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팬데믹 발생 이후 성교육 활동가로 근무하게 된 나는 학생들의 반응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없는 제한적인 환경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면 현장의 역동들이 마스크 한 장으로 압축되고 소거된 현실은 ‘상실되는 접촉’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불러왔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함께한 교육에서 온라인에서 경험한 혐오표현과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질문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주로 게임을 하면서 들었던 욕설, 유튜버들의 여성혐오발언, 포털사이트 메인 기사에 달린 악플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이 사례들에 느꼈던 감정을 질문했을 때, 학생들은 “실제 얼굴을 봤으면 그런말을 못했을텐데”라는 말과 함께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화가난다”, “불쾌하다”의 답변을 예상했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과 가려진 마스크 속 유일하게 드러난 건조한 눈빛을 보며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인권위의 2019 보고서(국가인권위원회, 2019)에 따르면 70.5%, 10명 중 7명의 청소년들은 혐오표현을 접하고 ‘무시한다’고 답변했다. 응답자 중 82.9%는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으며, 학교(57%), 학원(22.1%), 집(13.1%)이 뒤를 이었다. 온라인 공간은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익명의 캐릭터로 전환하고, 육체를 지닌 물리적인 대상이라는 사실을 비가시화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세계를 넘나드는 현대인들의 공간성과 공동체라는 인식을 단절하는 구조적 요인들이 교차할 때 ‘아무렇지 않은 감각’과 ‘접촉’의 개념은 어떻게 연결되어 해석할 수 있을까.
정희진은 ‘인간은 각기 닿을 수 없는 섬들이지만, 바닷속에서 보면 연결된 땅’이라는 말이 위로를 준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원문 보기). 팬데믹 이후 등장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단절에 대한 인식을 강화했고, 공동체의 연결성과 상호의존이 마치 상실된 것같은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담론은 이제 비대면이 현실과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규범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원문 보기). 비대면 일상이 정말 일상의 규범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비대면이 규범이 된다면 성과 관련된 일련의 경험을 포함하여 타인과의 관계적 측면을 아우르는 포괄적 성교육과는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까? 비대면의 일상은 우리의 어떤 감각을 살리고 죽이는걸까? 비대면으로 드러난 한국사회의 일면은 성교육 현장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상실되는 접촉과 상호 의존성
애슐리 몬터규는 접촉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에도 점점 접촉의 경험을 상실해가는 현대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접촉이 인간의 삶에 기여한 의미들을 제시한다. 접촉 자극은 출생과 동시에 제일 먼저 인간성을 발달시키고 결정하는 감각이다. 애정과 관심, 상호연결 등의 의미는 접촉을 통해 느껴지고 전달된다. 타인과의 불충분한 접촉 경험은 연상 작용의 결핍으로 이어져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다양한 관계를 올바로 수립할 수 없게 만든다. 접촉이 연상시키게 될 의미가 비로소 ‘애정’과 ‘관심’이 되고, 서로를 향한 안정감으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접촉의 “인간적인 의의”이다(몬터규, 2017: 539).
시각과 청각은 타인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아도 활용할 수 있는 감각이다. 시각과 청각을 통한 디지털 감각들만이 강조되는 현실에서 접촉은 내가 아닌 타인의 물리적 존재를 즉각적으로 감지시킨다. 상호적인 접촉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비대면이 중심이 되는 일상은 타인과의 접촉 경험을 제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감각과 상호의존의 개념을 둔화시킨다. 누군가가 누리는 생활의 편의와 일상이 누군가의 노동과 불편함 속에서 제공된다는 사실은 잊혀지고, 편리를 누릴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가치만이 강조된다. 제한되는 접촉 감각은 인간 존재가 상호적인 의존과 영향 속에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가시화한다. 서로간 접촉을 제한하는 현실은 ‘나’를 중심으로 경계를 공유하는 가까운 타인과의 연결성을 중요한 가치로 가져오지만,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인간 그 자체의 존재와 연결점을 비가시화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존재의 연결성과 의존성의 개념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의 뉴노멀을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현실이 상호 의존과 연결성을 어떻게 상상하고 구축해왔는지 먼저 질문해야 한다. 팬데믹 발생 이전 우리는 충분히 ‘연결’되어 있었을까? 더 나아가 ‘연결’을 무엇으로 의미화했을까?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간의 존재를 감각하며 존중하기보다는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존재와 없는 존재들을 분별하며, 범주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향한 폭력을 방관하는 문화를 생산했던 것은 아닐까. 이 현실은 팬데믹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의 일상에 자리하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신자유주의 주체성과 탈맥락화되는 폭력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문제들이 이슈가 되며, 성폭력 예방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작년 한해동안 교육을 진행하며 권력을 만드는 요인들과 위계가 젠더와 교차되며 발생하는 구조적인 폭력을 학생들과 함께 나눴다. 다양한 폭력 사례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무엇이든 아주 쉽게 ‘가해자를 신고한다’고 답한다. 이는 ‘가해자를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의 이야기로 체감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답변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만이 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져 나오는 답변이기도 하다.
교육은 폭력이 일상화되는 맥락과 위계의 개념으로 이것이 젠더의 문제임을 짚어낸다. 이후 우리 모두가 가해자-피해자-동조자-지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 가해자가 되지 않기’와 ‘지지자가 되기 위한 실천’들을 강조한다. 대략 한 두 차시의 시간으로 이러한 개념들이 모두 전달되기는 어렵다. 단회기로 진행되는 교육의 물리적인 한계와 더불어 학생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제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정확히는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명확한 정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맥락에 대한 반성보다 ‘발빠른 해결’에 초점을 두어왔던 문화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어느 날 교육을 나간 초등 학급에서 한 학생이 “몰카를 찍으면 몇 년의 징역형을 받느냐”고 질문하며, “자는 친구를 찍는 것도 처벌을 받느냐”고 물었다. 교육을 진행할수록 학생들은 ‘이러한 사례도 신고할 수 있는지’, ‘이것도 법적 처벌이 되는 사례인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폭력 사건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으로써 법적처벌과 형량에 관한 이슈들은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무엇을 폭력으로 규정할 것이냐’라는 기준의 근거로 학생들은 ‘법적 처벌’을 먼저 떠올렸다.
구조에 대한 비판보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적응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효율의 가치들을 우선시하는 개인들을 재생산한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삶의 규범으로 선택하는 문화는 폭력을 이분법적으로 개념화하고, 폭력행위를 단순히 ‘하지 말자’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위계로 인한 다양한 폭력들은 ‘해야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행위규범으로 연결되고, 행위규범을 판단하는 기준은 ‘법적 처벌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된다. 궁극적으로 관계에 내재하는 권력과 위계, 폭력의 개념들은 탈각되고, 일상적인 차별과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사건 해결을 위한 효율의 가치에 따라 비가시화된다.
디지털 성폭력을 포함한 성폭력예방교육은 폭력과 이를 가르는 규범들을 단선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만연한 성적자기결정권 침범이 폭력으로 연결되는 맥락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일상에 내면화된 폭력문화를 비판하는 것보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폭력을 탈맥락화하는 현실에서는 교육의 목적이 온전하게 전달되기 어렵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법 정의와 중대한 성범죄들이 가볍게 처벌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교육의 목적은 커녕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기준조차 무의미해진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법적처벌조차 매번 미비하게 적용되는 현실에서 구조적인 폭력과 일상적인 차별의 개념들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닿고 있는지 심도있게 고민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팬데믹 현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현실은 개인들간의 분절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삶에 대한 감각과 연결성을 흐리게 만들고, 관계에 내재하는 다양한 위계와 폭력의 문제들을 탈정치화한다. 다양한 위계와 연결된 일상적인 폭력이 자기성찰의 영역에서 탈각되는 현실에서 포괄적 성교육이 지향하는 가치들이 수용되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포괄적 성교육, 경계짓기와 관계맺기
개인의 성장은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자아의 개념은 타인의 존재 없이 기능하지 못한다. 근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아의 발명이다. 타인의 존재는 자아를 이루는 핵심이다. 자아의 개념이 등장하며 신체와 자연, 나와 타인을 경계짓는 이분법적인 인식망이 함께 태동되었다.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기 위한 선과정은 자신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존재를 통해 가능해진다. 상대에 따라 경계를 조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심리적-물리적-정신적 경계를 확인하고, 적당한 거리감 속 경계가 존중받는 경험들이 필요하다. 즉 경계에 대한 감각들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라난다.
포괄적 성교육(CSE)은 여성과 남성의 신체 구조의 차이와 같은 생물학적 특징만 다루는 기존 성교육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생애에서 성과 관련된 모든 경험을 포괄한다. 피임과 섹스에 대한 일차원적인 정보전달을 넘어 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인지하고 타인과의 관계적인 측면을 함께 아우른다. 구조적인 폭력과 권력, 위계의 문제들을 타인과 맺는 일상적인 관계의 측면으로 엮어내어 전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성을 가져온다.
포괄적 성교육의 가치하에 진행되는 다양한 교육은 타인-상황-환경-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신체적·정신적 경계를 감각하고,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폭력에 대한 민감성을 기른다. 이는 각기 다른 차이를 인지하고, 자신의 경계를 인식함으로써 존중과 평등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지속적인 연습의 과정이다. 단회기의 교육을 넘어 이러한 가치와 감수성이 현실에 자리하기 위해 우리를 둘러싼 일상이 상호 연결성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파편적인 지식이 전달되던 기존 교육의 한계를 넘어 포괄적 성교육은 주체와 타자, 관계성의 문제를 통해 성과 관련된 일상의 경험을 포괄한다. 타인의 존재가 없다면 자신의 경계, 주체로서의 권리를 인지해야 할 필요성조차 사라진다. 이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교육으로 타인과의 연결성을 회복하고, 성과 관련된 일련의 경험을 삶의 중심과 연결함으로써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한 감각과 가치들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접촉이 희미해지는 사회, 상호 의존성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사회, 폭력과 위력의 개념이 기계적으로 학습되는 사회에서는 포괄적 성교육이 지향하는 가치들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나의 일상을 조직하고 살아가며 경계를 유지하는 것에 타인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팬데믹 이후 서로간의 물리적인 경계는 확장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공동체로서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고 감각하는 기술과 경험이 역설적으로 다시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포괄적 성교육은 이러한 주체들을 길러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교육이다. 이는 포괄적 성교육이 말하는 가치들이 온전하게 실현되고, 공동체적 감수성과 상호의존성을 지닌 주체들을 만들 수 있는 조건과 환경들을 국가와 시민사회가 얼만큼 마련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접촉을 통한 소통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에서 사라지는 감각과 소통이 무엇으로 대체되고 변화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아가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우리가 이를 변화해나갈 수 있다는 공통의 믿음 하에서 포괄적 성교육의 가치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국가인권위원회(2019). 혐오표현에 대한 청소년 인식조사
- Montagu, Ashley (1971). Touching: The Human Significance of the Skin. Columbia Univ Press. 최로미 역 (2017). 『터칭: 인간 피부의 인류학적 의의』.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