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노동시간 단축이 간과한 중년 여성의 삶과 노동 (2)

이소진

* 본고는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표준노동시간 단축이 중년여성의 일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 – B대형마트 캐셔를 중심으로” 연구와 그에 대한 필자의 소회를 다룬다.

4.

노동시간 단축은 언제나 경제계든 노동계든 임금에서 시작해 임금으로 끝난다. 재계와 노동계는 원래 항상 치고받고 싸우지만, 노동시간 단축에서는 늘 한목소리로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흔치 않게 두 팀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계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해 창출되는 새로운 일자리에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존 인력으로 더 오래 일하게 만드는 것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노동계 또한 마찬가지다. 기본급이 낮은 기형적인 구조로 인해 잔업(추가 노동)으로 임금의 부족분을 채워왔기에 잔업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다. 그들은 1시간을 더 일하고 충분한 생계임금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B 대형마트 노조의 생각도 그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임금을 줄이려는 꼼수가 맞기도 했다. 시행 첫해에는 8시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7시간 임금을 계산하여 지급했지만, 언제까지 자본가의 아량을 기대할 수는 없다. 8시간 근무 당시 존재했던 추가 노동이 사라지면서 각종 수당도 함께 사라져 실질 임금이 감소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중년여성 노동자들은 사실 1시간의 임금보다는 1시간의 휴식이 더 좋다고 답했다. 인터뷰 참여자 중에서 다시 8시간 노동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노동자는 한 분이었다.[1] 나머지 분들은 한 시간이라도 더 쉬어보니 혹사당했던 몸이 느껴진다며 다시 돌아가기는 싫다고 말했다.

[1] 이 문장이 중년여성 노동자에게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 임금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연구를 하면서도 이 부분을 쓰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이 글은 노동자에게 임금보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글이 아니다. 나는 중년여성 노동사업장에서 만연한 저임금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못지않게 그들에게 주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간과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통제권 또한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맥락에서 강조점을 두고자 하였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서 임금만을 문제시하는 것은 남성중심적 시각이다.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1시간의 추가 노동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집에서 노느니 돈을 한 시간이라도 더 벌고 싶을 수 있다). 집은 그들에게 휴식의 장소지 노동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살림을 살아야 해서, 가족 구성원을 위한 돌봄노동을 수행해야 하므로 일터에서 줄어든 1시간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몸을 뉠 시간을 그제야 갖게 될 수도 있다. 남들에게는 고작인 시간이 고작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B 대형마트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 감소가 아닌 노동 준비 시간 단축으로 인한 노동강도 강화와 사회적 시간의 소멸이다. 여기에서 노동강도 강화는 단순히 시행 이전보다 노동의 강도가, 노동으로 인한 피로가 강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노동환경의 변화, 그로 인한 생활시간의 변화를 모두 포괄한다.

시간의 길이에만 집중한 노동시간 단축은 기존 임금의 부족분을 채우고 있었던 사회적 자본을 해체하고, 일터를 넘어서 생활시간의 배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잃어버린 것은 임금뿐만이 아니다. 임금과 노동강도의 측면에서만 분석하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중년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특수한 사회적 맥락과 그들의 노동 과정을 지운다. 이러한 은폐는 그들에게 있어서 노동 현장이 구성한 사회적 자본[2]을 포착할 수 없도록 하기에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임금만을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관점에서 나아가 중년 여성이 갖는 일의 의미와 삶의 맥락을 포괄한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순히 생산의 단위로, 임금의 단위로 바라보던 생산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이제는 노동자들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2] 중년여성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터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터가 노동시장을 이탈한 경험이 있었던 그녀들에게 사회적 성원으로서의 멤버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년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 간의 계모임 등을 통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며, 이를 통하여 사회적 자본을 형성한다.

5.

가끔 엄마는 나에게 노동법을 상담한다. 엄마의 질문은 언제나 똑같다. “이거 불법 아니야?” 그리고 나의 대답도 언제나 거의 똑같다. “불법인데?”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아줌마들을 깔아뭉개는 말들을 죄책감 없이 하는 회사 간부들에게 매우 분노했다. 이어 아주 뻔뻔하게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면서 윽박지르고, 협박하면서 합법인 양 사기를 치는 간부들에게 격노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 일들을 너무 자주 들어서, 그리고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B 대형마트는 대기업 계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사업장에 속한다. 중년 기혼여성이 일할 수 있는 사업장의 대부분은 불만을 듣고 해결하는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으며, 300인 미만이기에 여러 가지 노동법을 피해간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일하지 못하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회사 또한 이러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무기로 폭력을 행사한다.

참여관찰을 하던 당시, 나는 이러한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고객은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친절했지만 아닌 경우도 있었다. 반말하는 경우도 있었고, 나에게 카드를 던지고 행패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한번은 어떤 어린이가 카트에 앉아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공부 안 하면 저런 거 하는 거야?” 물론 여기서 ‘저런 거’는 ‘물건을 계산하는 나’를 지시하는 용어였다. 그 엄마는 “응 저런 거 하면서 사는 거야.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당시 나는 위장 취업 중이었고,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첫 번째 지위는 연구자였기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나이기에 괜찮을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일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가 사회에서 당한 노골적이고 차별적이면서 동시에 혐오적인 폭력이었기 때문이리라.

블루칼라 중년여성 노동자는 늘 그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여성 집중 사업장 중에서도 중년여성 집중 사업장은 가장 폭력적이다. 급격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이 여성들은 (과거의) 폭력적인 노동환경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유순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을 만큼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안전하다(고 여겨진다). 이 여성들은 돈을 벌어야만 하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고, 남성 관리자에게 대들지도 못한다고 여겨진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여성들이지만, 생계부양자는 아니기에 임금을 높게 지급할 필요도 없다. 착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실제 내가 만나 본 그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들은 누구보다 똑똑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세상의 시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노동시장은 왜 중년여성을 그런 스테레오타입으로 인식하는지, 노동시장의 남성 중심성은 그녀들의 노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남성 중심성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중년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3]

[3] 본 연구는 나 혼자만 진행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B 대형마트 노동자와 B 대형마트 노조, 나에게 언제나 큰 가르침을 주신 김은실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늘 나의 논문에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참여자였던 엄마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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