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SF 함께 읽기] 5회_윤이형, 「대니」 & 「굿바이」 / 김초엽, 「관내분실」

(왼)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표지 이미지

[페미니즘 SF 함께 읽기] : 페미니즘 SF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독서모임입니다. Fwd 필진 일부가 비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토론을 정리해 공유합니다. 격월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페미니즘 SF 함께 읽기 다섯 번째 모임은 ‘모성’을 주제로 세 개의 단편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윤이형의 「대니」와 「굿바이」, 김초엽의 「관내분실」은 각각 다른 배경과 인물, 서사를 통해 전개되는 작품이지만, 모두 모성과 돌봄, 몸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대니」는 아이돌봄에 특화된 인공지능 로봇 ‘대니’와, 손자녀를 돌보며 간신히 삶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이 서로 관계맺으며 경험하는 것들을 그려나갑니다. 이어지는 단편 「굿바이」는 평등한 사회 건설을 위해 원래의 몸을 버리고 화성으로 건너간 이의 이야기와, 여전히 육체의 제약 속에서 삶을 지속해나가는 이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그리고 「관내분실」에서는 엄마의 생전 모든 정보를 기록한 마인드맵스가 관내분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이를 되찾기 위해 엄마의 물건들을 찾고, 읽어내는 과정에서 결국은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딸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번 대담에서는 세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돌봄과 모성, 그리고 몸의 문제에 접근하는 각각의 다른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 대담 내용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1. 「대니」—노년의 돌봄, 이를 둘러싼 관계들

미현: 윤이형의 「대니」와 「굿바이」는 모두 『러브 레플리카』라는 단편집에 실린 작품이죠. 우선 「대니」에 대한 생각부터 얘기해 볼까요?

유진: 아이를 돌보는 돌봄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흔히 아이, 특히 손자녀를 돌보는 것이 할머니들에게는 기꺼운 일, 노동이 아닌 일처럼 이야기되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게 사실은 삶을 가까스로 견디는 것에 가깝다는 걸 처절하게 보여주잖아요. 그 부분이 좋으면서도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미현: 맞아요. 유진이 말한 것처럼 노년의 돌봄을 이야기할 때, 조부모들이 손자돌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그게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원자녀에 대한 의무나 책임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동시에 대니가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각이 연민과 동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점도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할머니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한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사실 돌봄이나 노동이라는 것은 한가지만으로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측면들이 있으니까요. 

만두: 돌봄대상의 요구를 파악하는 데에 특출나게 설계된 돌봄 기능 특화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다는 흔한 상상이 있는데요. 대니가 그런 발상의 결과물이겠죠? 그런 발상은 돌봄이 돌봄수행자가 대상자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일로서 단편적으로 여겨지는 데서 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돌봄은 본질적으로 수행자와 대상자, 그리고 그 주변 환경과의 복잡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단순한 ‘기능’으로 분리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돌봄의 그런 측면들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이건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요즘 코로나19 대책으로 원격 기술을 이용하는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에 막대한 자본을 투여한다고도 하잖아요. 저는 그게 실현불가능한 대책이고, 사실 그 대책을 세우는 사람들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돌봄 현장 안의 복잡한 면면들을 들여다보기 싫으니 기술에 대한 환상에 의지하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현: 만두는 이 소설에서 어떤 부분이 복잡한 관계망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만두: 민우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이 딸과의 관계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거든요? 여행을 같이 가고 싶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직접적인 돌봄 당사자 사이의 감정 문제도 있지만, 실은 그 주변을 둘러싼 친밀한 관계들 때문에 돌봄이 더 복잡해지는 거잖아요.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할머니의 감정에 몰입을 하다 보니 자꾸 딸을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 사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딸의 상황도 납득할만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한 번 읽었을 때는 딸을 미워했다가, 다시 읽으면서는 나는 왜 딸을 미워했을까 돌아보고. 

낑깡: 저도 의심했어요. 어떻게 일주일 중에 5일동안 할머니에게 맡겨놓을 수 있지, 하는 생각에요. 딸이 ‘망설임없이 돌아섰다’ 같은 서술들에 할머니의 입장에 더 이입하게 만들었던 것같아요.

유진: 주인공이 딸에 대한 큰 부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식을 아빠 없이 크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고, 그 부채감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자식의 자식을 돌봐주는 일이었던 거죠.

미현: 그런데 손자녀 돌봄을 하는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양가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애는 조부모가(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낳아야 한다.” 라고 말하며 자녀들의 결혼과 출산을 권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나 의무감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양육과 돌봄에 얽매인 삶이 스트레스라는 걸 알지만 ‘정상가족’의 인생 곡선이 더욱 나이든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유진: 할머니가 사는 공간은 기술이 크게 발전한 외부에 비해 굉장히 특수한, 옛날의 분위기와 문화를 지키고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잖아요. 동네 외부와 내부 간에 크나큰 공간적, 시간적 격차가 존재하는데, 그게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대니」와 「굿바이」 모두 시간적, 공간적인 격차가 있는 두 영역을 관통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격차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들은 서로 만나고, 교감하고, 다른 가능성을 가진 서사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만두: 영역 간의 시간적 격차가 여전히 있는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에도 경제 영역의 대책은 금방 주목을 받고, 기술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많이 되고. 그런데 정말 시급한 돌봄영역은 그정도로 주목받지 못하잖아요. 사회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아도 이전부터 해 온 사람들, 그것도 사랑으로 맡아 온 사람들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요. 돌봄이 그렇게 가족에게 맡기거나, 혹은 돈을 주고 처리해버릴 수 있는 것으로 양분되어 있는 상황에서 돌보는 사람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 돼요. 민우가 할머니는 불편해하는데 대니에게 안겨서는 울지 않는 걸 할머니가 복잡하게 바라보잖아요. 또 지희는 대니를 함부로 대하면서 물건처럼 자랑하고요. 그런 장면들. 자기를 돌봐주는 이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게 될지. 

오온: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원칙이 어떤 모순에 부딪혀 파열되는지, 로봇이 인간을 어떤 원인에 의해 위협하게 되는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변주하는 가장 클래식한 플롯이란 말이에요. 이러한 종류의 SF에서는 로봇 3원칙이 파열되는 지점이 무엇으로 설정되는지가 중요한데, 이 지점을 돌봄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대니는 자본주의가 만든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생산물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돌봄을 외주화하는 객체적인 존재죠. 그리고 이 돌봄 기능을 철저히 수행하기 위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로봇 3원칙이 깨지게 되잖아요. 보통의 흔한 내러티브에서 로봇 3원칙이 깨지는 이유가 외부적인 개입이라던지 시스템 상의 결함, 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음모와 같은 것들인데, 그게 아니라 이 시스템을 정의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이 원칙을 내재적으로 깨뜨린다는 게 의미심장한 부분인 것 같아요. 물론 제일 처음에 지희네 엄마가 이 시스템에 개입을 하긴 하지만, 지희네 엄마가 개입한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인가, 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거든요. 돌봄을 안드로이드에게 외주화했을 때, 즉 인간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요한 감정이나 상호관계를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이양했을 때 어떻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지는지가 자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죠. 시스템 상의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이 그 정의 상 내재하고 있는 파열의 지점을 지희네 엄마가 가시화시킨 것이었을 뿐이고요. 한편, 지희네 엄마가 어머니 없이 컸다는 설정이 살짝 언급되는데요, 주인공인 여성 노인 역시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그려져요. 이렇게 등장 인물들이 모두 돌봄의 부재라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 역시 작가가 염두해둔 설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2. 「굿바이」와 「관내분실」—모성, 그리고 몸의 문제

미현: 굿바이는 대니보다 좀 더 비관적이고 아린 느낌이 있어요. 관계맺음이나, 주인공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좀더 차갑다는 느낌이지 않았나요?

유진: 저는 오히려 「굿바이」를 보면서 엄청 감동했는데. 

미현: 어떤 점이요?

유진: 「굿바이」 속 세계관은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사회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기술의 혜택을 다 누리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는 신념을 위해 화성으로 가지만 또 누구는 여전히 임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그게 두 주인공의 삶을 통해 대비적으로 보여지죠. “어떤 일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영원한 허구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된다.”라는 문장이 그런 차이의 감각들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화성에 평등한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이 실패하고, 기계 몸으로 지구로 다시 돌아온 ‘그녀’의 옆에 머물러준 건 결국 주인공이었잖아요. ‘그녀’의 육신을 태울 때 옆에서 울어 준 유일한 사람은 주인공이었고, 반대로 주인공이 아이를 출산할 때 옆에서 탯줄을 잘라준 것 역시 ‘그녀’였죠. 숭고한 목표를 갖고 우주로 나갔던 사람의 삶과, 그저그런 속박에 매여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삶이 같이 이야기되고, 특히 육체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둘의 이야기가 만나는 모습이 정말 좋았어요.

만두: 몸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잖아요. 김밥을 계속 집어먹는 장면이라든가. 먹어서 채우고 움직이고 버텨야 하는 실체로서 몸. 주인공은 그런 스스로를 추하게 느끼고요. 그런 몸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의 이야기와 대비되어 몸의 의미가 더 강조되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몸을 중심에 두고 거기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는 선택을 하는 과정들은 서로 긴밀히 얽혀있어요. 아기가 모든 지혜를 갖고 있다가 태어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순간, 몸을 완전히 포기하고 로봇 상태로 살기로 한 사람이 그 탯줄을 끊는게 재미있었거든요. 몸을 갖고 사는 일을 추하게 그리는 건 SF에서 클래식한 묘사인 것 같은데, 이 작품은 그것이 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지 않아서 좋았어요. 

오온: 소설에서 등장하는 두 여성 모두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한 명은 육체의 존재를 되새김질 하면서 살아가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을 끌어내리려 하는 지구의 자본주의, 육체를 담보로 빚을 지게 하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육체를 포기하죠. 어찌보면 극단적으로 다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무엇보다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입장에서 서술된다는게 독특한 지점이었어요.

미현: 저는 왜 뱃속에 있는 태아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한 것인지 궁금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만두: 추리적인 즐거움을 주려고? “먹어치울 것이다”라는 선언에서 사실 저는 섹슈얼한 긴장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화자가 대체 누구고, 어떤 관계인지 알고싶은. 그런데 그게 태아일 때의 아! 하는 충격. 

미현: 아! 주제가 ‘모성’이라는걸 이미 알고 소설을 읽어서 그런 추리적인 재미를 느끼지 못했군요.  화자가 등장하자 마자 주인공의 자녀이거나 태아일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흑.  

낑깡: 화성팀이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삶을 꿈꾸면서 화성으로 출발했잖아요.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죠. 근데 이미 우리는 착취를 통해서 태어났다는 걸 태아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같았어요. 두 서사가 겹쳐지는 지점이죠. 착취가 마치 인간의 본질인 것처럼. 근데 ‘착취’라는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지만, 임신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임신을 착취라고 말하면 논란이 일어나겠죠. 사실 이 문제는 태아의 관점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거죠. 

만두: 그런 점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차일드』와 같이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 태아를 기생 혹은 착취로 이야기 하는것이 폭력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도 해요. 아동혐오가 심한 사회에서 특히. 사실 태아-영유아는 돌봄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잖아요. 

미현: 만두 말에 동의하는데, 폭력성은 양쪽에 모두 있지 않나요? 양육자의 입장에서도 돌봄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로 인한 어떤 감내해야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돌봄이 없으면 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았을 때,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잖아요. 돌봄은 돌봄을 받는 자와 주는 자 모두의 삶을 걸고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만두: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그 관계에 얽힌 또 한 사람인 스파이더가 지구에 남기로 한 선택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이상으로부터 밀려나와서 다수와 구별되는 몸, 혐오받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그리고 그 선택에 타인과의 친밀함이 얽혀 있잖아요. 마지막에 보호자냐는 질문에 맞다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그 선택을 보여줬다고 생각했어요. 그 선택은 탯줄을 목에 감고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임에도 태어나버린, 그리고 어머니가 이미 자신을 사랑함을 깨닫는 태아의 선택과도 연결되죠. 

오온: 이어서 김초엽의 「관내분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관내분실」이 수록된 작품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가 ‘순수한 인간성의 원형’을 찾아 나가는 이야기들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렇다보니 전체적으로 노스탤지어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었달까요.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유진: 결말에서 확 집중이 깨지는 느낌이었어요. 갑자기 왜 엄마를 이해한다고 했을까? 제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저 딸이 임신을 하고 우울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단지 그 공통의 경험 때문에 ‘엄마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오온: 저도 비슷해요. 딸이 엄마를 왜 이해하는지, 어떤 면에서 이해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왜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이해하지? 싶었어요. 이건 작가가 ‘우리’의 공통적인 경험, 예컨대 ‘나’를 낳음으로써 경력이 단절되고 한평생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던 ‘우리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동시대 딸들의 공통 감각을 전제하고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지점이 많은 독자들에게 동감을 이끌어냈던 부분이었을 테구요. 

만두: 그런데 산후우울증을 겪고, 일자리를 잃고, 근데 이런 ‘엄마들’의 경험을 그려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해요. 처녀 때 엄마, 나를 만나지 않았을 때 엄마, 자기 일을 하던 엄마의 일면을 알고 나서 ‘진짜’ 엄마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거. 그건 그 시절 이후의 엄마를 부정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게 임금노동 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흔한 혐오라고 생각해요. 임금노동만이 자아실현이라는 인식을 페미니스트들조차 종종 갖고 있는 듯 하고요. 정말 이해를 말하고자 하면 차라리 빛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 이런 걸 발견하는게 아니라 엄마가 자신이 알던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딸인 자신과의 관계, 그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여줘야하는 것이 아닌지.

미현: 사실 딸이 엄마에게 지니게 되는 감정이 ‘이해’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에 대한 증오와 혐오, 이에 대한 죄책감, 나의 죄책감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 등등이 복잡한 실타래로 엉켜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과거의 삶을 알게 됐을 때에도 여러가지 마음이 들었을 것 같은데, 그 결들을 살피지 않고 같은 ‘엄마’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점만 남는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유진: 엄마와 화해하고 엄마를 이해하는 것이 소위 ‘영영 페미니스트’들의 중요한 숙제 중 하나이기는 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가 죽은 채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이게 현실 속에 살아있는 엄마, 입체적이고 모순적인 인물로서의 엄마랑 화해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이제 과거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라는 단순한 서사 속에서 다루기에는 살아있는 엄마는 너무 입체적인 과제였던 거죠.

모성과 돌봄만큼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오랜 기간 많은 관심을 받아 왔던 주제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됨을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임신하고 낳고 키우는 과정에 집중하되 이를 파편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몸의 문제 역시 그리 간단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쉽게 타자화되고 대상화되어 왔으니까요. 

여성해방을 외치며 몸을 초월하려는 시도와 몸으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시도, 이 둘은 얼핏 보면 상극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페미니즘에 있어 몸이라는 주제가 갖는 필연적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 소설에서 ‘관계들’에 대한 관심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기 쉬운 주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파편화와 단절을 지양하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의 열쇠는 어쩌면 이렇듯 ‘관계들’에 대한 관심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 : 송유진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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