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잇는 교차성 페미니즘 : 흑인과 아시안 페미니스트들의 연대 정치

유지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첫 단계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 제기일 수 있지만,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배 규범에 도전하도록 하는 대안적 인식론이자 그 지배 규범에 맞지 않는 타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관점이다(정희진, 2017). 따라서 페미니즘에서 젠더 외에도 계급이나 인종, 국적, 장애 여부 등 서로 다른 지배 규범의 작용을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며, 이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의 등장과 함께 더욱 강조돼 왔다.

교차성 개념은 한 집단 내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여성 중에서도 유색 인종 여성, 장애인 중에서도 장애 여성 등), 공통된 억압의 축을 드러냄으로써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다른 집단들 사이에 연대를 가능케 하기도 한다. 예컨대 유색 인종 퀴어와 이성애자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 할 때,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인종 차별이 연대할 지점이 되는 식이다(Crenshaw, 1991).

사회 운동에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다양한 이슈에 연대하는 이유가 늘 궁금했던 나는 그 답을 교차성 페미니즘에서 찾았다. 특히 미국에는 다른 인종 간에는 연대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주류 담론이 있는데, 한창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이 논의되고 코로나로 아시안들에 대한 혐오가 격화되던 재작년 여름 흑인과 아시안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서로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세 인권단체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 “흑인-아시안 페미니스트 연대(Black and Asian Feminist Solidarities)”의 활발한 활동이 궁금했던 나는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이들이 주최하는 행사를 참여 관찰하며 민족지 연구를 진행했다.

연대 프로젝트의 시작

“흑인-아시안 페미니스트 연대” 프로젝트는 2020년 4월에 시작됐다. 미국의 코로나 유행이 본격화되던 이 시기, 흑인 페미니스트 단체 Black Women Radicals(BWR, 급진 흑인 여성 모임)의 대표 Jaimee는 뉴욕 시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친구가 아시안 증오 범죄가 두려워 5일 동안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Jaimee는 아시안 증오 범죄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전혀 외출을 하지 못할 정도라는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마침 팔로우하던 아시안 페미니스트 단체 Asian American Feminist Collective(AAFC, 아시안 아메리칸 페미니스트 연합)가 아시안 증오 범죄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을 본 Jaimee는 AAFC에 인스타그램 이벤트 공동 주최를 제안했다.

당시 AAFC 구성원들은 코로나19 사망자 중 높은 흑인 사망자 비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아시안 혐오와 높은 흑인 사망률 모두 백인우월주의적 구조의 단면이라는 데에 동의한 이들은 흔쾌히 Jaimee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팬데믹 시기 흑인-아시안 연대에 관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던 Asian American Writers’ Workshop(AAWW, 아시안 아메리칸 작가 워크숍)가 합류하면서 세 단체의 연대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활동가들은 프로젝트 기간을 2년으로 잡고 그동안 워크샵과 집담회, 온라인 행사를 주최하고 매달 AAWW의 웹 매거진인 <The Margins>(페이지 보기)에 관련 주제로 기고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프로젝트가 시작된 직접적 계기는 코로나19였지만, 그 기저에는 세 단체가 추구하는 교차성 페미니즘이 있었다. Jaimee는 BWR가 교차적이고 초국가적인 페미니스트 정치를 지향한다고 이야기면서 인종을 초월한 연대 가능성을 열어 두라던 흑인 교차성 페미니스트 ‘선배’들의 조언이 BWR의 활동에 주요한 이정표가 됐다고 말한다. AAFC 활동가들 역시 스스로를 교차성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며, 활동하는 데에 있어 아시안이라는 거대한 인종 집단 내에 존재하는 계급, 민족, 출신 국가 등의 차이를 고려하고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AAWW는 직접적으로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아시안 아메리칸 정치를 풀이하는 방식이 AAFC와 같다는 점에서 AAWW의 지향 또한 교차성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었다.

교차성 페미니즘과 연대

교차성 페미니즘의 아이디어는 프로젝트의 시작 뿐만 아니라 내용에도 영향을 줬다. 예를 들어 BWR, AAFC, AAWW의 활동가들은 흑인과 아시안, 그리고 프로젝트에서 연대하고자 하는 다른 소수자들이 공통된 사회 구조로부터 억압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 모두가 백인우월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고, 이러한 억압을 타파하기 위해 흑인과 아시안 페미니스트들이 늘 함께 해왔다는 점은 활동가들이 프로젝트 내내 강조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활동가들이 흑인과 아시안 커뮤니티 간의 유사성만을 부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간의 차이를 다루는 것은 초-인종적 연대를 형성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동일한 사회 구조라도 두 커뮤니티를 억압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한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AAFC와 AAWW에게 아시안 증오 범죄는 중요한 의제였지만, 경찰 폭력이 흑인 커뮤니티를 억압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그 해결 방안으로 경찰 증원이나 특별팀 편성을 제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연대는 곧 자신의 활동이 다른 커뮤니티에 어떤 영향을 줄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차이를 다루는 것은 두 커뮤니티 사이에 존재하는 오해와 적대감을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활동가들은 연대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각각의 커뮤니티로부터 수차례 백래시(backlash)를 받았다. ‘흑인 인권에 관심 없던 아시안들과 협력하는 이유가 뭐냐’ 내지는 ‘늘 흑인들이 인종 문제의 초점이었는데 프로젝트가 또 다시 아시안을 비가시화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흑인-아시안 페미니스트 연대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계속돼 왔으며, 이러한 적대감이 실은 다인종 사회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믿도록 연대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백인우월주의적 사회로부터 비롯된다고 짚었다. 도리어 백래시에 대항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대한다”는 활동가들의 소신은 프로젝트를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교차성 페미니즘에 기반한 정치적 실천은 또한 가장 소외된(marginalized) 이들을 중심에 둔다(Cohen, 1997). 교차성 개념이 맞물려 작동하는 억압의 축을 인식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BWR, AAFC, AAWW의 활동가들 역시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페미니즘이 퀴어, 트랜스, 장애인, 노인, 흑인의 목소리에 특히 힘을 싣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행된 글과 진행된 이벤트에도 성노동자나 유색인종 트랜스 커뮤니티 등 항상 다층적 구조에 영향을 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담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매애(Sisterhood)와 돌봄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에는 교차성 페미니즘만이 프로젝트를 지탱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관찰해보니 교차성 페미니즘만큼이나 활동가들 사이의 자매애와 돌봄이 프로젝트의 주요한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교차성 페미니즘이 프로젝트의 기반이 된 아이디어였다면, 자매애와 돌봄은 그 아이디어를 실천시키는 매개였다.

여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로 정의하는 가부장제는 여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경계하도록 한다(Hooks, 1987). 또한 백인우월주의는 소수 인종들 간에 협력이 어렵다고 믿도록 한다(Ikemoto, 1993).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이처럼 내재화된 가부장적이고 백인우월주의적인 사고를 넘어 자매애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WR과 AAFC의 활동가들 역시 처음 협력하는 사이였던 만큼 서로에 대한 약간의 의심이 있었다. 활동 내용으로 봐서는 정치적 지향이 잘 맞는 듯했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몰랐기에 실제로 연대를 쌓아갈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것이다.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일례로 활동가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화상 통화를 했는데, 와인이나 차 한 잔씩을 들고 자리에 앉아 일과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만을 하자는 규칙을 두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싹튼 우정, 서로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면서 쌓은 신뢰는 활동가들이 “연대는 곧 관계 쌓기”라는 프로젝트의 기조를 몸소 실천하는 방식이 됐다. 연대한다는 것은 단순한 선언이나 ‘좋아요’ 누르기가 아니라, 안부를 묻고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관계를 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처음 공동 주최한 행사 “투쟁하는 자매들(Sisters and Siblings in the Struggle)”의 제목에서도 활동가들이 서로를 자매로 묘사했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쌓으면서 이들은 훅스가 이야기한 자매애 실천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AAFC 활동가 Rachel은 이처럼 돌봄과 우정에 기반한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로 참여하는 단체들의 규모와 성격을 꼽았다. AAFC와 BWR는 모두 페미니스트 담론 형성이나 풀뿌리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단체로, 회원제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 단체들과는 다르게 총 6명의 활동가만이 속해있다. 여기에 AAWW에서도 한 명만이 프로젝트에 주로 참여했기 때문에, 7명이라는 작은 규모로 활동가들 간의 관계 쌓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연대가 미시적인 수준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예정된 2년의 프로젝트 기간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냐는 질문에 활동가들은 지속적인 연대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고 답했는데, 흑인-아시안 연대가 그동안 잘 이야기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 짓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활동가들은 프로젝트에서 흑인과 아시안 페미니스트 간의 협력이 오랜 역사를 지녔음을 여러 번 강조했고,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두 커뮤니티 너머로 소개됐다. 작은 규모의 단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자신들의 자매애를 여러 시기와 층위로 확장한 것이다.

모두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스트 정치

흑인-아시안 페미니스트 연대 프로젝트는 다른 인종 간에는 연대가 이뤄질 수 없다는 백인우월주의적 담론을 정면으로 배격하는 반례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교차성 페미니즘과 자매애 및 돌봄이라는 페미니즘적 운동 가치가 서로 다른 집단 간에 끈끈한 연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소개한 프로젝트는 인종 담론이 비교적 활발한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억압 받는 모두의 해방을 위한 교차적 연대는 어디서든 요구된다는 점에서 다른 운동에서도 참고할 만 예다. 특히 몇 년 새 한국에서도 납작한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TERF와 같은 세력이 등장했음을 고려할 때 흑인-아시안 연대 프로젝트가 던지는 차이와 연대의 정치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억압은 한 가지 축으로만 이뤄져 있는 게 아니며, 다층적이고 복잡한 억압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차이에 기반한 연대가 필요하다. 차이를 잇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정치가 중요한 이유다.


참고문헌

  • 정희진(2017). 『페미니즘의 도전』. 서울: 교양인.
  • Cohen, Cathy(1997). “Punk, Bulldaggers, and Welfare Queens: The radical potential of queer politics?”, GLQ 1, pp.437-465.
  • Crenshaw, K. (1991). “Mapping the Margins: Intersectionality, Identity Politics, and Violence against Women of Color”, Stanford Law Review, 43(6), pp.1241–1299.
  • Ikemoto, Lisa C. (1993). “Traces of the Master Narrative in the Story of African American/Korean American Conflict: How We Constructed Los Angeles”, California Law Review, 66(4), pp.1581-1598.
  • Hooks, Bell(1987). Feminist Theory: From Margin to Center. London, England: Plut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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