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쥐

“이 지역(방리유)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식민화된 사람들’로 느껴요. 그들은 외부의 지배적인 인식이나 범주에 의해 정의되죠. 그들은 이 인식을 내재화하고 사회에서 받는 대우때문에 현실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단절은 ‘식민주의적 파괴’에 의해 생겨납니다… 식민화된 사람들, ‘민감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정치적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요. 그들 스스로 시민이라고 느끼질 못하죠.”
프랑스 도시사회학자 디디에 라페이로니(Didier Lapeyronnie), 2005
1. 역사/기억 전쟁이 불러온 ‘원주민 정체성’
영국의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은 백인, 흑인과 같이 자연스러운 범주처럼 보이는 인종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했다. 인종은 말해지고 만들어지는 맥락과 정치적 상황이 있으며, 때때로 그것에 대항하고자 어떤 정체성은 생겨나기도 망각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는 ‘원주민(indigènes)’이라는 낯선 정체성 하나가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홀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원주민’ 역시 우연히 혹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정체성은 90년대 이후로 축적된 이민자 혐오와 2001년 9/11,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 영미권에서 넘어온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지적환경 속에서 구성되며 말해졌다.
‘원주민’이라는 말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한 단체에서 나왔다. 단체의 구성원들은 온전한 권리를 누리는 시민과 대비된 “원주민”의 위치에 스스로를 놓고, 단체의 이름을 “공화국의 원주민들(les Indigènes de la République)”로 불렀다. 원주민은 침략자의 시선에서 식민지를 삼으려는 지역의 주민들을 일컫는 말이다. 같은 제국의 일원이었음에도 프랑스의 피식민지인들은 원주민이 갖는 ‘차이들’, 생김새, 피부색깔, 종교 등을 이유로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다. 20005년 탄생한 이 단체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의 원주민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현대 프랑스에서 시민이 되지 못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원주민’이 여전히 같은 사회 안에 숨 쉬고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주민을 사회 밖으로 추방하고자 하는 권력의 기저에는 그들이 공동체 및 공동체의 가치와 이질적이며 국가안보에 위험한 존재라는 사회적, 정치적 판단에 기인하고 있다. 2001년 9/11 이후 서구 국가들은 언제라도 자국과 자국민을 향해 테러를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려왔다. 종교성에 기반한 ‘과도한’ 정체성과 특정 집단이 서구에 대한 불만과 극단적인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2000년대 서구는 국가안보 테제로 접어들었으며, 국가가 맡은 최우선의 임무는 자국 내 이민자들(과 그의 후손)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문제아’로 지적받는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 과거 프랑스의 구식민지였던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출신이라는 사실은 국가 주체와 이민자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민제도를 이용했다는 경제적인 관점을 뛰어 넘는다. 2004년 히잡금지법에 이어 ‘2005년 2월 23일 법’은 프랑스가 국가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식민지배의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법에 따르면, 프랑스 주권 아래 놓였던 지역, 알제리, 튀니지,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프랑스의 ‘과업’에 참여한 여성과 남성들의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더 큰 반발은 제4조에서 나왔다. “학교 교과과정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가 수행한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민자들의 존재와 정체성이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에 위배된다는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이 법은 이민 2~3세대들을 표적으로 삼았음이 명백했다. 이 법은 우회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이민 2~3세대들이 마음속의 ‘고향’을 떠나보내고 ‘프랑스식’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했다. 이전부터 파농, 메미, 세자르 등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식민주의를 식민지의 독립 이후 종식된 이데올로기가 아닌, 지식인/정치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있는 하나의 권력형태임을 폭로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지식 장에서의 변화를 넘어섰다. 2000년대 초 커다란 사회적 변동 앞에서 이제는 이민자들이 자신의 차별을 ‘프랑스 공화국의 식민성’과 식민구조(colonial mechanism)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단체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의 이민자들 모두가 스스로를 동일한 위치와 정체성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정체성 고민 없이 살아오던 이민자들이 부모의 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반면, 어떤 이민자들은 자신을 피식민인이나 원주민의 신분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다. 사학자 베르트랭(Romain Bertrand)은 식민주의로 현대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기엔 부족한 이론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민자를 ‘이등시민’의 위치로 정의 내리는 프레이밍은 이민자들에게 무력함을 선사할 수 있으며, 이민자들의 권리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한 역사를 갖고 새로운 기억을 창출해내려는 국가와 식민지 경험/기억을 뺏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략 프랑스 인구의 10%를 차지한다고 알려진 무슬림 이민자들은 ‘식민지배의 역사’를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들을 ‘원주민’이라고 정체화한 이들이 프랑스 공화국을 전면으로 비판하며,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둘러싼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 공화국의 원주민들: 우리는 ‘식민지 여성’이다.
[1]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새롭게 만든 신분증에는 얼굴이 없는 한 원주민이 있다. 사진 위 Racaille라는 말은 ‘하층민, 부랑자, 쓰레기’라는 뜻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5년 각지에서 벌어진 소요에 가담한 방리유 남성들을 이 단어로 일컫으면서 ‘이들을 청소기로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발언이 논란을 빚었다.(기사 보기)
2005년 1월 출범한 ‘공화국의 원주민들(Indigènes de la République)’은 “프랑스는 식민국가였고,” “식민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식민국가로 남아있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공화국의 탈식민화”라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영미식 다문화주의를 경계하며 포스트식민 담론이 다문화주의나 문화이론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거부감을 표해왔다[2]. 이러한 문화, 정치적 장에서 이민자 운동가들은 보편주의식 ‘평등’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얻는 식으로 전략을 짜왔다. 그렇기에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수많은 이민자 중심의 단체들은 있었지만, 운동의 슬로건 자체를 ‘탈식민화’로 삼아 프랑스의 ‘평등’ 가치를 신화라고 폭로한 단체는 거의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정체성 정치를 지지하는 많은 이에게 진정성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차이로서 존중되는 것)에는 억압 이전의 시대에 대한 요청이, 또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심지어는 집단학살에 의해 훼손된 문화나 생활방식에 대한 요청이 담겨 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 <정체성 정치>, 전기가오리, p.20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이민자들의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을 도모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모으기 위해 크게 두 주체에 대항한 ‘원주민’ 정체성을 내세웠다. 첫째는 앞서 언급했듯 반이민(자) 노선을 채택한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항한 정체성이었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공립학교 내 히잡 착용을 금지한 일명 ‘2004년 히잡금지법’이 식민지 알제리에서 프랑스 제국의 문명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내렸던 히잡금지령과 동일한 의미를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무슬림 여성의 몸이 ‘고귀한’ 프랑스 공화국 정신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흉하게 바뀌었다”라고 말하며, 식민지기 무슬림 여성과 현재 무슬림 여성이 물화되어 끊임없이 타자로서 재현되는 구조를 비판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식민주의 유산’을 지적했던 ‘원주민’들은 다시금 회복해야하는 기원적인 정체성으로 식민지 여성을 소환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염두해야 할 점은 식민지 여성은 제도와 담론에 의해 사회와 불화된 몸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산물(social body)로서 현재의 무슬림 여성과 조우한다는 것이다. 무시되고 억압받고 지워진 존재들의 역사적 기원과도 같은 ‘식민지 여성’의 경험은 이민자 자신들의 삶을 설명하는 해설지가 되었다. 동시에 식민지 여성(원주민) 정체성은 성차별, 종교차별, 이민자 차별이 겹겹이 얽힌 프랑스 사회를 폭로하고, 부정당한 자신의 기반(ground)에 대해 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체를 상징했다.
다음으로 ‘원주민’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건 다름아닌 이민자들로 구성된 또다른 여성단체였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2004년 조직된 ‘NPNS(Ni putes Ni Soumises)’라는 단체를 유독 경계해왔는데, NPNS 역시 가난한 이민자 여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기구라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공화국의 원주민들’과 NPNS는 이민자 여성들의 집합이라는 점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았다. NPNS는 사회와 무슬림 남성에 의한 이민자 여성의 이중 억압을 폭로하며, 이민자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평등, 자유라는 가치라고 생각했다[3]. NPNS 역시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바탕엔 이민자로서 경험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본토 주류의 페미니즘(Native feminism)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아무리 같은 지향점(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백인 여성’이 이해할 수 없는 구조적 피해자로서 ‘이민자 여성’의 삶은 있다는 것이다.
[3] 단체의 이름을 해석하면 ‘창녀도 복종하는 자도 아닌’이 된다. NPNS라는 단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딜레마에 대해서는 이 글(원문 보기)을 참고할 것.
그렇다고 NPNS이 택한 운동 노선이 포스트 식민주의를 표방했던 이민자들과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NPNS에게 공화국의 이념, 세속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 특히 ‘(서구식)성평등’은 그 자체로 신성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NPNS’는 ‘공화국의 원주민’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인 이민자들이 ‘공화주의 가치’의 끈을 놓지 않고 오히려 보편주의의 신화를 공고히 하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4]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가장 경계하는 페미니스트 단체를 뽑으라고 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조직된 급진주의 여성단체 ‘페멘(FEME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의탈의 퍼포먼스’로 이름을 날린 페멘은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에 대항하는 항의를 보여왔다. 특히 종교를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보아 중동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반종교 퍼포먼스를 벌였다. 페멘은 여성의 ‘가장 ‘자유로운’상태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음(nudity)’으로 보아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을 반대했다. 사진 속 페멘 활동가는 “무슬림 여성들이여, 옷을 벗읍시다”라고 쓰여진 펫말을 들고 있다.(원문 보기)
이처럼 ‘공화국의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NPNS 구성원들이 무슬림이자 이민자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NPNS는 최종지점에서 백인들의 페미니즘과 다르지 않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히잡금지법’에서 입장이 갈렸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2004년 히잡금지법이 식민지/당대 무슬림 여성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식민주의적 기획임과 동시에 여성의 해방을 단일한 것-히잡을 벗은, 가리지 않은-으로 상정한 프랑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인식론적 오류임을 지적했다. 히잡금지법을 적극 지지하는 프랑스 ‘백인’ 페미니스트들과 NPNS의 사고 안에서 이들은 페미니즘의 탈을 쓴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모습을 보았다. 역사 속에서 억압자의 얼굴은 페미니스트이기도 했기에, 페미니즘의 탈식민화를 공화국의 탈식민화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로 지적되었다.
3. 정체성에 기반한 운동전략 짜기: 그러나 누가 ‘원주민’인가?
역사가 핵심 정체성으로 자리잡는 방식은 사람마다 상이하다. 증거는 서사를 위해 채택되기도 한다. 즉 나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증거로서 역사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뜻이다. 바로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당대 사회구조의 모순을 식민주의로 해석하기 위해 역사 속 식민지 여성을 소환했다. 또한 식민지 여성, 원주민이라는 인식은 이민자 2-3세들을 운동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식민지 기억을 부정하는 혹은 ‘원주민’을 대하는 권력의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같은 무슬림’과의 차이는 ‘공화국의 원주민들’을 자극했고, 이러한 차이는 이상적인 운동 주체와 그렇지 못한 운동 주체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또 다른 이상적인 운동 주체는 ‘인종에 대한 의식(race consciousness)’을 넘어 ‘비백인(non-White)’성으로 나아갔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자신이 사회적으로 ‘여성’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듯,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인종이란 범주가 프랑스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들이 보기에 ‘백인(White)’은 이민자 운동에서 급진적인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 한계가 있었다. 운동의 한 핵심 인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기사 보기) 그동안 프랑스에서 반인종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백인’들의 운동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며, 지금 필요한 건 좌/우에 속하지 않고 반-제국, 반-식민 싸움을 하는 것이며 이 싸움을 지속해 나갈 힘은 ‘원주민’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서 백인은 ‘백인성(Whiteness)’인지, 아니면 피부색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원주민’의 고유한 사회적 경험과 정체성의 강조는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페미니스트 학자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가 조직한 단체와의 이질성을 지적한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델피는 2004년 히잡금지법 논란의 물결 속에서 히잡금지법을 반대하며 무슬림 여성의 히잡착용 권리를 주장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보기에 이 단체 역시 ‘백인’들의 조직으로써 ‘진짜’ ‘이주민과 무슬림’들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구성원들 간의 경험적 간극이 존재했다. 비무슬림이 무슬림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그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진 않음에도, 그들과의 연대 가능성까지는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단체 내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은 점점 협소하게 정의되어 갔다. 시간이 지나자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원주민 순혈주의’라는 비판을 벗어나질 못했는데, 원주민만이 참여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 원주민은 포괄적으로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특정한 조건을 가진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몇몇 운동의 구성원들은 백인과의 결혼이 원주민 정체성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핵심 멤버 중 한 명인 베납델라라는 인물은 혼혈을 ‘식민권력의 산물’로 보았고, 혼혈인을 ‘인종의 배신자’, ‘백인권력의 무기’로 칭했다[5]. 단체 내 누가 제일 인종적으로 ‘소수자’인지 가려내는 듯한 모습들이 포착되면서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그들이 세운 대의, 즉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그들 스스로가 다시 인종의 위계 속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5] “공화국의 원주민들”에서 드러나는 ‘원주민 순혈주의’와 혼혈에 관한 입장은 다음 논문을 참고하였다. 김태수(2015). “사회운동으로서의 포스트식민주의: 프랑스의 ‘공화국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13권 2호.
정체성 정치는 정치화의 도구이자 내부자의 결집을 도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원주민이라는 정체성과 그에 기반한 운동은 프랑스를 지탱하는 공화주의 신화를 의심함으로써 본토 프랑스인들(백인 기득권층이라 불리는)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이 외부자를 끊임없이 만듦으로써 구성될 때, 내부자로 명명되는 정체성은 자연화된 존재로 물화될 위험에 노출된다. 백인과 결혼한 무슬림, 비종교인, 유대인, 부유한 이민자는 원주민이 될 수 없을까? 소수자 속에 소수자를 나눠 ‘시민권’을 부여/박탈한 프랑스 제국의 모습과 어딘가 묘한 기시감이 든다.
‘진정한’ 원주민의 요소로 언급되었던 ‘피부색, 내셔널리티, 종교’는 프랑스 제국이 ‘원주민’들에게 부여하려 했던 정체성의 표식들이었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은 인종개념이 비과학적이며 통치의 수단으로 발명된 범주라는 것을 명백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인종에 대한 의식을 꺼낸 이유는 인종이란 범주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인종차별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사회와 국가에 대한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경험에 대한 스콧의 제언이 떠오른다. 스콧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진실된 증거로서 ‘경험’을 계속 찾는 것이 기존 인식론적의 틀 속에 머물게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경험’은 중요하다. 나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낼 하나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특히 억압의 경험을 말할 때, 경험을 만든 구조와 권력관계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경험을 단지 너와 나의 ‘다름’의 표식으로 삼는다면, 경험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또 다른 배제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여러 비판은 다시금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그럼에도 운동을 해나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식민주의나 인종주의의 틀로 사회를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미 여성해방은 이루어졌다’는 포스트페미니즘과 같이, ‘이미 사회는 인종 범주를 고려하지 않는다’,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인종주의가 한 사회의 헤게모니적 담론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인종의 차이로 지배의 논리를 구축해갔던 식민주의는 종식되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의 잔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식민주의를 당대의 시대이념으로 내세운 ‘공화국의 원주민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간절하다. 프랑스는 어떤 기준으로 ‘원주민’을 만들어왔는지, 과거 식민지 여성과 현대 무슬림 여성을 동일하게 바라보는 권력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함으로써, 그들이 최초에 가졌던 문제의식과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 Heyes, Cressida. (2018). Identity Polit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강은교 옮김(2020), 『정체성 정치』, 전기가오리.
- 김용우. (2012). “식민주의의 부메랑과 역사학 -프랑스 2005년 ‘2월 23일 법’을 둘러싼 논쟁”, 『서양사론』, 115호.
- 김태수. (2015). “사회운동으로서의 포스트식민주의: 프랑스의 ‘공화국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13권 2호.
- Lapeyronnie, Didier. (2005) ‘La banlieue comme théâtre colonial, ou la fracture coloniale dans les quartiers’, in P. Blanchard, N. Bancel, and S. Lemaire (eds) La Fracture coloniale: la société française au prisme de l’héritage colonial, Paris: La Découverte.
- Scott, Joan W. (1991), “Experience”, Critical Inquiry, 17(4).
- Stam, Rovert, Shohat, Ella. (2012), “French intellectual and postcolonial”, Interventions: International Journal of Postcolonial Studies, 14(1).
- Izambert, Caroline, Guillivert, Paul, Wahnich, Sophie (2015), “Revendiquer un monde décolonial, Entretien avec Houria Bouteldja”, Vacarme, 71.
간단히 생각하면 ‘바람직한’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을 타자화하지 않는 정체성이겠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결국 정체성 정치는 이분법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체성 정치에 대한 현재의 논의에 대해 배울 것이 많은 글이었습니다.
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어느 일본 방송에서 한 패널이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조선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군대에 끌려가는 걸 보고만 있었는가?’라는 식의 말을 하더라구요. 오류로 점철되었지만 ‘식민주의’와 ‘남성성’을 가장 잘 축약한 문장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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