계’-여행(‘world’-traveling)”이란 “다른 이들의 입장과 복수적 맥락에서 상상할 수 있는 유연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연습”(정연보, 2013: 74)이다. 이러한 ‘세계’는 “자신 혹은 타자가 위치한 다양한 사회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뜻하는 것으로 “상황적 지식들”의 위치성의 의미와 연동”(정연보, 2013: 74)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세계’를 이동하고 망명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다중적이고 복수적인 정체성은 주류적 질서가 가리고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여러 차이를 입체적으로 보는 능력을 갖춘다. 글로리아 안잘두아는 주류 질서에서 안락하게 사는 이들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연습을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정연보, 2013: 74).

물론 어쩔 수 없이 “‘세계’-여행”을 하게 된 피억압자/소수자들의 관점은 무시되거나 과소평가 되기 쉬운 만큼 낭만화·일반화되기도 쉽다. 그러나 망명자 혹은 “‘세계’-여행자” 정체성은 복수성을 가짐으로써 단일하지도 않고, 한곳에 정박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러한 위험을 피하게 한다.

예컨대 퀴어와 장애의 관계를 살펴볼 때, 퀴어들은 그들의 퀴어성이 병리화되는 맥락 위에서 그것이 질병이나 장애가 아님을 주장하며 질병과 장애를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의미화하였다. 한편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이기를 강요받거나 기대되는 ‘탈성애화(desexualization)’(Eunjung Kim, 2011; 전혜은, 2018: 42에서 재인용) 하에 위치지어지는 것에 맞서기 위해, 장애인 역시 이성애적 성적 욕구를 가진 존재임을 부각한다. 이 과정에서 이성애규범성과 유성애중심주의를 강화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서 퀴어인 장애인들, 특히 에이젠더 혹은 에이섹슈얼인 장애인들은 또다시 주변화된다. 이때 “‘세계’-여행”은 퀴어성이 장애가 아님을 주장하는 퀴어 집단과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가 아님을 주장하는 장애인 집단이 갈등을 겪게끔 하는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끔 하는 유용한 인식론이 되어준다. 즉 “‘세계’-여행”은, 정상성(normalcy)이라는 것이 퀴어와 장애에게 공통된 억압으로서 작동하고 “이것에 맞서는 싸움은 어느 하나의 위치에서 완벽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전혜은, 2018: 63)을 알려줄 수 있다. 이로써 퀴어와 장애의 ‘비정상성’은 “연대의 가능성과 방법을 모색할 출발점”(전혜은, 2018: 32)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클레어가 서로 대립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패러독스들을 기꺼이 보여줌으로써 결코 쉬운 답을 내리지 않는 여정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망명과 자긍심』은 부분적 사유, 상황적 지식들 간의 대화와 연대를 가능케 하는 “‘세계’-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참고문헌

  • 다나 해러웨이(2002), 「상황적 지식들」,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동문선.
  • 일라이 클레어(2020),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역, 현실문화연구.
  • 전혜은(2018),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이연.
  • 정연보(2013),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상황적 지식들’의 재구성을 위하여 – 파편화된 부분성에서 연대의 부분성으로」, 『한국여성철학』, Vol.19.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망명과 자긍심』: 기꺼이 모순(paradox)을 택하기”의 2개의 생각

  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중한 글 감사해요! 그런데, 전혜은 선생님의 글이 2020년 글인가요? 제가 알기론 여이연에서 2018년에 책을 발간하신 걸로 아는데 혹시 참고문헌 표기가 잘못 되었나 싶어서요 🙂

    좋아요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